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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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거연한간

거연한간(居延漢簡)은 중국 간쑤성 북서부의 에티나 강/에치나 강/어지나 강 유역에서 발굴된[1] 한나라 시대의 1만여 편의 문서들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현전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는 기원 전 102년(전한 漢武帝 태초太初 3), 가장 늦은 것은 기원 후 30년(후한 光武帝 건무建武 6)의 것이다.
거연한간(居延漢簡)이 발굴된 지역은 당대 행정구역 상 거연현에 해당하며, 전한 무제(漢武帝)가 유목민족 흉노(匈奴)를 공격, 제압하고자 설치한 하서4군(河西四郡: 무위, 장액, 주천, 돈황) 중에서도 최전방 거점으로 기능한 곳이다. 상호견제에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한 무제는 기원 전 102년 이 지역을 얻은 후 지은 거연성에 감시초소와 둔전 등과 같은 시설을 만들어 이 곳을 방어하였다. 국경 방위를 위해 내지에서 이주해온 관리,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거주하며 군사, 행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작성된 행정문서를 포함한 많은 문서들을 통틀어 거연한간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 문서들은 나무나 대나무를 얇게 자른 위에 칠묵(漆墨)으로써 주로 작성되었으며, 필체는 한나라의 예서체(漢隸體)다. 문서의 작성자는 대부분이 거연현(居延縣)의 하급 관리인 이사(吏士)들이었던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지는 않으나, 소박하고 고졸하면서도 힘이 있는 필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 종류는 당시 거연현의 관청에서 작성한 공문서, 장부(帳簿), 봉화烽火, 신부信符, 보급補給, 법률法律, 의료문서 등으로 아주 다양하다. 이는 당대 한자 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 군사, 의료, 복식,[2] 자연생태 등 사회 모습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 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학술자료인 셈이다.

발견 및 소장

거연한간은 크게 두 차례 발굴되어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첫 발굴조사는 1930년대 초로[3], 스웨덴인 베르그만(Folke Bergman)[4]이 이끌던 서북과학조사단(西北科學調査團)의 고고학반에 의해 조사가 시작되었다. 1930년부터 1년간의 조사로 베르그만이 카라호도 남부 보로촌에서 360여 점의 한대(漢代) 목간(木簡)을 발견한 후로 1년도 채 지나기 전 거연성 지역 성채와 봉수대 발굴로 약 1만 조각의 한대 목간과 죽간(竹簡)이 발견된다.[5]
이 유물들은 중일전쟁 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국회도서관에 잠시 보관된 뒤, 대만에 반환되어 현재는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中央硏究院歷史言語研究所)[6]에 소장되어 있으며,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DB로도 구축되어 있다. 또한 중국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에 의하여 『거연한간갑을편(居延漢簡甲乙編)』(上․下)이라는 책으로도 출판된 바 있다.
이어 1970년대, 약 2만 점의 간독(簡牘)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이전에 출토된 거연한간과의 구분을 위하여 거연신간(居延新簡)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감숙성박물관(甘肅省博物館)[7]에 다수가 소장되어 있다.[8] 학계에서는 『거연한간』의 분석을 통한 서북 변경지역의 군사 편제, 군정조직 및 둔전제(屯田制)운영, 문서행정 연구 등을 중점적으로 행하였으나, 차츰 서북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여러 방면에서의 폭 넓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거연한간 형성의 시대적 배경

거연 부근 한대 성곽 유지

한나라는 (秦)을 이어 통일제국을 수립했으나 흉노(匈奴)를 비롯한 주변민족의 침탈로 인한 대외적 불안을 면치 못하였다. 특히 흉노는 강력한 기마부대를 앞세워 의 변경지역을 약탈하였고, 한정부는 무력으로 흉노를 복속시키기보다는 흉노에게 물자를 제공하여 침략의 구실을 없애는 기미(羈縻)정책을 시행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러한 대외적 열세에 처해 있던 한나라는 한 무제를 기점으로 흉노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였다. [9] 무제는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매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고, 이는 중국 서북지방; 하서지역(河西地域)을 접수하여 돈황군(敦煌郡)‧무위군(武威郡)‧장액군(張掖郡)‧주천군(酒泉郡)으로 이루어진 하서사군(河西四郡)[10]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얻은 하서주랑(河西走廊)은 한나라의 서북 변경지역의 방위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며 흉노와 접경하는 군사 밀집지,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은 서역으로의 무역로를 확보하고, 흉노와 티베트족이 서로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며 방위와 무역성행의 기반을 닦았다.[11]
특히 장액군의 북쪽에 위치한 거연현은 최북단에 위치하여 흉노와 자주 마주하며 전투를 벌이는 지역이었기에 대규모 군사시설과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가족을 비롯한 민간인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오늘날 중국의 내몽고자치구 서부에 해당하는, 평균 해발고도가 900 ~ 1,100m 정도로 높고 사막이 많은 건조한 지역이었기에 사람들의 생활범위는 오아시스 부근이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 대규모의 수졸(戍卒)들이 배치된 봉수(烽燧)는 군정업무가 이루어지는 최전방이자 행정문서들의 최초 생산지이자 최종 도달지점이었다. 따라서 봉수를 기점으로 한 각급 군정단위에서 작성/폐기한 이들 공문서가 여기서 대량 발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발견된 문서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여 이 곳에서 생활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케 한다.

