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당나라 중후반기)
 
(사용자 6명의 중간 판 4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
[[파일:Tang Dynasty circa 700 CE-1-.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당(唐,618~907)''']]
 +
==개요==
 +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唐)은 현무문의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2대 황제 [[당 태종]]([[당 태종|이세민]]) 때의 '[[정관의 치]]'와 [[측천무후]] 시대, 또 위씨 황후 치세를 극복해 낸 [[당 현종]] 때의 '[[개원의 치]]'로써 중국 역사상 매우 뚜렷한 정치사회적 제도의 틀을 완성한다. 그러나 [[양귀비]]의 득세로 말미암은 [[안사의 난]]으로부터 비롯한 갖가지 내전에 시달리다 결국 [[황소의 난]]으로 말미암아 약 300년 만에 나라의 문을 닫게 된다.
  
당의 건립과 통일사업
+
== 역사 ==
수말의 농민 대기의는 수왕조를 전복시켰지만 승리의 결과는 태원 유수 이연에게 돌아갔다. 이연은 관롱 지주집단의 대귀족으로, 조부였던 이호는 서위 팔주국의 1인이자 북주의 개국공신이기도 하여 사후 당국공으로 추봉되었었다. 이연은 수의 붕괴가 반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아들인 세민과 함께 병력을 모아 반수 거병을 모의하였다. 이때 전국의 정치,군사의 형세는 이연의 거병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617년 5월 이연은 드디어 돌궐과 유무주의 태원 침공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징집하여 부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살해하고 진양에서 반수의 가치를 들었다. 이후 이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황제로 추대한 후, 양제는 태상황에 추존하였고 스스로는 대승상,당왕의 직위를 갖고서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618년에 양제를 시해한 뒤에 이연은 양유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조를 건립하고 무덕이라 개원하니 그를 당고조라 칭한다. 그 후 법령을 간소화 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군사상으로는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하여 원교근공의 책략에 입각하여 전국 통일의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623년에 하북으로 진군하여 두건덕의 잔존 부대인 유흑달을 소멸시키고 하북 지역을 확보한 뒤 624년 강회로 진군한다. 628년 돌궐에 의지하던 양사도가 부하에게 살해되어 당은 전국통일을 하게된다. 당 태종 이세민은 이연의 둘째 아들이다. 이연이 진양에서 거병하여 관중을 함락시키고 군웅을 제압하면서 전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의 공적은 매우 두드러졌다. 이리하여 이세민의 명성과 지위가 상승하였다. 그 후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즉위 후 정관이라고 개원하니 그가 당 태종이다. 이 시기는 정관의 치세라고 일컬어지는 시기로 봉건사회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안정되었다. 당 태종과 군신들은 수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농민기의의 막강한 위력을 인식하고 통치에 주력하여 당좡조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였다. 또한 청정에도 노력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인재 등용에도 주의하였다. 전제군주로서 흔치않게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581년 양견은 북주의 여러 번왕과 지방을 관할하던 저항세력을 제거한 후, 정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항위에 올라 국호를 수로 고치고 장안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가 바로 역사상 유명했던 수 문제이다. 588년 수 문제는 내정을 공고하게 한 후, 강남을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출정시켜 진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나라의 후주인 숙보를 포로로 잡음으로써 장기간에 걸쳐 분열되었던 국면이 끝나고 중국은 다시 통일된다. 수 문제는 즉위한 후 인심을 수습하고 통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그 조치로는 첫째, 균전령과 조용조법의 반포 둘째, 삼장조직의 정비와 호적의 정리 셋째, 관제의 개정과 지방 기구의 간소화가 있다.
 
