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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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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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칭 = 장성(만리장성, The Great Wall of China) | ||
+ | |한자 = 萬里長城 | ||
+ | |그림 = | ||
+ | [[파일:만리장성.png|섬네일]] | ||
+ | |그림설명 =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는 만리장성 | ||
+ | |분류 = 성벽, 문화재 | ||
+ | |소재지 = 하북성에 위치한 산해관(山海關)~자위관(嘉峪關), 간쑤성(甘肅省) 가욕관 | ||
+ | |길이 = 6,352km | ||
+ | |개방시간 = 성수기(4~10월) 09:00~17:00, 비수기(11~3월) 09:00~16:00 | ||
+ | |입장료 = 성수기 45 CNY, 비수기 40 CNY <ref> 출처 : 세계의 불가사의, 만리장성. : http://m.tourtips.com/dest/content/1006_beijing?contentID=1000045815101&type=theme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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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개요 == | == 개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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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지상에 존재하는 건축물 중 가장 거대한 건축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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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은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ref> 꼭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축조한 것은 아니다. 국가의 질서 및 왕권의 강화 목적으로도 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을 생각해보면 적당한 비유가 되는데, 고인돌은 무덤이지만 반드시 무덤의 기능만 수행하지는 않는다. 고인돌의 크기로 생전 무덤 주인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듯, 장성 역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한다.</ref> 축조한 방어성이다. 한국에서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며, 중국에서도 이 명칭이 간간히 쓰인다. 현재는 본래의 목적은 사실상 상실했으며 관광지로 <ref> 실제로 중국정부는 장성을 국가 문화재 및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고 관리를 하고 있다.</ref>더욱 유명하다.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 <ref> 다른 7대 불가사의로는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인도의 타지마할,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 멕시코의 치첸 이트사,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이 있다. </ref> 중 하나이며 성의 길이가 만 리(里)이기 때문에 만리장성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나, 실제 길이는 만 리(약 4000km)를 넘는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허베이성]](河北省)의 '산해관', 그리고 서쪽으로는 [[간쑤성]](甘肃省)의 '가욕관'까지 축조되었다. 약간의 돈을 내면 직접 위로 올라가 고대 중국인들의 기상을 느껴볼 수 있다. 계절에 따라 개방 시간이 다르고 구역마다 가격이 다르다.<ref>만리장성이 워낙 길다보니 관리하는 지역이 분화되어 가격도 다르다.</ref> | ||
== 왜 장성을 지었을까?== | == 왜 장성을 지었을까?== | ||
− | [[장성]]을 지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중국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근심거리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략이었다. 그들은 줄곧 침략해 | + | [[장성]]을 지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중국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근심거리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략이었다. 그들은 줄곧 침략해 사람들을 죽이고, 한 해 동안 정성껏 재배한 작물을 약탈해갔다.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모두 [[말]]을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ref>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북방의 유목민족은 어린 시절부터 말에 익숙하여 말을 타고 사냔을 배웠다고 서술했다. 따라서 유목민 기마병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우수한 전투력을 지녔고, 중국 농경민족의 농민병은 이들에게 대항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ref>말은 기동력이 좋다는 장점이 있으나 앞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 활용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착안해 중국인들이 축조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단순히 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기 때문에 초기 [[만리장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리장성과는 조금 다른데, [[진나라]] 당시 [[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을 보면 성벽이라기보다는 담에 가까운 형태이다. 높이는 고작 2~3M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마병의 접근을 막는데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만약 사람이 넘고자 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이다. |
+ | [[파일:돌궐기마병.jpg|섬네일|말을 타고있는 돌궐의 기마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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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장성을 축조하는 것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후술하겠지만 장성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건축사업이었다. 때문에 장성을 건립하는 것은 황제가 그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장성의 건립은 당시 축조하고 있는 지방이 각 국가의 영토에 속함을 표현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실제로 장성을 축조하는 시기와 장소는 각 국가가 안정화된 이후 국가의 최대영토에 해당하는 곳 혹은 주요한 지방<ref>무조건 이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반례로 [[명나라]]때는 강수량과 같은 기후조건으로 인해 장성의 축조위치가 변화하기도 하였다.</ref>인데, 이는 장성 외부의 적에게 장성 내부의 영토에 침입하지 말라는 공표의 의미이기도 했다. | ||
+ | 장성은 국가 내부의 정적을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서에 따르면,"정치적 죄를 지은 관리를 장성을 건립하는 곳에 보내 축조하도록 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즉, 장성을 건립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이 일종의 처벌행위<ref>장성을 건립하는 것이 처벌에 이용되기는 하였지만, 죄인만 장성의 축조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일반 백성들 또한 장성의 건립에 참여하였다.</ref>였으며, 견제의 용도로도 장성의 축조를 진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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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의 역사== | == 장성의 역사== | ||