특징과 의의

문자학적 특징과 의의

거연한간에서 확인되는 문자들은 그 이전시대 마왕퇴백서(帛書), 진간(秦簡)의 사례에 비하면 소전체는 소수에 불과하고, 이미 성숙한 단계의 예서에 진입하여 한자학 상에서 예변의 과정을 마치고 성숙한 단계로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예에서 변형하는 과도기적인 한나라 예서체라고는 하나 이미 금문자(今文字)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자체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이 문서는 하급관리들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작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신속하고 간편한 문자사용을 위해 초서(草書)와 장초(章草)체를 보조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간혹 행서와 해서체가 확인되기도 한다.
이들의 글은 대부분이 화려하거나 정교하지는 않은, 소박한 필체로 되어 있다. 발견된 한간 중에는 비단 행정문서 뿐 아니라 같은 글자만을 반복해 적거나, 끝부분을 독특하게 치켜 올리며 그려 내는 서법을 연습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목간이 있기도 했다. [12] 이렇듯 거연한간은 전한 무제 대부터 후한 화제(和帝) 영원(永元)초에 달하는 시대의 예서체를 띠고 있어 당대 예서의 변형, 진행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주로 확인되는 제서(帝書)나 비문(碑文) 등의 주요 필사계층이 상류층이었던 것에 비해, 거연한간은 중앙과 멀리 떨어진, 가히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의 중하층 관리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당시 서민들의 실제적으로 사용한 예서체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연구와 파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더불어 한간 중에는 비단 예서 뿐 아니라 문서 작성의 편의를 위해 보조적으로 사용한 초서, 간혹 행서, 해서에 이르는 여러 자형이 발견되고 있기에 한 대 書史 전반의 특징을 연구하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13]

5. 거연한간.PNG

그렇다면 그 중 일부 예시와 그들에 대한 필적 분석내용에 대해 소략하게나마 살펴 보고자 한다. [14] 맨 오른쪽 간독은 가장 이른 전한 태초3년(기원 전 102)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수단대소, 경중완급, 잠두연미(蠶頭燕尾)[15]와 같은 필법으로 이미 나름의 ‘정갈하고 원숙’한 표현을 보인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한간은 원강4년(기원 전 62)에 제작됐는데, 예술성은 앞의 것보다 덜 하지만 한예 팔분체(八分體)의 특성을 잘 갖추고 있다. 이 두 자료는 이미 당시에 어느 정도 팔분한예가 정립되어 잘 드러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왼쪽에서 두 번째 간독은 양삭 3년(기원 전 24), 왼쪽 첫 번째 간독은 홍가원년(기원 전 20)에 제작된 전한 성제의 것으로 서체가 서로 유사하여 같은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적으로 표준적 모습의 장초로 적힌 이 간독은 필체가 매우 정갈하다는 평을 받는다. 더불어 이미 일정한 형식을 갖춘 장초가 형성되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사회-생활사적 의의

전국 각지에서 징집된 수졸(戍卒)들은 서북 변경지대에 파견된 뒤 변경지역에서의 생필품들을 지급받고 각 근무지에 배치되었다. 이때 거연한간을 통해서 당시 거연지방의 군정체계는 도위부都尉部-후관候官-부部-수燧로 이어진다는 사실 뿐 아니라, 기층 방어조직 부와 봉수 근무자의 경제적 실태, 나아가 가족규모, 월봉(月俸), 가족에 대한 식량지급 규정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수졸들에게는 봉전(俸錢)과 식량이 지급됐음에도 경제적 어려움을 면치 못했다.[16]