  
당의 건립과 통일사업
+
===건립과 통일과정===
수말의 농민 대기의는 수왕조를 전복시켰지만 승리의 결과는 태원 유수 이연에게 돌아갔다. 이연은 관롱 지주집단의 대귀족으로, 조부였던 이호는 서위 팔주국의 1인이자 북주의 개국공신이기도 하여 사후 당국공으로 추봉되었었다. 이연은 수의 붕괴가 반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아들인 세민과 함께 병력을 모아 반수 거병을 모의하였다. 이때 전국의 정치,군사의 형세는 이연의 거병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617년 5월 이연은 드디어 돌궐과 유무주의 태원 침공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징집하여 부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살해하고 진양에서 반수의 가치를 들었다. 이후 이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황제로 추대한 후, 양제는 태상황에 추존하였고 스스로는 대승상,당왕의 직위를 갖고서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618년에 양제를 시해한 뒤에 이연은 양유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조를 건립하고 무덕이라 개원하니 그를 당고조라 칭한다. 그 후 법령을 간소화 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군사상으로는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하여 원교근공의 책략에 입각하여 전국 통일의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623년에 하북으로 진군하여 두건덕의 잔존 부대인 유흑달을 소멸시키고 하북 지역을 확보한 뒤 624년 강회로 진군한다. 628년 돌궐에 의지하던 양사도가 부하에게 살해되어 당은 전국통일을 하게된다. 당 태종 이세민은 이연의 둘째 아들이다. 이연이 진양에서 거병하여 관중을 함락시키고 군웅을 제압하면서 전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의 공적은 매우 두드러졌다. 이리하여 이세민의 명성과 지위가 상승하였다. 그 후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즉위 후 정관이라고 개원하니 그가 당 태종이다. 이 시기는 정관의 치세라고 일컬어지는 시기로 봉건사회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안정되었다. 당 태종과 군신들은 수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농민기의의 막강한 위력을 인식하고 통치에 주력하여 당좡조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였다. 또한 청정에도 노력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인재 등용에도 주의하였다. 전제군주로서 흔치않게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도 위징이라는 자의 간언이 두드러졌다.
+
수말의 농민 대기의는 [[수]] 왕조를 전복시켰지만 승리의 결과는 태원 유수 [[당 고조|이연]]에게 돌아갔다. 이연은 수의 붕괴가 반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아들인 [[이세민]]과 함께 병력을 모아 반수 거병을 모의하였다.
무측천의 통치
+
617년 5월 이연은 드디어 [[돌궐]]과 유무주의 태원 침공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징집하여 부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살해하고 진양에서 반수의 가치를 들었다. 이후 이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황제로 추대한 후, 양제는 태상황에 추존하였고 스스로는 대승상,당왕의 직위를 갖고서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618년에 [[수 양제]]를 시해한 뒤에 이연은 양유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조를 건립하고 무덕이라 개원하니 그를 당 고조(이연)라 칭한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다. 그녀의 재위 기간 15년이다. 고종은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반대가 있자 반대하는 이들을 죽이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운다. 683년 고종의 사후 무측천은 황태후의 신분으로 정ㅎ사를 관장하다가 이듬해 중종을 페위시키고 예종 이단을 왕위에 앉힌 후 스스로 정사를 좌우하였다. 이에 대한 종실 제왕 및 대신들의 반대를 무측천은 혹리의 임용과 엄형준법으로 타압한다. 690년 무측천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주로 바꾼뒤 동도인 낙을 신도로 삼는다. 무측천은 인재 등용과 같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부정척인 측면 또한 보인다. 705년 무측천의 병세가 악화되자 일부 대신이 당 중종의 복벽을 감행하고 무주의 통치가 종언을 고하게 된다. 712년 예종이 정쟁의 격화를 회피하기 위해 이륭기에게 왕위를 양도하나 종족간의 암투가 끊이지 않는다. 이듬해 이륭기는 태평공주와 그 측근을 죽임으로써 정쟁이 끝나고 이륭기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당 현종이다.  그의 통치 시기가 번영과 풍요의 상태를 맞이하는데 현종 통치의 전기인 30년을 개원의 치세라고 일컫는다.
+
그 후 [[법령]]을 간소화 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군사상으로는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하여 원교근공의 책략에 입각하여 전국 통일의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623년에 하북으로 진군하여 두건덕의 잔존 부대인 유흑달을 소멸시키고 하북 지역을 확보한 뒤 624년 강회로 진군한다. 628년 돌궐에 의지하던 양사도가 부하에게 살해되어 당은 전국통일을 하게된다.
==당나라 중후반기==
 
나라가 망조에 들어 후대에 가면 갈수록 환관들의 세력이 강해져 환관들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되고, 많은 황제들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또한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잃어 절도사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를 틈타 북방 민족들의 침략이 본격화된다. 매우 어려운 혼란한 시기를 대제국 당은 150년을 버틴다.  
 