=== 기원 === | === 기원 === | ||
+ | 장성의 축조는 서주(西周)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북방 유목 민족과 대치해야 했고, 때문에 돌을 일정하게 쌓아올린 '열성'을 쌓아 방어했다. 이것이 중국의 장성의 시작으로 이것이 [[춘추|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넘어가 각 패권국가들이 자신의 국방을 이해 방어용 성곽을 쌓는 것의 유래가 되었다. 북방을 막는 성벽도 있었던 반면 북쪽이 아닌 주변국가도 막기 위해 성벽을 축조했으나 이러한 성벽들 중 북방을 막는 성벽들이 합쳐져 장성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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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춘추|춘추시대]]와 [[전국시대]] === | ||
+ | [[춘추|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통틀어 판축 공법으로 이 성벽을 처음 만든 것은 기원전 7세기 무렵, 하남성 근처의 초(楚)나라이고, 장성 축조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던 나라는 연나라이다. 연나라는 소양왕이 즉위한 이후 국가의 발전을 거듭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국토를 넓혀간 연나라는 북쪽의 동호족과 마주하게 된다. 동호족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연나라는, 국토를 방어할 ‘연남장성’의 축조를 시작하게 된다. 연나라는 새로 정복한 [[네이멍구]](內蒙古) 동남부, [[랴오닝]](遼寧), 서북한(西北韓)의 일부에 상곡(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석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다. 또한 이 5부를 둘러싸고 장성을 축조하는 데 이것이 바로 '연남장성(燕南長城)’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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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남장성은 북방민족인 동호족을 막는 데에만 집중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장성이 동호족의 중심인 건평지방을 지나간다는 점과 동서로 길게 건립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장성이 매우 길게 분포한다는 점에서 장성의 목적이었던 동호족이 세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장성을 긴 기간 동안 건축하는 과정에서 동호족의 세력이 약해지자 장성의 건립과 땅의 개간을 같이 했다는 것이다. 이는 연남장성의 유적이 많지 않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도 사용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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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서북한(西北韓)과 요동(遼東)의 일부의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 이를 통해서 일부 학자들은 다른 장성처럼 축조하지 않은 채로 자연환경을 장성으로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
+ | 장성유적을 통해 연나라의 국토범위와 생활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연나라의 유적은 장성의 건립지역이었던 建平에 약 50%이상이 분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장성의 주변에서 수비하고 있는 군사의 군락과 장성을 건립하기 위해 모집된 일반인과 징집된 죄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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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진]] === | ||
+ | [[시황제]] 26년(221년), 6개 국가를 병합하고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만들었다. 이후 시황제는 국방을 공고히 하고 국가체계와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만리장성축조를 지시한다. 당시 북쪽의 변방에 접하는 연, 조, 진의 삼국은 각각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을 쌓아두었는데, 최초의 만리장성은 이 성벽을 잇고 수리하여 완성한 것이다. 한편 시황제는 만리장성에 포함된 북쪽 성벽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성벽들을 그 땅의 백성을 동원하여 파괴했다. 북방의 침입을 제외한 장성 밑의 지역은 이미 통일되었기에, 성벽의 잔존은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 ||
+ | [[파일:진시황.PNG|200픽셀|섬네일|오른쪽]] | ||
+ | 장성의 축조는 대외적으로는 [[흉노]]의 침입에 방어하려는 것이었지만, [[아방궁]]과 [[병마용]]도 시황제 시기에 축조된 것을 근거로 하여 학자들은 왕권의 강화의 목적도 있었다고 주장한다.<ref> 이는 이후 조선의 유학자들이 진시황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ref> 사기에 따르면, 진의 장성의 축조 범위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동쪽으로는 조선이 있는 [[요동]]까지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랴오허 강]]까지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장성이 조선과 매우 인접하자. 조선은 진이 습격해 올 것을 두려워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를 통해서, 진나라와 조선의 영토가 기존의 [[연나라]]와 조선의 영토와 차이가 있었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시황제가 만든 장성은 지금의 감숙성 임조(臨兆)에서 요녕성(遼寧省) 요동(遼東)까지 약 1만리에 달했다.<ref>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에 따르면 이다. </ref> | ||
+ | 그러나 진나라는 장성 때문에 국가의 멸망이 초래되기도 하였는데 후술한 바와 같이 장성을 건립하는 과정속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인적 손실이 있었다. 또한 진시황은 아방궁과 병마용의 축조도 진행을 하였는데, 이러한 무리한 노동력의 착취와 인명피해, 그리고 강력한 법치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낮은 민심은 [[진승 오광의 난]]으로 대표되는 백성들의 난과 함께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하는 이유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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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秦)대의 장성은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보통 높이는 2~3m정도이다. 또한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 오늘날의 장성과는 달리 흙으로 쌓은 담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이 시기 장성을 만든 이유는 유목민의 기마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는데, 장성 앞에 도랑을 파 해자(垓子)를 만들었고 또 이 앞에 성벽같은 흙담을 설치했다. <ref> 이를 통해 생각해보면, 장성의 목적은 단순히 이민족의 기마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싸우기 위한 무기의 개념으로도 장성을 고려한 것 같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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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 === | ||
+ | 한나라 초기 전쟁을 틈타 세력을 성장시킨 흉노는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을 경계로 한나라와 대치하기 시작한다. 장성을 경계로 흉노를 방어해야 하는 한나라 입장에서 장성은 매우 중요한 방어요새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의 시간동안 정비를 하지 못했던 장성을 상대로 흉노는 자주 약탈을 했다. 이러한 흉노의 계속된 침범은 만리장성의 증강을 야기했다. 당초의 장성은 내몽골자치구에 남아 있는 조(趙)나라 시기의 장성 외판에 판축으로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역에 따라 재료나 만드는 방법이 각양각색이었다. 장성은 실제로 방어요새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제로 [[청불식]]과 같은 한나라의 장군이 장성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흉노가 장성을 범하지 못하였고 [[공손하]], [[공손선]], [[호거병]]은 흉노를 공격한 후 장성으로 퇴각하여 장성을 이용해 방어하였다. | ||
