리영희
리영희(李泳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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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9.12.2 북한(현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
사망 |
2010.12.5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
출생과 소년시절(1929~8.15광복 이전)
리영희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근국은 영림서 직원이었고 어머니 최희저는 지주의 딸이었다. 리영희가 태어난 1929년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20년에 이르는 암담한 때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평북 운산이나 삭주는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늘 소외되어 왔는데,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는 어느 지역 못지않게 혹심한 수탈을 당했다.
리영희가 5세부터 14세까지 10년 동안 살면서 유치원과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닌, 사실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삭주군 대관은 리영희의 '마음의 고향'이다. 리영희가 어릴 적 살았던 고향은 지리적으로는 첩첩산중이었지만 문명개화는 남쪽 지역보다 훨씬 앞섰다. 중국을 통해 선교사가 드나들면서 기독교가 일찍부터 터를 잡았고, 그로 인해 서양문물이 비교적 일찍 수입되었다. 그 때문에 평등의식이 강했다.
리영희가 자란 1930년대 조선의 상황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참담한 시대였다. 그런 속에서도 평안도 산골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자라고 식민지 교육이나마 교육은 이루어졌다. 안정된 가정에서 태어난 리영희는 당시로서는 드문 유치원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면장을 지낸 할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개명한 유지였고, 어머니는 벽동군의 거부로 알려진 천석꾼의 딸이었으며, 구한말 신식 교육제도에 따라 아버지는 의주에 설립된 농림학교를 나와 평북 영림서의 공무원으로 근무하여, 지역에서는 상류 계층이 되어 리영희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심성이 고운 편이었고, 반대로 어머니는 성격이 괄괄한 여장부였다.
리영희는 당시 일제의 창씨개명으로 인하여 평강호강(平江豪康)이 되었다.
리영희는 머리가 꽤 뛰어난 편이었는지, 소학생(초등학생) 시절에 늘 전교 1,2등을 다투었다. 그러나 대관면의 수재로 소문 난 그도 급장은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리영희는 이를 본인의 성격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교만해졌으며, '모'가 있었던 인간적 결점 때문이 아닌지 회상하고 있다. 리영희는 스스로 가족의 '민중사'라고 평가한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이 두 사건은 그의 성장기 의식에 큰 영향을 주고, 비판과 저항의 정신을 갖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머슴 문학빈 사건과 외삼촌 최인모 사건이다.
리영희는 어머니에게서 이 두 가지 한 맺힌 가족사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리영희의 어머니는 자기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은 물론 아버지의 목숨까지 머슴(독립군 문학빈)에게 빼앗긴 데 대한 증오와 친정오라버니의 정신 나간 행동에 대한 원망을 평생 안고 살았다. 리영희는 친척을 통틀어 존경할 만한 인물이 별로 없는데, 오직 이 외삼촌만을 평생 존경해 왔고, "나의 생애에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의식의 역사'가 됐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 자신의 내부에 외가의 불행에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정신적 '내면의 원시시대'에서 '무의식의 근거'가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회상한다.
1944년 봄, 소학교를 졸업한 리영희는 신의주 사범대학과 경성공립학교 두 군데 모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와 6학년 담임 일본인 교사의 뜻으로 경성공립학교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취업을 위해 경성공립학교 전기과를 택했을 터였고, 서울 대방동에 소재한 이 학교는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교과체계로, 졸업하면 3종 전기사 자격증을 주기 때문에 취업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리영희의 서울 유학생활은 고달팠다. 2학년 때까지 흑석동에서 하숙을 하며 십 리나 걸어 학교에 다녔다. 일제 말기여서 식량은 배급제로 하루 세 끼 밥을 먹기 어려웠다. 만주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콩깻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한때는 을지로 청계천가로 하숙을 옮겨 전차로 통학하기도 했다.
학업은 3학년을 끝으로 일절 중단되고 4학년부터는 전시동원체제에 따라 노동에 동원되었다. 리영희는 아무리 전쟁 막바지의 전시체제라고 하지만 아직 솜털도 다 벗지 못한 소년학생들의 공부를 아예 작파시키고 노동에만 동원하는 일본 군국주의에 하염없는 분노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리영희는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라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서, 집에 오면 하숙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일밖에 없었다. 리영희는 당시 본인이 대담함‧적극성‧모험심 같은 것이 없는 소년이었고, 흔히 말하는 '공부벌레'의 전형이었다고 회상한다.
리영희는 일본인 학생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일본어를 익혀 일본문학은 물론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의 명저들을 읽을 수 있었고, 한문 교육이 강했던 덕으로 당시(唐詩)를 비롯한 중국 고전을 제법 독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