  
안사의 난을 계기로 당조의 율령제는 확연히 변모한다.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수취제도인 조용조는 [[양세법]]으로 통합된다. [[양세법]]은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제한을 없앤 제도로서 이후 국가 재정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
===당나라 초반기===
 +
당을 건국하고 현종에 이르러 당나라의 북방에 위치한 돌궐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대제국으로서의 도약을 시작한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태종]]이 있었던 시기의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라고 부른다. 이후 고종이 즉위했고 당 고종은 신라의 요청을 받고 출정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나당전쟁을 벌이게 된다.
 +
===당나라 중반기===
 +
[[측천무후]]가 나라의 정권을 잡고 나라를 번성하게 하는데 이때를 [[무주의 치]]라고 한다. 이후 내란으로 잠시 쇠퇴하였다가 [[현종]] 때에 다시 부흥하는데 이 시기를 [[개원의 치]]라고 한다. 이 시기는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띠었다. 북방 이민족의 침공을 막고 수년간의 태평성대를 이룩한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국세가 어려워진다.
  
사회와 경제상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낳았다. 새로운 품종과 농기구의 도입, 새로운 농법의 발전, 적극적인 개간과 간척으로 농업생간력이 대대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강남지방의 방전은 눈부실 정도여서 경제의 중심지가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간섭이 완화되어 상업이 발달하고, 운하망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에 대도시가 발전했으며 농촌에서도 시장이 등장했다.
+
이 시기에는 사회와 경제상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낳았다. 새로운 품종과 농기구의 도입, 새로운 농법의 발전, 적극적인 개간과 간척으로 농업생간력이 대대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강남지방의 방전은 눈부실 정도여서 경제의 중심지가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간섭이 완화되어 상업이 발달하고, 운하망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에 대도시가 발전했으며 농촌에서도 시장이 등장했다.
  
*[[번진체제]]의 성립 - [[안사의 난]] 과정에서 반란군의 세력 확대 방지차원에서 이 체제가 성립되었다. 각지에 절도사를 두고 다수의 병력을 지휘토록 했다. 번진을 관장하는 절도사는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것과 달리 보통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거대한 지방세력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방행정 단위가 되었다.  
+
또한 [[번진체제]]가 성립되었다. [[번진체제]]란, [[안사의 난]] 과정에서 반란군의 세력 확대 방지차원에서 설립된 체제이다. 각지에 절도사를 두고 다수의 병력을 지휘토록 했다. 번진을 관장하는 [[절도사]]는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것과 달리 보통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거대한 지방세력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방행정 단위가 되었다.
 +
===당의 후반기===
 +
나라가 망조에 들어 후대에 가면 갈수록 환관들의 세력이 강해져 환관들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되고, 많은 황제들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또한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잃어 [[절도사]]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를 틈타 북방 민족들의 침략이 본격화된다.  
  
 +
[[안사의 난]]을 계기로 당조의 율령제는 확연히 변모한다.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수취제도인 [[조용조]]는 [[양세법]]으로 통합된다. [[양세법]]은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제한을 없앤 제도로서 이후 국가 재정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
결국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거쳐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당한다.
  
(756-762) 당 숙종 이형
+
== 정치 ==
 +
당조는 수왕조에서 많은 각종의 정치체제를 이어받았고, 대외정책에서는 적극적인 책봉정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문화권을 수립했다.수왕조에서 실시된 여러 제도들이 당나라까지 이어져 통일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적 기반의 역할을 했다.
  
(762-779) '''당 대종 이예'''    [[안사의 난]] 진압
+
당대 관제의 중심은 [[3성6부제]]이다. 3성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말하고 6부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말한다. 중서성에서 조칙 및 법안을 기초하면 문하성에서 그것을 심의한 후에 상서성에서 실시했다. 그리고 상서성에는 6부가 소속되어 업무를 담당했다.
  