이에 官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용작(傭作)을 허용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고 사기를 고양시키고자 했다.[17] 이런 용작은 주류 생산방식은 아니었으나 유랑민의 유동심화로 인한 사회적 분열, 노동의 질적 하락을 야기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官에서 용작, 관리와 수졸들의 경제 활동을 묵인한 것은 이런 허용을 통해 이들의 경제성을 충족시켜, 국가의 재정부담 완화를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18]

이 수졸들은 본질적으로 흉노침입에 대비한 경계근무, 문서전달 등 여러 잡역에 근무하였다. 이런 직무 수행 중 질병으로 인한 휴가, 수졸간의 다툼으로 인한 상해[19], 사망[20] 등과 같은 변수, 그 밖의 일상들은 국경의 방비에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이들 내용은 나름의 체계를 갖춘 문서로써 작성, 보고되었다.[21] 뿐만 아니라, 거연한간에는 이들이 상행위, 조서 및 여러 행정문서의 숙지, 회계 기초 九九表, 曆法, 習字, 社祭 등에 대한 내용들도 전한다. 이렇듯 군사적 방비는 결코 수졸 자신들의 일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연한간의 기록을 통해 그들 사회의 모습을 제한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생태환경사적 의의

거연 지역은 중국의 변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한나라 내지에서 차출된 군대가 주둔하고 그에 대한 기록들을 다수 남겨(居延漢簡) 비슷한 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당시 생태계 현황과 변화상을 잘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서북변경지역은 대부분이 사막에 가까운 지형이나, 한대에는 군대가 장기주둔하고 농경과 목축을 하는 수용성은 가진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2]

거연한간에 따르면, 수목이 집중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이런 목재를 베어 다양한 수공품을 만들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대개 ‘땔나무(薪)’와 ‘건초(茭)’가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흔히 연상되는 수목이 무성했다기보다는 잡목과 초류와 같은 식물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지역에서의 땔나무(薪)와 건초(茭)는 그 용도가 다양했는데, 우선 땔나무(薪)는 생활이나 군사용 火木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건초(茭)는 양, 말 등의 가축이 먹는 겨울용 건초나 봉수를 위한 화목으로도 썼다.[23] 이렇게 분포된 ‘薪’와 ‘茭’의 생태 변화는 봉수대(烽燧臺)의 설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각 봉수대에서 필요로 하는 땔나무(薪)와 건초(茭)의 양이 상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간(秦簡)의 전율(田律)에 언급되어 있는 산림/동물 보호법은 한 대까지도 존속해 있었는데, 돈황과 거연 지역에서는 내지와 동일한 『月令詔條』의 사시금(四時禁)이 꽤 자주 발견되었다. 이는 지역 생태계에 생긴 부정적 변화로 인한 불안의식의 반영으로 추정된다.

결국 전한 중기 이후 흉노와의 전쟁 횟수가 증가, 장기화되면서 주둔병사의 수와 봉수대의 설치가 늘어나 보다 많은 개간, 땔나무(薪)와 건초(茭)가 필요해졌을 것이다.[24] 환경이 열악한 변경지대에서 농경지로의 무리한 개간은 생태계의 훼손 문제를 더 심각하게 했을 것임은 자명했다. 즉 거연 지방은 한 대 이후 내지병사들의 이주로 농경과 목축이 접합하는 장소였고, 자연스럽게 생태계에 여러 변화가 야기되었음을 당시 사람들에 의해 작성된 이 문서자료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의병리학사적 의의

이곳에서 발견된 문서 중에는 병에 걸린 병사들에 대한 의료기록 또한 존재한다. 질병에 대한 증상, 이에 대한 약물적 처방, 침구법 등 다양한 방면에 대한 문서가 작성되었으며, 내용으로 미루어상한론(傷寒論) 및 금궤요략(金匱要略)[25]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연한간에는 온리약(溫裏藥), 화담지해평천약(化痰止咳平喘藥), 해표약(解表藥)등이 많아서 溫陽散寒, 辛溫解表하는 처방으로 寒邪에 대처했으며, 이 외에도 사하제(瀉下劑), 구어헐제(驅瘀血劑) 등의 기원으로 생각되는 처방들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계지(桂枝), 융염(戎鹽) 등의 약재 사용을 통해서 전한대의 약재 유통이 매우 활발하였다는 것과, 숙지황(熟地黃)의 사용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탕제(湯劑;탕약), 환제(丸劑)[26], 산제(散劑;가루약), 고제(膏劑)[27] 등 제형이 존재하였으나, 내복약은 주로 마시는(음약;飮藥) 형태로 복용하였으며 탕제는 외용으로만 사용하는 등 일부 복용법이 상한론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침구법에서는 상한론에서도 나타나는 침약병용과 침구병용의 역사가 전한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문서들은 기본적으로 의료 분야에 전문성이 부족한 이사(吏士)에 의해 기록되었기에 그에 따른 나름의 한계가 있으나, 이는 전한시대 군진(軍陣) 의학 현장의 실제적인 모습을 예측할 수 있는 사료이다. 또한 동시대 의료 전문가의 기록인 무위의간(武威醫簡)의 내용과도 매우 유사하므로, 추후 상호간 비교연구를 통하여 추가적으로 상한론의 기원과 전한시대의 의료 상황에 대하여 실증적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28]