+ | [[파일:한대의 장성(돈황지역).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한대의 장성(돈황 지역)]] | ||
+ | 그러나 장성도 흉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은 기원전 200년, 전차 중심의 32만 대군을 이끌고 장성을 넘어 침입했던 흉노족의 기마군단과 맞서 싸웠다. 전차 중심의 한군과 기마 흉노군 중 어느 쪽이 강한가를 판가름하는 전쟁이기도 했는데, 결과는 흉노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한편 이 패배 이후, 중국의 왕조와 정착민족은 북방민족의 무(武)에 대해 콤플렉스를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은 '무'를 업신여기고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잠재된 열등감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콤플렉스가 역으로 작용한 중화사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 ||
+ | |||
+ | 이러한 패배를 뒤로 하고, [[한 무제]]는 [[곽거병]]과 [[위청]]를 보내 흉노를 북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장성을 서쪽으로 증축한다. 이는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한 이후 발견한 [[실크로드]]를 방어하기 위한 용도이다. 이후 한 무제는 장성을 증축, 정비하였다. 이 이후로 전국시대부터 국방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이 국방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기 시작하였다. 한나라 시대 증축된 장성은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와 무역을 안정화시키고, 북방의 위협으로부터 [[한족국가]]를 방어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 ||
+ | 재밌는 점은, 한나라 시기 장성을 쌓는 방법이다. 한나라 시기 지방에서 성벽을 완성한 후 완성 검사를 받을 때는 장성의 흙벽에 송곳이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지는지를 검사했다. 만약 송곳이 들어가면 현장 책임자가 처벌을 받았으며 심한 경우 사형을 당하는 자도 있었다. 그 밖에 영하의 중위에 남아있는 승금관장성과 같이 돌로 쌓은 장성은 내몽골에서 동북쪽에 걸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고양에 있는 진나라 때 장성이나 요령의 아골관 근처에 남아 있는 장성은 돌을 쌓은 후에 그 틈새를 진흙으로 메우는 방법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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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당]] === | ||
+ | 중국을 통일했던 [[수 문제]]는 북방의 [[돌궐]]에 대응하기 위해 장성을 축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과업으로 삼았다. 이는 [[수 양제]]또한 다르지 않아, 장성의 건립에 큰 공을 들였다. 수나라 시기 장성은 빠르게 축조되었다. 수나라의 38년 중 28년 동안 장성은 무려 7차례나 증축이 되었다. 수 황제들은 약 200만명의 노동력을 이용해 북부와 서북부에 장성을 증축해 나갔다. 때문에 장성과 관련된 수나라의 유물은 기간에 비해 매우 많은 편이다. 2007년 [[산서성]]에서 수 왕조 시기의 시공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내에서 최초의 발견으로, 수 왕조가 장성의 건립에 매우 많은 정성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 ||
+ | 수장성 역시 돌로 쌓여졌으며, 높이는 지표면에서 약 1.5m를 유지하고 있다. 이 당시 증축된 장성까지를 포함하였을 때 1700km에 다다른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또한 장성이 국방의 용도로 매우 공들여 세워졌기 때문에, 약간의 보수와 증축 이후 바로 [[명나라]]에서 사용하였다.<ref>「长城-百度百科」</ref> 명 시기가 장성이 가장 많이 증축되는 시기인 것을 감안하였을 때, 수 장성이 매우 잘 건립되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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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당 장성.jpg|섬네일|당나라 시기 축조된 만리장성|오른쪽]] | ||
− | + | [[당나라]] 또한 돌궐의 침입에 방어를 해야만 했다. 때문에 당시기에도 장성의 증축이 주도되었는데, 때문에 한 무제 시절부터의 장성의 역할인 실크로드의 안정성이 강화되었다. 이는 당나라의 포용적인 이민정책과 어우러져 중국 문화가 매우 많이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이 당시 장성은 [[헤이룽장 성]], [[타이 구]], [[위서 현]]에서 주로 증축되었는데, 이는 돌궐의 주요 구역과 매우 밀접하다. 즉 당나라의 장성건립은 돌궐에 대응하여 국가를 방어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하던 당나라가 몇 안되는 강경정책을 펼친 민족이 돌궐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장성의 증축이 뒷받침해준다. 실제로 돌궐 세력을 뒤에 업고 자신을 왕이라 칭했던 [[유무주]]를 상대로 [[당 태종]] [[이세민]]을 대응시키는 동시에 그 근방의 장성을 증축하였다.<ref>「长城-百度百科」</ref> | |
− | === | + | === [[송]] === |
+ | [[송나라]]시기 장성은 서쪽으로는 [[커란 현]]까지 증축되었고, 동쪽으로는 [[연잎평산]]까지 증축되었다. 이를 송장성이라고 하는데, 길이 약 38km, 높이 약 4.2km의 돌성벽으로 되어있다. 송장성의 주변에는 송시기의 도자기 파편이 있고, 일부 지방에는 송 시기에 사용되었던 포댓자루가 보이기도 한다. 중국의 장성 전문가인 [[성대림]]은 [[커란 현]]의 장성은 [[북제]], [[수나라]], [[송나라]]시기에 모두 축조되었다고 한다.<ref> 「长城-百度百科」</ref> 송나라시기 장성 축조의 역사가 비교적 도드라지지 않았는 점에서 이 발견은 매우 유의미하다. 한편 송 시인 [[문천상]]은 망강녀의 비를 보며 진시황을 비판하고 망강녀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는데, 무(武)를 천시하고 문(文)과 백성을 중시하는 송시기의 특징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 ||
+ | === [[명]]·[[청]] === | ||
+ | [[명나라]]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바로 흔히 [[북로남왜]]라고 부르는 북로, 즉, 북방민족들이었다. 때문에 명나라에게 장성은 매우 중요한 방어선이었고, 장성을 증축하고 보수하는데에 많은 공을 들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이 바로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16세기 명나라 시기에 기존에 있던 만리장성을 보수, 신축하였다. 장성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명대 이전에 자주 일어났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공격하는 쪽도, 수비하는 쪽도 기술이 과거보다 진보한 상태이기에, 축조된 장성의 높이도 7~8M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장성은 말이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훌륭한 것인데 기존의 장성보다 평균 100KM나 남하한 위치에 형성되었다.<ref> 기존의 만리장성이 형성된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200ml 인 지역이었는데, 남하한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500ml인 지역이었다.</ref> 이 시기 장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곳이 많다. 이는 적이 침입했을때 접근이 쉽지 않은 험준한 곳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한편 이 시기 강수량이 많은 지역으로 장성이 남하한 이유는 둔전(屯田) 경작의 용이함을 위해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둔전이란 주둔군이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밭을 경작하는 등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ref>명나라는 평지에서 '둔팔수이(屯八守二)를 주둔군의 방침으로 삼았다.</ref> 만약 전체 군사를 열 명으로 본다면 이 중 여덟명은 둔전을 경작하고, 나머지 둘이 근무를 서는 것이 당시 명나라 군사 체제였다. 한편 1년동안 농사를 지으려면 연 평균 강수량이 200ml로는 힘들다. 따라서 이들은 둔전을 유지할 수 있는, 연 평균 강수량이 500ml인 지역으로 내려온 것이다.<ref> 또한 연 평균 강수량이 200ml인 지역의 경우 해발이 너무 높고 연 평균 기온도 낮을 뿐더러 토질에 암반이나 돌멩이가 많아 둔전을 유지하기에 힘들었다.</ref> | ||