(779-805) 당 덕종 이괄
+
지방행정을 위해서는 구도와 변경 등 특수한 지역에 부가 설치되었고, 일반적으로는 주와 그 아래에 현을 두었다. 이 제도가 바로 [[주현제]]이다.
  
(805)    당 순동 이송
+
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도로서는 수대와 마찬가지로 당대에도 [[과거제]]가 시행되었다. 토지제도는 [[균전제]], 조세제도는 [[조용조]], 군사제도는 [[부병제]]가 실시되었다.
  
(805-820) 당 현종 이순
+
== 문화 ==
 +
[[과거제]]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시험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화를 융합하고,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성숙한 당문화는 외형의 아름다움과 귀족 취미로 넘쳤고 다양한 외래 문물의 수용으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문학의 경우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과 [[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820-824) 당 목종 이항
 
  
(824-826) 당 경종 이담
+
==역대 황제별 주요 사건==
 +
{| class="wikitable"
 +
|+ 당나라 연대표
 +
|-
 +
! 제호(帝號)
 +
! 이름
 +
! 재위기간
 +
! 주요사건
 +
|-
 +
| align="center" | 고조
 +
| align="center" | 이연
 +
| align="center" | 618~626년
 +
| 626년<br>현무문에서의 정변
 +
|-
 +
| align="center" | 태종
 +
| align="center" | 이세민
 +
| align="center" | 626~649년
 +
| 626년~649년<br>이 시기를 역사상 '[[정관의 치|정관지치]]'라고 함<br>627년~645년<br>현장이 인도로 감<br>630년<br>당나라 군대가 동돌궐 군대를 격파함<br>
 +
|-
 +
| align="center" | 고종
 +
| align="center" | 이치
 +
| align="center" | 649~683년
 +
| 653년<br>진석정 봉기<br>657년<br>당나라 군대가 서돌궐을 격파<br>683년<br>이치가 병으로 죽고 무측천이 정사를 처리하게 됨
 +
|-
 +
| align="center" | 중종
 +
| align="center" | 이현
 +
| align="center" | 683년
 +
|
 +
|-
 +
| align="center" | 예종
 +
| align="center" | 이단
 +
| align="center" | 684년
 +
|
 +
|-
 +
| align="center" | 무후
 +
| align="center" | 무측천
 +
| align="center" | 684~705년
 +
| 690년<br>무측천이 황제로 자칭하고 국호를 주라 고침
 +
|-
 +
| align="center" | 중종
 +
| align="center" | 이현
 +
| align="center" | 705~710년
 +
|
 +
|-
 +
| align="center" | 예종
 +
| align="center" | 이단
 +
| align="center" | 710~712년
 +
|
 +
|-
 +
| align="center" | 현종
 +
| align="center" | 이융기
 +
| align="center" | 712~755년
 +
| 713~741년<br>이 시기를 역사상 '[[개원의 치|개원지치]]'라고 함<br>743~753년<br>감진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감
 +
|-
 +
| align="center" | 숙종
 +
| align="center" | 이형
 +
| align="center" | 756~762년
 +
|
 +
|-
 +
| align="center" | 대종
 +
| align="center" | 이예
 +
| align="center" | 762~779년
 +
| [[안사의 난]]
 +
|-
 +
| align="center" | 덕종
 +
| align="center" | 이괄
 +
| align="center" | 779~805년
 +
|
 +
|-
 +
| align="center" | 순종
 +
| align="center" | 이송
 +
| align="center" | 805년
 +
|
 +
|-
 +
| align="center" | 현종
 +
| align="center" | 이순
 +
| align="center" | 805~820년
 +
|
 +
|-
 +
| align="center" | 목종
 +
| align="center" | 이항
 +
| align="center" | 820~824년
 +
|
 +
|-
 +
| align="center" | 경종
 +
| align="center" | 이담
 +
| align="center" | 824~826년
 +
|
 +
|-
 +
| align="center" | 문종
 +
| align="center" | 이양
 +
| align="center" | 826~840년
 +
|
 +
|-
 +
| align="center" | 무종
 +
| align="center" | 이염
 +
| align="center" | 840~846년
 +
|
 +
|-
 +
| align="center" | 선종
 +
| align="center" | 이침
 +
| align="center" | 846~859년
 +
| [[구보의 난]]
 +
|-
 +
| align="center" | 의종
 +
| align="center" | 이최
 +
| align="center" | 859~873년
 +
|
 +
|-
 +
| align="center" | 희종
 +
| align="center" | 이현
 +
| align="center" | 873~888년
 +
| [[황소의 난]]
 +
|-
 +
| align="center" | 소종
 +
| align="center" | 이엽
 +
| align="center" | 888~904년
 +
|
 +
|-
 +
| align="center" | 애제
 +
| align="center" | 이축
 +
| align="center" | 904~907년
 +
|
 +
|}
  