참고문헌

단행본

나가사와 카즈토시, 『돈황의 역사와 문화』, 경기: 사계절출판사, 2010.

돈황학대사전편집위원회 편, 『돈황학대사전』, 서울:소명출판, 2016, p.1502.

아츠지데츠지, 『한자의 역사』, 학민사, 1994


학술논문

김경호, 「한대(漢代) 서북변경(西北邊境) 리졸(吏卒)의 일상(日常)」, 『중국사연구』, vol.74, 2011.

안성현, 「居延지역 戍卒의 생활상과 傭作활동」,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오준석, 「秦漢代 문서행정체계 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이미진, 장기원, 최준용, 박성하, 김기봉, 정한솔, 하기태, 「居延漢簡과 傷寒雜病論의 치료법 비교 연구」, 『동의생리병리학회지』, vol.27, 2013.

최덕경, 「거연한간에 나타난 한대 의복과 의생활」, 『역사와경계』, vol.35, 1998.

최덕경, 「거연한간(居延漢簡)을 통해본 서북지역의 생태환경」, 『中國史硏究』, vol.45, 2006.

하기태, 정한솔, 신상우, 「居延漢簡과 傷寒論의 病症 비교 연구」, 『한의병리학회』, vol,25, 2011

홍영희, 「〈居延漢簡〉의 書寫적 特徵- 隷書와 草書를 中心으로」, 『中國學硏究』, vol.35, 2006.