− | + | 명대 말에 접어들면 현재의 장성과 유사하게 구운 벽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벽돌은 오르도스 내의 장성 중간 부분에서 동쪽으로 한정된 지역에 나타나는데, 이런 벽돌을 '전(磚)'이라 부른다. 당시 장성의 평균 높이는 7~8m 정도였고, 폭은 기저부가 8m정도, 상부는 4~6m 정도였다. 절벽이나 능선에도 장성을 쌓았는데, 이는 몽골 말이 장성을 뛰어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중국 왕조 역사 중 한나라와 함께 몇 안 되는 한족 중심의 왕조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가 명대에 쌓은 장성의 은혜를 입었다. 청나라는 몇 번이나 북방 이민족을 쫓아버린 일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봤을 때 북방의 이민족이 강성해진 것은 항상 습격과 약탈에 의해 식량과 자원을 공급받은 시기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전 왕조들이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막으려고 했던 장성인데, 청나라가 들어서고 나서는 청나라 정착민족이 또 다시 이민족을 막기 위한 '방어'의 개념으로 장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유목민들과 한족이 뒤섞이는 중국 역사를 참고해본다면 장성은 장성 안쪽과 밖을 나누는 기준으로서 작용하지만, 그 경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불분명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 | + | 1792년 9월 26일,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대영제국 최초로 통상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당시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심각한 적자를 내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중국산 차(茶)에 열광했지만, 중국인들은 영국의 은 이외에는 어떠한 물건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들은, 문화적 차이로 결국 외교 협상에 실패한다.<ref> 이들이 가져온 서양의 문물은 황제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차마 하지 못했다. </ref> 거창한 외교적 실패를 겪은 뒤, 영국 사절단원들은 그들의 여행기에서 중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중국의 연극은 투박하고 조야하다', '중국의 음악은 째질듯한 음향의 집합체이다', '중국의 묘기는 실망스럽다', '중국에는 수세식 변기나 용변을 제대로 볼 만한 장소가 하나도 없다'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국 외교단도 인정하고 간 것이 바로 장성이었고, 이 당시 작성한 장성에 대한 기록은 서양 세계에 중국의 만리장성이 전파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북경 동북부를 지나는 고북구(古北口) 관문에서 멈추었는데, 이 곳은 만리장성을 과시하는 장소였다. 이들은 장성을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
− | + | ::푸르스름한 색깔의 벽돌로 구성된 장성은, 높이는 약 9m, 너비 약 2m 인 사각형 망루가 45~60m 간격으로 세워져 성벽을 보강한다. 내가 여러 군데에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 성벽은 아주 가파르고 높으며 바위투성이인 산등성을 넘어 구불구불하게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길이는 2400km에 이른다. 이 모든것은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것 중 가장 거대한 업적이며,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주택 전체에 쓰인 석재의 총량이 이 장성을 짓는데 사용된 석재의 총량과 맞먹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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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건축 방법== | == 건축 방법== | ||
+ | [[사기]]에 장성의 축조와 관련해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대체로 ‘[[築]]’과 ‘[[立]]’이 ‘쌓다’라는 의미로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장성이 인공적인 힘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내포하는데, ‘築’이 ‘나무와 삽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성은 사람이 힘을 가하여 쌓은 것이라고 해석된다. | ||
+ | 그러나 장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험한 자연물을 이용하여 축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내려온 전통 중 하나인데, 사기에 따르면 ‘[[趙]]' 장성은 장수(漳水)와 부수(涪水)를 이용하여 지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는 장성을 두 강의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는 의견과, 두 강의 제방을 증축하였다, 즉 제방이 곧 장성이 되었다는 의견이다. 대다수의 학자는 [[秦]]의 서장성이 비슷한 방법으로 축조되었다고 서술하였으나 실제로는 빈락(濱洛)과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자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다고 해석한다.<ref> 홍승현, 「중국 고대 長城 개념과 역할* — 秦漢時期 장성을 중심으로」,『사림』, No. 62, 수선사학회, 2017.10.</ref> 즉,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장수와 부수가 1차 방어선이고 장성이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
+ | 또한 높은 산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축조한 것도 장성의 축조법 중 하나였는데, 사기에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장성을 축조하였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팔달령 장성’또한 높은 산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또한 ‘랴오둥 장성’은 축조할 당시 절벽을 깎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렇게 험한 자연물은 적으로 하여금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성을 축조할 때 최대한 이용하였다. | ||
+ | [[파일:축조방식.png|섬네일|만리장성의 단면|오른쪽]] | ||
+ | [[명나라]] 이전의 장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소재가 사용되었다. 중국 쪽에서 볼 때 동쪽이나 산간 지역에서는 주변에서 조달하기 쉬운 돌을 쌓아 만든 곳도 있고, 돌과 흙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한 곳도 있다. 흙은 주로 황토를 사용했다. 황토는 물과 함께 절구에 빻아 건조시키면 아주 단단해지는 성격이 있기에 성벽을 쌓는데 유리했다. 그래서 치수를 재어 나무 판으로 만든 틀 안에 황토와 물을 넣고 반죽하여 건조시킨 후 시간이 지나 틀을 빼면 제방과 같은 장성이 생긴다. 이러한 건축 기법을 '판축(板築)이라고 한다. 서쪽의 [[실크로드]]가 있는 곳으로 가면 황토 점토 안에 억새나 타마리스크 가지 등의 보강재를 섞은 곳도 존재한다. 또한 표면에 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곳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벽돌은 판축 장성과 같은 방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황토와 물을 반죽해 넣어 햇볕에 건조시킨 벽돌이다. | ||
+ | 한편, 만리장성의 벽돌이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최근에 색다른 견해가 등장했다. 중국 문화 유적보존 및 복원 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보수공사 중에 벽돌과 벽돌 사이에서 의미불명의 접착 물질이 나왔고, 이를 분석해본 결과 성분이 찹쌀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과거 만리장성의 벽돌과 벽돌을 붙일 때, 찹쌀 죽을 쒀서 돌 사이에 발랐고, 이 찹쌀의 끈기가 성벽을 지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 ||