(826-840) 당 문종 이양
+
==참고문헌==
 
+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840-846) 당 무종 이염
+
* <<중국통사>>, 범문란, 꿈엔들
 
+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
(846-859) '''당 선종 이침'''    [[구보의 난]] 발발. 절도사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 채 부임지의 통치에는 관심이 없는 상황으로 인해 농민들  은 부담만 가중되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 또한 악화되는 상황에서 구보의 난이 발발함.
+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시공사
 
+
* <<유목민 이야기>>, 김종래, 꿈엔들
(859-873) 당 의종 이최
+
[[분류:당나라| ]]
 
 
(873-888) '''당 희종 이현'''    [[황소의 난]] 시작. 880년 동도 낙양 함락. 이후 장안까지 진격. 희종의 반격으로 황소의 난 실패로 돌아감.
 
 
 
(888-904) 당 소종 이엽
 
 
 
(904-907) 당 애제 이축
 

2016년 6월 27일 (월) 16:17 기준 최신판

당(唐,618~907)

개요

나라를 멸망시킨 당(唐)은 현무문의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2대 황제 당 태종(이세민) 때의 '정관의 치'와 측천무후 시대, 또 위씨 황후 치세를 극복해 낸 당 현종 때의 '개원의 치'로써 중국 역사상 매우 뚜렷한 정치사회적 제도의 틀을 완성한다. 그러나 양귀비의 득세로 말미암은 안사의 난으로부터 비롯한 갖가지 내전에 시달리다 결국 황소의 난으로 말미암아 약 300년 만에 나라의 문을 닫게 된다.

역사

건립과 통일과정

수말의 농민 대기의는 왕조를 전복시켰지만 승리의 결과는 태원 유수 이연에게 돌아갔다. 이연은 수의 붕괴가 반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아들인 이세민과 함께 병력을 모아 반수 거병을 모의하였다. 617년 5월 이연은 드디어 돌궐과 유무주의 태원 침공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징집하여 부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살해하고 진양에서 반수의 가치를 들었다. 이후 이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황제로 추대한 후, 양제는 태상황에 추존하였고 스스로는 대승상,당왕의 직위를 갖고서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618년에 수 양제를 시해한 뒤에 이연은 양유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조를 건립하고 무덕이라 개원하니 그를 당 고조(이연)라 칭한다. 그 후 법령을 간소화 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군사상으로는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하여 원교근공의 책략에 입각하여 전국 통일의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623년에 하북으로 진군하여 두건덕의 잔존 부대인 유흑달을 소멸시키고 하북 지역을 확보한 뒤 624년 강회로 진군한다. 628년 돌궐에 의지하던 양사도가 부하에게 살해되어 당은 전국통일을 하게된다.

당나라 초반기

당을 건국하고 현종에 이르러 당나라의 북방에 위치한 돌궐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대제국으로서의 도약을 시작한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태종이 있었던 시기의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라고 부른다. 이후 고종이 즉위했고 당 고종은 신라의 요청을 받고 출정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나당전쟁을 벌이게 된다.