전자자료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1. 黑河라고도 하며, 간쑤성(감숙성甘肅省) 장액시(張掖市)에서 발원하여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治州의 아라산맹(阿拉善盟) 에젠기(액제납기;額濟納旗)를 거쳐 거연해(거연택)로 흐른다. 여기서 ‘거연’에 ‘거연海’라는 이명이 있는 것은 이 곳이 염호이기 때문이다. 초승달 모양으로 된 하나의 호수였으나 오늘날은 동과 서 두 개로 나뉘어 있다.
  2. 거연한간에서 언급되는 의복은 그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의복의 묘사도 형태, 제작공정, 색깔, 소속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그들의 복식문화는 물론 경제, 지역 환경을 짐작케 한다. 이곳은 본디 흉노족이 거주하던 곳으로 의복도 기본적으로 상하의가 분리된 형태로, 이동이 많은 유목민족의 특징을 반영하여 활동성과 기능성이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가하면 소매가 넓고 품이 풍성하며 옷자락이 긴 한족들의 심의도 물론 확인되는데, 이는 한족과의 문화적 교류와 연관된다. 출처: 최덕경, 「거연한간에 나타난 한대 의복과 의생활」, 『역사와경계』, vol.35, 1998.
  3. 1901년~1916년까지 영국 스타인(Mark A. Stein)에 의해서 중국 서북지역의 간독들이 일부 발굴되긴 했으나, 모두 중국 외부로 반출되며 당시 제대로 된 학술 연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출처: 하기태, 정한솔, 신상우, 「居延漢簡과 傷寒論의 病症 비교 연구」, 『한의병리학회』, vol,25, 2011, p.19.
  4. 위키백과에 내력 기재
  5. 아츠지데츠지, 『한자의 역사』, 학민사, 1994. pp.139-140.
  6. www2.ihp.sinica.edu.tw/
  7. 감숙성 난주시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1939년에 설립된 과학교육관에서 1943년 서북인민과학관으로, 다시 1956년 오늘날의 감숙성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다. 거연에서 발견된 한간 외에도 돈황, 무위 등에서 출토된 한간 수만 매를 소장하고 있다.출처: 돈황학대사전편집위원회 편, 『돈황학대사전』, 서울:소명출판, 2016, p.1502.
  8. 이미진, 장기원, 최준용, 박성하, 김기봉, 정한솔, 하기태, 「居延漢簡과 傷寒雜病論의 치료법 비교 연구」, 『동의생리병리학회지』, vol.27, 2013. pp.19-20.
  9. 안성현, 「居延지역 戍卒의 생활상과 傭作활동 = 居延地域戍卒的生活和傭作」, 『경북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5. pp.4-5.
  10. 河西四郡의 행정범위는 대체로 오늘날 감숙성(甘肅省) 서부의 주천시酒泉市‧가욕관시嘉峪關市‧장액시張掖市‧금창시金昌市‧무위시武威市와 내몽고 서부의 아랍선맹(阿拉善盟) 일대를 포함한다. 이는 한 번에 설치된 것이 아닌, 한의 흉노 정벌, 둔전병의 진출, 동서 교역의 성행 등에 따라 오랜 세월(기원 전 115~67)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것이다.
  11. 나가사와 카즈토시, 『돈황의 역사와 문화』, 경기: 사계절출판사, 2010.
  12. 더불어 교과서의 어구를 담은 목간이나 종이 등도 행정문서 사이에서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는 한자교육을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 홍영희, 「〈居延漢簡〉의 書寫적 特徵- 隷書와 草書를 中心으로」, 『中國學硏究』, vol.35, 2006. pp.159-160, p.172.
  14. 본 자료는 한국서학연구소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 게재된 일부 한간들을 분석한 것을 발췌, 소략한 것이다. 태산각석, 석고문 등의 서체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으니 참고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blog.daum.net/callikorea/7548041>
  15. 잠두연미蠶頭燕尾. 처음은 누에머리처럼 뭉툭 하고 끝 부분은 제비 꼬리처럼 날렵하다는 의미
  16. 김경호, 「한대(漢代) 서북변경(西北邊境) 리졸(吏卒)의 일상(日常)」, 『중국사연구』, vol.74, 2011.pp.73-75.
  17. 공문서 『居延漢簡』 기록에 따르면 타인의 수역(戍役)을 대신하여 거연지역에서 대리 수역하는 수졸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관부(官府)서는 명적(名籍)을 작성하여 이를 관리했다. 그 밖에도 농업이나 운수 노역에 고용된 수졸을 관리하는 명적들이 관부에서 보관된 것으로 미루어 한나라 변경까지 고용노동이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 안성현, 「居延지역 戍卒의 생활상과 傭作활동」,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9.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인 끝에 靳龜가 검으로 函何陽의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상해하고 函何陽 역시 검으로 靳龜의 오른쪽 옆구리를 찔러 각각 기원 전 67년 8월 2일과 6일에 관에 붙잡힌 사건이 거연한간에 기록되어 있다. 출처: 김경호, 앞의 책, pp.73-74.
  20. 거연한간의 기사 중에는 사망한 수졸이나 전졸(田卒)의 소지품을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그들의 소지품은 관에서 몰수한다. 회수한 의복 내용을 명기하는 부분에서, 官에서 회수하기도 하지만, 망자의 옷을 관에 함께 넣어주는 사례도 소개되고 있다. 출처: 위의 책, pp.71-73.

  21. 진한대 행정문서의 전달을 담당한 우전(郵傳)기구의 설치 상황과 이를 이용한 문서전달 체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본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오준석, 「秦漢代 문서행정체계 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22. 그렇지만 한 문제 시점에서도 장성 이북의 흉노지역에 대해서는 ‘내지보다 한랭하고 계절풍의 영향도 받지 않으며 비도 적어 예로부터 비농업생산지역으로 분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3. 이 중에서도 건초(茭)는 부의 후장(候長)과 후관(候官)이 선금을 받고 판매하였다는 묘사로 보아 그 수요가 많았으며, 보리麥과 더불어 주요 수입원이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24. 최덕경, 「거연한간(居延漢簡)을 통해본 서북지역의 생태환경」, 『中國史硏究』, vol.45, 2006, pp.67-70.
  25. 전 3권으로 되어 있다. 傷寒論(상한론)의 저술자이기도 한 張仲景(장중경)이 지었다. 대략 3세기 초에 책이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26. 보드랍게 가루 낸 한약 또는 전탕농축액에 결합제나 부형제들을 섞어 둥근 모양으로 만든 알약
  27. 약물을 여러 번 달여서 걸러 낸 후 설탕이나 꿀 따위를 섞어 걸쭉하게 조려 만든 약
  28. 일부 문장 직접인용, 이미진, 장기원, 최준용, 박성하, 김기봉, 정한솔, 하기태, 위의 책, vol.27, 2013. p.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