== 현황 == | == 현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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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진나라]]이전부터 [[청나라]]까지 장성의 주 목적은 북방민족의 침략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방민족의 위협이 사라지고 국가의 존속이 크게 변화할 일이 없는 현대에는 본래의 목적을 잃고 관광의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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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만리장성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2007년에는 신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2005년 발표된 장성보호공정의 일환으로 국가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동시에 관광상품으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인터넷상에 중국 여행이라 검색하면 만리장성이 코스로 들어가 있는 상품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로 수많은 언론에서 보다한다. 이는 만리장성이 가지고 있는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는 지위와 만리장성이 축조된 지방의 자연환경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기 때문이다. 빼어난 주변 자연 경관역시 이유 중 하나이다. 인간이 쌓은 위대한 업적과 숲, 산, 강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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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만리장성 역시 파괴와 복원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이다. 현재 만리장성의 파괴는 심각한 수준으로, 전체의 약 50%가 댐으로 인한 수몰, 거주지 조성을 위한 파괴, 그리고 관광객의 낙서 및 훼손 등등의 이유로 훼손되었다. 또한 현지 주민들이 관광 상품으로 팔기 위해 만리장성의 벽돌을 빼내는 등의 훼손역시 잦았다.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며, 때문에 중국정부에서는 복원 및 법률 강화라는 대책을 내놓는 결과가 되었다 | ||
+ | 또한 중국정부가 시멘트로 대충 모양만 내는 듯이 복원을 하여 이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중국정부의 복원은 타 국가에서 시행하는 복원사업과 다르게 매우 비효과적이다. 또한 법률강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 ||
+ | |||
+ | 하지만 아직까지 장성은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마오쩌둥]]의 '장성에 올라보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는 말처럼 중국의 이념과 사상의 중심이 되는 건축물이다. 중국의 과거와 함께한 구조물이다 보니 만리장성을 따라가다 보면 중국의 모든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 ||
== 관련 논란 == | == 관련 논란 == | ||
− | === | + | === 장성의 위치와 북한 논란 === |
− | == | + | [[파일:만리장성 평양.jpg|섬네일]] |
+ | '사기진은', '진서'에서 진(秦)나라 때 축조된 장성이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했다. 이를 보고 다양한 학자들이 '낙랑군'의 위치와 진나라 장성의 시작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했다. 이중 낙랑군을 북한의 평양으로 봐야 하며, 진나라 장성이 평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의견이 등장했다. 북한에 존재하는 '대령강 장성'이 진나라 장성의 일부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사료의 해석차이로 나타난 오해이며, 장성이 시작하는 낙랑군은 북한의 평양이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
+ |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屬幽州>.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 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 有雲鄣. 縣二十五 朝鮮...(중략)...遂成(『漢書』 卷28 下, 地理志8 下, 樂浪郡). <ref> 공석구, 「秦 長城 東端인 樂浪郡 遂城縣의 위치문제」, 『한국 고대사 연구, 한국 고대사 학회, No. 81, 2016, 03.</ref> | ||
+ | 위의 사료는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한 이후 세운 한사군과 관련된 내용인 동시에,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에 관한 내용이다. | ||
+ | 秦已並天下 乃使蒙恬將三十萬 北逐戎狄 收河南. 築長城 因地形 用制 險塞 起臨洮至遼東 延袤萬餘里(『史記』 卷88, 列傳28, 蒙恬列傳). <ref> 공석구, 「秦 長城 東端인 樂浪郡 遂城縣의 위치문제」, 『한국 고대사 연구, 한국 고대사 학회, No. 81, 2016, 03.</ref> | ||
+ | 반면 위의 사료는 장성의 건축과 관련된 내용으로, 진의 국경과 조선의 국경문제에 대해서 서술이 되어있다. 즉 위의 사료와는 성격이 다른 내용이다. 그러나 점점 이 두 개의 사료를 교차해 서술한 글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한, 중, 일 세 국가의 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게 된다. | ||
+ | |||
+ | 세 국가의 학자들의 학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북한의 평양지역이라는 학설이다. 일부 사료에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으며, 심지어 '대령강 장성'이라는 천리장성과 다른 장성유적이 남아있다는 근거를 들어 북한의 평양지역이 낙랑군이며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다른 사료의 내용을 통해서 낙랑군이 현 [[요서]]지역이라는 주장이다. 이 또한 사료를 통해 주장한 것이므로 타당성이 존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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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그 이후, 북한의 학계에서 '대령강 장성'이 고구려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기와무늬 <ref> 대령강 장성 유적에서 고구려 계가의 '수막새기와'가 출토되었다 </ref>, 장성의 위치 <ref> 만약 중국의 장성이었다면 동쪽의 적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큰 강 서쪽에 지어져야 했지만, 대령강 장성은 큰 강 동쪽에 지어졌다. </ref>, 산성의 모양 <ref> 산성 중 고구려의 고로봉 산성 형식이 적지 않다. </ref>를 이유로 고구려의 장성임을 주장했다. 또한 근처에서 고려 유물도 매우 많이 나와 고려시대까지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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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오류가 등장하였다. 학자들이 사료적 기반으로 내세웠던 '태강지리지'와 '진서'에서 서술되었던 낙랑군은 서로 다른 낙랑군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비교적 늦게 기술되었던 '진서'에서 낙랑군을 요서지방으로 기술한 선례 <ref> 태강지리지 </ref>가 존재하자 낙랑군을 평양으로 써버린 것이었다. '태강지리지'에서는 낙랑군을 요서지방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두개의 사료를 잘못 해석한 학자들의 오류인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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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혹사논란과 맹강녀의 전설 === | ||