당나라 중반기

측천무후가 나라의 정권을 잡고 나라를 번성하게 하는데 이때를 무주의 치라고 한다. 이후 내란으로 잠시 쇠퇴하였다가 현종 때에 다시 부흥하는데 이 시기를 개원의 치라고 한다. 이 시기는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띠었다. 북방 이민족의 침공을 막고 수년간의 태평성대를 이룩한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국세가 어려워진다.

이 시기에는 사회와 경제상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낳았다. 새로운 품종과 농기구의 도입, 새로운 농법의 발전, 적극적인 개간과 간척으로 농업생간력이 대대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강남지방의 방전은 눈부실 정도여서 경제의 중심지가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간섭이 완화되어 상업이 발달하고, 운하망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에 대도시가 발전했으며 농촌에서도 시장이 등장했다.

또한 번진체제가 성립되었다. 번진체제란, 안사의 난 과정에서 반란군의 세력 확대 방지차원에서 설립된 체제이다. 각지에 절도사를 두고 다수의 병력을 지휘토록 했다. 번진을 관장하는 절도사는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것과 달리 보통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거대한 지방세력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방행정 단위가 되었다.

당의 후반기

나라가 망조에 들어 후대에 가면 갈수록 환관들의 세력이 강해져 환관들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되고, 많은 황제들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또한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잃어 절도사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를 틈타 북방 민족들의 침략이 본격화된다.

안사의 난을 계기로 당조의 율령제는 확연히 변모한다.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수취제도인 조용조양세법으로 통합된다. 양세법은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제한을 없앤 제도로서 이후 국가 재정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결국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거쳐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당한다.

정치

당조는 수왕조에서 많은 각종의 정치체제를 이어받았고, 대외정책에서는 적극적인 책봉정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문화권을 수립했다.수왕조에서 실시된 여러 제도들이 당나라까지 이어져 통일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적 기반의 역할을 했다.

당대 관제의 중심은 3성6부제이다. 3성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말하고 6부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말한다. 중서성에서 조칙 및 법안을 기초하면 문하성에서 그것을 심의한 후에 상서성에서 실시했다. 그리고 상서성에는 6부가 소속되어 업무를 담당했다.

지방행정을 위해서는 구도와 변경 등 특수한 지역에 부가 설치되었고, 일반적으로는 주와 그 아래에 현을 두었다. 이 제도가 바로 주현제이다.

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도로서는 수대와 마찬가지로 당대에도 과거제가 시행되었다. 토지제도는 균전제, 조세제도는 조용조, 군사제도는 부병제가 실시되었다.

문화

과거제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시험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화를 융합하고,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성숙한 당문화는 외형의 아름다움과 귀족 취미로 넘쳤고 다양한 외래 문물의 수용으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문학의 경우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역대 황제별 주요 사건

당나라 연대표
제호(帝號) 이름 재위기간 주요사건
고조 이연 618~626년 626년
현무문에서의 정변
태종 이세민 626~649년 626년~649년
이 시기를 역사상 '정관지치'라고 함
627년~645년
현장이 인도로 감
630년
당나라 군대가 동돌궐 군대를 격파함
고종 이치 649~683년 653년
진석정 봉기
657년
당나라 군대가 서돌궐을 격파
683년
이치가 병으로 죽고 무측천이 정사를 처리하게 됨
중종 이현 683년
예종 이단 684년
무후 무측천 684~705년 690년
무측천이 황제로 자칭하고 국호를 주라 고침
중종 이현 705~710년
예종 이단 710~712년
현종 이융기 712~755년 713~741년
이 시기를 역사상 '개원지치'라고 함
743~753년
감진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감
숙종 이형 756~762년
대종 이예 762~779년 안사의 난
덕종 이괄 779~805년
순종 이송 805년
현종 이순 805~820년
목종 이항 820~824년
경종 이담 824~826년
문종 이양 826~840년
무종 이염 840~846년
선종 이침 846~859년 구보의 난
의종 이최 859~873년
희종 이현 873~888년 황소의 난
소종 이엽 888~904년
애제 이축 904~907년

참고문헌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 <<중국통사>>, 범문란, 꿈엔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시공사
  • <<유목민 이야기>>, 김종래, 꿈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