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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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리야진간(里耶秦簡)은 2002년 호남성 용산현 리야(里耶)에서 발견된 (秦)대의 죽간이다. 예서로 작성된 지방 관청의 공문서로 진의 정치 사회 문화 방면의 다양한 모습이 기록되어있다.
리야진간은 21세기의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 중의 하나로 중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파손된 죽간이 섞여있지만 출토 당시 그 수량이 38,000매나 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재질과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간독(簡牘)의 양이 상당하였다. 또한 먹으로 쓴 흔적이 뚜렷하여 가독성이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로 진대의 행정문서이고 다른 진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을 많이 담고 있어 진대의 역사⋅사회⋅문화⋅언어⋅문자 연구에 훌륭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형태

2002년 호남성 용산현 리야고성유지의 1호정 안에는 진흙과 당시의 폐기물이 뒤엉켜 쌓여있었는데, 총 17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 1층부터 4층까지는 전한(前漢)시대, 5층에서 16층까지는 진말(秦末), 17층은 전국(戰國)시대부터 진대(秦代)까지의 것으로, 리야진간은 5층(지면으로부터 3.8m 깊이)부터 시작해 우물 바닥까지 분포해있었다.
리야진간은 대부분 죽간이 아닌 목간으로 구하기 쉽고 서사에 용이한 삼나무와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는데, 간혹 다른 나무를 사용한 것도 보인다.
형식과 규격은 다양한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길이가 23cm, 너비가 1.4~5cm이고, 너비가 10cm 혹은 46cm이상인 것도 있어, 기록할 내용의 많고 적음에 따라 너비가 다른 목재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리야진간의 모든 간독은 붓에 먹물을 묻혀 목재에 쓴 형태이며 일반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간독은 줄로 엮은 흔적도 보이는데 일단 서사 작업을 마친 후 줄로 엮었으며 그 반대의 경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내용

리야진간의 주요 내용은 진시황(秦始皇) 25년(B.C. 222년)에서 진이세(秦二世) 2년(B.C. 208년)까지 20여년의 기간 동안 동정군(洞庭郡) 천릉현(遷陵縣)에서 쓰여진 행정문서이다.
이를 통해 정치체제⋅중앙정부 정책 강령의 전달과 집행⋅관직과 국가 기구의 설치, 행정 단위, 인구와 민족구성, 노예제도, 토지제도, 조세제도 등 지역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과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알 수 있다.
이는 후대의 수정을 거치지 않은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리야진간에서는 기록된 내용을 書傳類⋅律令類⋅錄課類⋅簿籍類⋅符券類⋅檢楬類⋅曆譜⋅九九術⋅藥方⋅里程書⋅習字簡과 같이 11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리야진간의 행정문서는 고정된 형식이 있고 간결한 언어로 쓰여졌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에 대해서 李學勤(2003)은 두가지를 언급하였다.
첫째, 리야진간 행정문서에는 타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고쳐지는 것을 막기 위한 어구를 첨가했고, 상관에게 보고하는 문서의 경우‘敢言之’를, 동급의 관리에게 문서를 보내는 경우‘敢告’를 썼다.
둘째,‘인명 + 手’라는 어구가 자주 등장하는데,‘手’는 '친히'라는 의미이므로 작성자의 서명이다. 즉, 서명한 사람이 이 문서의 기록⋅필사를 책임지고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가치

한자학적 가치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진 문자는 서주(西周)후기부터 통일제국 진까지의 약 600여년 동안 여러 서사 재료에 쓰여진 것이다. 약 600여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진 문자는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그 중 간독에 쓰여진 한자의 변화 과정인 예변(隸變)[1]과 초화(草化)가 잘 관찰된다.
리야진간의 행정문서는 주로 고예(古隸)[2]라는 서체로 쓰여졌다. 그러나 리야진간에는 고예(古隸)뿐만 아니라 예변(隸變) 이전 단계인 진전(秦篆)의 형체와 초서(草書)의 초기 형태도 나타난다.
리야진간에서 어떤 글자는 전서와 고예 두 가지 경우가 모두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예변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리야진간에서는 진한(秦漢)시기에 비교적 널리 사용되었던 글자임에도 불구하고《설문해자(說文解字)》에 보이지 않는 글자가 무려 99자가 된다. 이를 통해 《설문해자》에 수록되지 않은 글자를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리야진간의 자형과 《설문해자》의 소전체가 일치하지 않는 자형을 통해 오류를 수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호적간독(戶籍簡牘)을 통한 사회상의 파악

「호적간독」으로 분류된 28점에는 진인(秦人)이 아닌 사람들의 가족을 기술하고 있어 전국시대 진의 지배하에 들어간 (楚)지역의 양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호적간독」은 28점이 있고, 안쪽의 글자가 확인되어 판독된 것은 22점이고 다른 간독과 비교할 때 매우 긴 형태를 띄고 있다.
이것을 통해 당시의 성씨, 작위(爵位) 등을 알 수 있고 민중을 어떻게 조직하였고 범죄자는 어떻게 관리하였는지 등을 알 수 있다. 秦 獻公 시기에 호적을 만들고 진의 민중의 집집을 다섯 가족을 한 묶음으로 하여 그 長을 「伍長」이라고 불렀다.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시기에는, 민중에게 什伍의 조직을 편성시켜 서로 감시시키고, 그 중에서 범죄자가 나오면 연좌시킨다고 하는 연좌제와도 관련되어 있었던 조직이었다. 「호적간독」에 「伍長」이 보이는 것은, 이 제도가 호적의 작성과 함께 민중지배에 있어 각 가족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민지배의 최말단에 위치하는 지역사회의 가족에 대해 「伍長」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 즉 진에 의한 민중지배의 원칙이 이민족 지역의 가족에게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伍長」은 가족에 관한 상앙의 변법정책이 「호적간독」이라고 하는 문서에 문언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진의 문서행정이 里耶의 지역사회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족의 인수에 대해서는 전국에서 진한에 걸쳐, 五口之家라고 불리는 것 처럼 5인 가족이 표준적인 농민의 가족이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호적간독」에 보이는 동거가족의 인수는 당시의 평균적이었던 5인보다 그 이상인 경우가 많은 편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南陽里에 거주하는 가족을 대상으로, 호주를 중심으로 일가족 내의 성인남자, 성인여자, 미성년 남자, 미성년 여자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기재했는데 이는 국가의 부담을 부과시킬 수 있는 사람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사실은 里耶지역에 대해 진이 문서를 통해 민중을 파악,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호적간독」을 통해 다양한 가족형태를 파악해볼 수 있다. 또한 진의 문서행정이 지역사회의 관리, 명령의 전달 등이 里耶라고 하는 산 깊은 곳에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을 알려준다 .

참고문헌

이소화 외1, 「이야진간(里耶秦簡)의 발굴(發掘)과 그 한자학적(漢字學的) 가치(價値)에 관한 소고(小考)」,중국문학연구 65권0호,2016.

나카무라타케야, 김령아 역, 「이야진간(里耶秦簡)으로 본 민족(民族)과 지배(支配)」,역사교육논집 43권0호, 2009.

  1. 예변은 전국시대 중후반기에 진나라에서 쓰였던 전서체가 속체의 영향을 받아 고예(古隸)와 팔분(八分)으로 변천하는 것을 일컫는다. 즉 전서(篆書)에서 예서(隸書)로, 고문자(古文字)에서 금문자(今文字)로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2. 고예는 진부터 전한시기 동안 팔분(八分)이 형성되기 전까지의 예서를 일컫고, 팔분은 구조가 반듯하고 필획에 있어서 파책이 명확한 한대의 예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