+ | [[만리장성]]은 지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큰 구조물이다. [[피라미드]]가 지어질 당시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듯, 만리장성 역시 대규모 노동력을 바탕으로 축조되었다. 장성 건설에도 어느 시대에나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는데, 그 원인은 주로 기아와 과로였다. 갈증 역시 주요 원인으로 꼽는데, 힘든 노동으로 땀을 흘려도 쉽게 물을 구할 수 없는 곳이 많고, 보급되는 물 역시 턱없이 부족해서 많은 수의 사람이 죽어갔다고 추정된다. 장성 건설에 따른 노동자의 피해는 심각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된 노동에 내몰린 사람들의 3분의 1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 인간은 몸 속 수분의 15~20%를 잃으면 사망에 이른다고 알려져있다.</ref> 황하강 유역의 공사 현장이라도 물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은 마찬가지로 추정되는데, 황하강은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ref> 황하 강 유역 지하수에는 불소 성분이 많아 음료수로로 적당하지 않다. </ref> 고된 노동과 생존을 보장하기 어려웠던 작업 환경 탓에, 만리장성과 관련된 민간의 이야기들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맹강녀(孟姜女)이야기이다. 맹강녀 이야기는 [[제(齊)나라]] 시기의 이야기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섬서성에 사는 젊은 부부인 범기량(范杞梁)과 [[맹강녀]]의 이야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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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둘이 신혼생활에 푹 빠져있을 때 남편 범기량이 장성 공사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다. 범기량이 끌려간 곳이 바로 산해관(山海關)이다.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가장 동쪽에 있는 관문이자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다. 일년이 지나도 노역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를 않자, 맹강녀는 남편을 위해 준비한 겨울옷을 가지고 공사 현장을 찾아갔다. 이 때 머슴과 몸종을 하나씩 데리고 갔는데, 머슴이 몸종을 죽이고 맹강녀를 겁탈하려 했다. 하지만 맹강녀는 정조를 지키겠다는 일념만으로 머슴을 죽이고 혼자 산해관을 향해 갔다.여러 고초를 겪고 도착한 산해관에서 맹강녀가 들은 소식은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시신은 자신이 짓고 있던 장성 안에 묻혀 있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맹강녀가 장성에 기대어 목이 터져라 울자 갑자기 장성의 일각이 무너지더니 그 안에서 남편의 시신이 나왔다. | ||
+ | 이러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중국 전역에서 유행하였다. 이는 당시 만리장성 축조에 대한 당시 백성들의 원망과 공포를 잘 나타낸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만리장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나라 속담 중 '하루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속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 | 한 남자가 만리장성을 쌓으러 갔는데, 부인이 글을 모르는 어떤 남자를 유혹하여 하룻밤을 동침하고는 그에게 남편에게 옷가지와 편지를 전해주고 오면 남편을 버리고 함께 살겠다고 했다. 남자가 이 말을 믿어 심부름을 했는데, 편지에는 남편 대신 성 쌓을 사람이 이 편지를 들고가는 사람이니, 그를 대신 붙잡아 성을 쌓게 하고 남편은 빨리 도망쳐 나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남편은 그 남자에게 옷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잠시 성을 쌓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대로 도망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내와 함께 살았다. | ||
+ | 이러한 설화 역시 당시 장성 축성과정이 얼마나 고댄 것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또 한편으로는 장성과 관련된 속담이 우리나라까지 들어와 사용되는 것을 보아 과거 한국 사회에도 장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
+ | [[파일:맹강녀.jpg|섬네일|산하이관성[山海关城] 동부 왕푸스촌[望夫石村] 북부에 자리한 봉황산(鳳凰山)의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맹강녀의 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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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 역시 이러한 혹사에 대해서 평한 바 있다. 사마천은 진나라 때 무리하게 쌓은 장성과 직도(直道)를 직접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 | 그야말로 백성의 괴로움을 무시한 공사로다. 진이 제후를 멸했을 때는 천하의 인심은 아직 불안했고, 다친 자들의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명장 몽염은 공사를 멈추게 하는데 몸을 바치지 않았다. 노역에 내몰린 백성을 구하지 않았고 늙은이와 고아를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백성의 화합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해 시황제에게 아첨하느라 오히려 공사를 권했던 것이다. | ||
+ | 이렇듯 장성은 시황제의 폭정의 상징으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이다.<ref> 사마천은 한 무제와 진시황을 어느정도 겹쳐서 보았는데, 동시대의 한 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글을 쓸 수 없었다. 사마천 본인이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에 처해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진시황과 만리장성을 축조한 몽염에 대한 비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f> 사마천 식의 해석으로만 장성 건설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또한 장성은 비록 단기적으로 봤을 때 심각한 노동력 착취로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왔다. 황하 강 아래에서 거주하는 중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실상 장성의 보호 아래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ref> 명나라 때의 순무왕예나 여자준이 오르도스 현지에서 장성의 수축을 통절히 상소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 진굉(秦紘)은 장성 건설이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일이라고 답한 바 있다.</ref>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때 장성을 억압의 상징으로만 보는것은 옳지 않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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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장성보호공정(長城保護工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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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개요 ==== | ||
+ | 2004년 장성이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라가면서 중국 정부가 비상에 걸렸다.<ref> 주된 이유는 훼손인데, 관광지로 수많은 인구가 오다보니 자연스럽게 훼손된 면도 있으나, 지역 주민들이 만리장성을 관광 상품으로 취급해, 돌을 빼 판매하는 등의 이유도 있다. </ref> 여기에 대한 조치로 시작된 것이 바로 장성보호공정(長城保護工程)이다. 2005년 말부터 이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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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호방안>의 주요 내용 <ref> 홍승현. 2014, 「중국의 장성보호공정과 장성 연구의 새로운 경향」, 동북아역사논총</ref> | ||
+ | ① 장 성 기반의 파악: 장성 자원 조사의 실시, 장성 문물 기록 보고서 의 작성 | ||
+ | ② 총 체적인 계획의 편성: <장성보호총체규획(長城保護總體規劃)>의 편성, 보호범위와 규제지구의 확정 | ||
+ | ③ 관 련 법규의 제정: <장성보호관리조례(長城保護管理條例)>의 제 정, 관련 법규의 완비 | ||
+ | ④ 장 성 보호 관리체제의 정돈: 장성 보호 관리체제의 정돈, 명확한 장 성 보호 책임선의 확정 | ||
+ | ⑤ 장 성 보호에 관한 선전 실시: 장성 보호에 관한 철저한 선전과 교육 실시 | ||
+ | ⑥ 장 성 및 그 보호 관리를 위한 연구 강화: 장성 보호를 위한 과학적 연구의 강화와 ‘장성 및 그 보호 관리 연구’ 과제의 완성 | ||
+ | ⑦ 장 성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보수계획의 수립: 과학적인 장성 보호 와 수선계획의 제정, 중점 구간 유적에 대한 수선방안 편성과 중점 부위의 응급처치 공사의 완성 | ||
