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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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만일 진실로 장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후한 예물을 하사한다면 , (중략) 선우는 비록 오랑케이나 공주를 흠모하여 [[연지]]로 삼고, 만일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대를 계승할 것입니다. (중략) 묵돌이 살아서는 폐하의 사위가 되고, 죽으면 폐하의 외손이 선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하지 않고도 그들을 서서히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장공주를 보낼 수 없어 종실이나 후궁의 딸을 선발하여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그도 눈치를 채고, 그녀를 귀하게 여겨 가까이 하지 않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사기]]> | ''''‘’폐하께서 만일 진실로 장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후한 예물을 하사한다면 , (중략) 선우는 비록 오랑케이나 공주를 흠모하여 [[연지]]로 삼고, 만일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대를 계승할 것입니다. (중략) 묵돌이 살아서는 폐하의 사위가 되고, 죽으면 폐하의 외손이 선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하지 않고도 그들을 서서히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장공주를 보낼 수 없어 종실이나 후궁의 딸을 선발하여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그도 눈치를 채고, 그녀를 귀하게 여겨 가까이 하지 않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사기]]> | ||
2016년 5월 13일 (금) 23:44 판
백등지위 사건 이후,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하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 흉노의 침입이 잦아지자 유방은 책사 류경을 불러 해결책을 요구한다. 류경은 유방의 딸인 장공주를 출가시킬 것을 건의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폐하께서 만일 진실로 장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후한 예물을 하사한다면 , (중략) 선우는 비록 오랑케이나 공주를 흠모하여 연지로 삼고, 만일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대를 계승할 것입니다. (중략) 묵돌이 살아서는 폐하의 사위가 되고, 죽으면 폐하의 외손이 선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하지 않고도 그들을 서서히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장공주를 보낼 수 없어 종실이나 후궁의 딸을 선발하여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그도 눈치를 채고, 그녀를 귀하게 여겨 가까이 하지 않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사기>
결국 류경의 의도를 알게 된 여태후가 주야로 울며 '“소첩의 소생은 태자와 딸 하나뿐인데, 어찌 그 아이를 흉노에 내던지려 하십니까!”'하면서 결사반대하여 장공주의 흉노 출가 계획은 무산되었다. 결국 유방은 장공주 대신 가인(家人)을 간택하여 묵돌선우에게 시집보내고, 상당량의 혼수품을 전달한 뒤, 류경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화친을 체결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한과 흉노 간에 처음 맺어진 화친 정책의 시작이 되었다.<사기>
이러한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은 한·흉노 모두 도움이 되는 정책으로 보인다. 우선 한나라는 흉노와 더 이상 전쟁을 할 필요가 없어 국력 강화에 힘쓸 수 있었다. 그리고 흉노는 화친정책을 통해 막대한 양의 재물을 얻고 한의 궁녀를 통해 들어오는 한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따라서 이 정책은 무제 때까지 한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무제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완비하자, 그는 이러한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에 불만을 갖는다. 따라서 그는 흉노와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을 벌여 흉노를 막북(漠北)지역까지 몰아냈다. 이후 약 20년 간 한나라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유목 민족의 특성상 흉노는 다시 결집하여 다시 한나라를 괴롭혔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한 경제(景帝) 시대에 흉노 안에 내란이 발생하여 5개의 선우가 병립하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흉노 간의 전쟁이 지속되었다. BC.54년, 흉노의 평한야선우는 그의 형 질지선우(郅支單于) 에게 대패한 뒤, 친히 경제를 알연하였다. 이는 중원의 황제에게 선우가 처음으로 알현을 청한 것으로, 경제는 친히 나가 그를 영접하고 성대한 연회를 제공하였다. 성대한 환대에 고무된 평한야선우는 서한 정부와 우호적인 일가(一家)의 관계를 맺고 상호 공격을 중단할 것을 약조하였다. 또한 당시 흉노에 식량이 부족하여 원제가 삼만 사천석의 식량의 원조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경제 이후 즉위한 원제는 흉노와의 전쟁을 되도록 꺼렸다. 그리고 흉노의 호한야선우또한 부족 간의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원제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과 흉노는 맹약을 체결한다. 후에 흉노의 내전을 극복하고 호한야 선우는 흉노의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한나라에 황실의 사위가 되기를 청하는데 이것이 많이 알려진 왕소군 고사이다.
참고 문헌
유태규, 「西漢의 和親 역사와 王昭君 흉노 출가의 背景」, 『중국문화연구』, 중국문화연구학회, 20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