+ | ⑧ 장 성 파괴행위에 대한 엄격한 감독과 법집행: 법률에 근거한 관리 감독의 강화, 장성 파괴행위에 대한 엄격한 처벌 | ||
+ | ⑨ 장 성 보호를 위한 경비 증대: 장성 보호 작업에 대한 경비 증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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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장성의 규정 ==== | ||
+ | 장성보호공정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장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장성에 대한 인식이 몸통이 되는 성벽'만' 포함했었다면, 2005년 장성보호공정의 발표 이후로 장성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었다. 다음은 장성보호공정에 나타나는 장성의 구성이다. | ||
+ | |||
+ | <조사방안>에서 규정한 장성 구성 <ref> 출처 : 앞의 글</ref> | ||
+ | •장성 본체: 성벽 및 성벽 상의 시설. 적대(敵臺)·마면(馬面) 등 | ||
+ | •부 속 시설: 장성과 함께 방어체계를 이루는 관련 시설. 관보(關堡)· 봉화대(烽火臺) 등 | ||
+ | •관 련 유적: 성벽 양측으로 장성 방어체계와 관련 있는 유적. 호구(濠 溝), 당마장(擋馬墻), 품자교(品字窖), 역참(驛站), 창저(倉儲), 거주 지(居住地), 전와교(磚瓦窖), 채석장(採石場), 적신(積薪) 등 | ||
+ | 즉 이는, 장성의 개념을 단순한 성벽에서 끝나지 않고, 주변 군사시설, 관련 시설, 더욱 더 나아가 벽이 아닌, 나무 울타리나 능선까지 확장한다는 것이다. | ||
+ | |||
+ |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보호조례>를 통해 정부가 장성 조사와 보호를 주도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 | |||
+ | <보호조례> 중 지방정부 관련 조항 <ref>출처 : 위의 글 </ref> | ||
+ | 2조: 본 조례에서 지칭하는 장성은 장성의 성벽, 성보, 관애, 봉화대, 적루 등을 포괄한다. | ||
+ | 5조: 장 성 소재 현급(縣級) 이상 지방정부는 장성 보호 경비를 재정 예 산에 책정해야 한다. | ||
+ | 6조: 국 가는 장성 보호를 위해 전문가 자문제도를 실행한다. | ||
+ | 8조: 국 무원 문물 주관부, 장성 소재 현급 이상 지방정부 및 문물 주 관부서는 장성 보호에 출중한 공헌을 한 조직 및 개인을 표창해야 한다. | ||
+ | 9조: 장 성 소재 성(省)·자치구·직할시 정부는 해당 지역 내의 장성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 ||
+ | 11조: 장 성 소재 성·자치구·직할시 정부는 <장성보호총체규획> 규 정에 따라 해당 지역 내의 장성 보호범위와 규제지역을 획정하고 공포해야 한다. | ||
+ | 15조: 장 성 소재 성·자치구·직할시 정부는 해당 지역 내의 장성 구간 보호 담당 기구를 확정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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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는 장성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보호를 의미한다. 정부 차원에서 이를 진행함에 따라 날로 파괴되고 있는 장성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장성 조사 및 연구에 국가가 집중적으로 지원하게 되면서, 장성 연구가 '장성학'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하나의 학문으로 성장했다. 한편 모든 장성 연구가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진행되다 보니, 기존과 연구 경향이 바뀌었고 이에 대해 중국 정부의 사상을 합리화 시키는 연구 결과에 중점을 두는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것 역시 어느정도 일리는 있어 보이는 것이, 확대된 장성에 대한 규정에 맞춘것처럼, 연구 경향역시 변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연구가 장성의 축조 방식에 대한 연구이다. 일반적으로 장성이라면 달구질하거나, 쌓거나, 최소한 겹쳐 올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파내는 것이나 깎아 내는 것들은 흔히 참호를 파거나 자연에 다소의 힘을 가해 자연 방어물을 구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장성자원조사명칭사용규범(長城資源調査名稱使用規範)>을 보면산험장(山險墻)과 관련해서는 깎아 내는 것을, 호참(壕塹)/계호(界壕)와 관련해서는 파내는 것[塹]을 축성의 한 방법으로 규정하였다.<ref> 또한 지방단체에서 관광자원을 늘리고자 하는 차원에서 장성의 구성을 확장하고 이와 관련하여 연구 방향을 선회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ref> 이러한 연구가 지속되면서 장성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국가가 의도하는 것 처럼 변했다. | ||
+ | |||
== 참고문헌 == | == 참고문헌 == | ||
+ | * 오주기, 우수치, 「朝鮮朝 文人의 秦始皇 인물평 연구 : 『史記』 人物 批評의 한 事例」,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3. | ||
+ | * 공석구, 「秦 長城 東端인 樂浪郡 遂城縣의 위치문제」, 『한국 고대사 연구, 한국 고대사 학회, No. 81, 2016, 03. | ||
+ | * 김경록, 「장성과 군진으로 보는 명대사」, 『군사』, No. 106.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 2018. 03. | ||
+ | * 홍승현, 「중국 고대 長城 개념과 역할 - 秦漢時期 장성을 중심으로」, 『사림』, No. 62, 수선사학회, 2017.10. | ||
+ | * 오강원, 「戰國時代 燕나라 燕北長城 동쪽 구간의 構造的 實體와 東端」, 『선사와 고대』, No. 33, 한국고대학회, 2010. 12. | ||
+ | * 홍승현, 「燕・秦・漢長城 수축을 통해 본 衛滿朝鮮의 西界」, 『한국사학보』, No. 70, 고려사학회, 2018. | ||
+ | * 「长城-百度百科」 | ||
+ | * 니시노 히로요시, 『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 김석희 옮김, 북북서, 2007. | ||
+ | * 줄리아 로벨,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김병화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2006. | ||
+ | *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꿈엔들, 2008. | ||
+ | * 홍승현, 「위진남북조 시대의 세계 개념 변화와 이민족 정책」, 『동북아역사논총』, 2006. | ||
+ | * BBC 편집부, 「 [여행스케치] 영국 BBC선정 세계 최고의 여행지, 중국의 자존심, 만리장성 」, 한국마케팅연구원, 2009. | ||
+ | * 홍승현, 「중국의 장성보호공정과 장성 연구의 새로운 경향」, 동북아역사논총, 2014. | ||
+ | * 이수자, 「만리장성 설화의 형성 기원과 문화사적 의의 -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 설화와 관련하여」, 역사민속학, 2008. | ||
+ | * 공석구, 「中國歷史地圖集의 평양지역까지 연결된 진 장성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재단, 2015. | ||
+ | * | ||
== 각주 == | == 각주 == |
2019년 9월 29일 (일) 14:44 기준 최신판
장성(만리장성, The Great Wall of China) 萬里長城 | |
---|---|
[[파일:|300px]]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는 만리장성 | |
분류 | 성벽, 문화재 |
소재지 | 하북성에 위치한 산해관(山海關)~자위관(嘉峪關), 간쑤성(甘肅省) 가욕관 |
개방시간 | 성수기(4~10월) 09:00~17:00, 비수기(11~3월) 09:00~16:00 |
입장료 | 성수기 45 CNY, 비수기 40 CNY [1] |
목차
개요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지상에 존재하는 건축물 중 가장 거대한 건축물
장성은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2] 축조한 방어성이다. 한국에서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며, 중국에서도 이 명칭이 간간히 쓰인다. 현재는 본래의 목적은 사실상 상실했으며 관광지로 [3]더욱 유명하다.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 [4] 중 하나이며 성의 길이가 만 리(里)이기 때문에 만리장성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나, 실제 길이는 만 리(약 4000km)를 넘는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허베이성(河北省)의 '산해관', 그리고 서쪽으로는 간쑤성(甘肃省)의 '가욕관'까지 축조되었다. 약간의 돈을 내면 직접 위로 올라가 고대 중국인들의 기상을 느껴볼 수 있다. 계절에 따라 개방 시간이 다르고 구역마다 가격이 다르다.[5]
왜 장성을 지었을까?
장성을 지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중국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근심거리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략이었다. 그들은 줄곧 침략해 사람들을 죽이고, 한 해 동안 정성껏 재배한 작물을 약탈해갔다.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모두 말을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6]말은 기동력이 좋다는 장점이 있으나 앞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 활용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착안해 중국인들이 축조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단순히 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기 때문에 초기 만리장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리장성과는 조금 다른데, 진나라 당시 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을 보면 성벽이라기보다는 담에 가까운 형태이다. 높이는 고작 2~3M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마병의 접근을 막는데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만약 사람이 넘고자 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이다.
또한 장성을 축조하는 것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후술하겠지만 장성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건축사업이었다. 때문에 장성을 건립하는 것은 황제가 그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장성의 건립은 당시 축조하고 있는 지방이 각 국가의 영토에 속함을 표현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실제로 장성을 축조하는 시기와 장소는 각 국가가 안정화된 이후 국가의 최대영토에 해당하는 곳 혹은 주요한 지방[7]인데, 이는 장성 외부의 적에게 장성 내부의 영토에 침입하지 말라는 공표의 의미이기도 했다. 장성은 국가 내부의 정적을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서에 따르면,"정치적 죄를 지은 관리를 장성을 건립하는 곳에 보내 축조하도록 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즉, 장성을 건립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이 일종의 처벌행위[8]였으며, 견제의 용도로도 장성의 축조를 진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성의 역사
기원
장성의 축조는 서주(西周)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북방 유목 민족과 대치해야 했고, 때문에 돌을 일정하게 쌓아올린 '열성'을 쌓아 방어했다. 이것이 중국의 장성의 시작으로 이것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넘어가 각 패권국가들이 자신의 국방을 이해 방어용 성곽을 쌓는 것의 유래가 되었다. 북방을 막는 성벽도 있었던 반면 북쪽이 아닌 주변국가도 막기 위해 성벽을 축조했으나 이러한 성벽들 중 북방을 막는 성벽들이 합쳐져 장성이 되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통틀어 판축 공법으로 이 성벽을 처음 만든 것은 기원전 7세기 무렵, 하남성 근처의 초(楚)나라이고, 장성 축조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던 나라는 연나라이다. 연나라는 소양왕이 즉위한 이후 국가의 발전을 거듭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국토를 넓혀간 연나라는 북쪽의 동호족과 마주하게 된다. 동호족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연나라는, 국토를 방어할 ‘연남장성’의 축조를 시작하게 된다. 연나라는 새로 정복한 네이멍구(內蒙古) 동남부, 랴오닝(遼寧), 서북한(西北韓)의 일부에 상곡(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석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다. 또한 이 5부를 둘러싸고 장성을 축조하는 데 이것이 바로 '연남장성(燕南長城)’이다.
연남장성은 북방민족인 동호족을 막는 데에만 집중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장성이 동호족의 중심인 건평지방을 지나간다는 점과 동서로 길게 건립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장성이 매우 길게 분포한다는 점에서 장성의 목적이었던 동호족이 세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장성을 긴 기간 동안 건축하는 과정에서 동호족의 세력이 약해지자 장성의 건립과 땅의 개간을 같이 했다는 것이다. 이는 연남장성의 유적이 많지 않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도 사용된다.
현재 서북한(西北韓)과 요동(遼東)의 일부의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 이를 통해서 일부 학자들은 다른 장성처럼 축조하지 않은 채로 자연환경을 장성으로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장성유적을 통해 연나라의 국토범위와 생활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연나라의 유적은 장성의 건립지역이었던 建平에 약 50%이상이 분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장성의 주변에서 수비하고 있는 군사의 군락과 장성을 건립하기 위해 모집된 일반인과 징집된 죄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
시황제 26년(221년), 6개 국가를 병합하고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만들었다. 이후 시황제는 국방을 공고히 하고 국가체계와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만리장성축조를 지시한다. 당시 북쪽의 변방에 접하는 연, 조, 진의 삼국은 각각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을 쌓아두었는데, 최초의 만리장성은 이 성벽을 잇고 수리하여 완성한 것이다. 한편 시황제는 만리장성에 포함된 북쪽 성벽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성벽들을 그 땅의 백성을 동원하여 파괴했다. 북방의 침입을 제외한 장성 밑의 지역은 이미 통일되었기에, 성벽의 잔존은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장성의 축조는 대외적으로는 흉노의 침입에 방어하려는 것이었지만, 아방궁과 병마용도 시황제 시기에 축조된 것을 근거로 하여 학자들은 왕권의 강화의 목적도 있었다고 주장한다.[9] 사기에 따르면, 진의 장성의 축조 범위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동쪽으로는 조선이 있는 요동까지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랴오허 강까지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장성이 조선과 매우 인접하자. 조선은 진이 습격해 올 것을 두려워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를 통해서, 진나라와 조선의 영토가 기존의 연나라와 조선의 영토와 차이가 있었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시황제가 만든 장성은 지금의 감숙성 임조(臨兆)에서 요녕성(遼寧省) 요동(遼東)까지 약 1만리에 달했다.[10] 그러나 진나라는 장성 때문에 국가의 멸망이 초래되기도 하였는데 후술한 바와 같이 장성을 건립하는 과정속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인적 손실이 있었다. 또한 진시황은 아방궁과 병마용의 축조도 진행을 하였는데, 이러한 무리한 노동력의 착취와 인명피해, 그리고 강력한 법치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낮은 민심은 진승 오광의 난으로 대표되는 백성들의 난과 함께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하는 이유가 된다.
진(秦)대의 장성은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보통 높이는 2~3m정도이다. 또한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 오늘날의 장성과는 달리 흙으로 쌓은 담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이 시기 장성을 만든 이유는 유목민의 기마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는데, 장성 앞에 도랑을 파 해자(垓子)를 만들었고 또 이 앞에 성벽같은 흙담을 설치했다. [11]
한
한나라 초기 전쟁을 틈타 세력을 성장시킨 흉노는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을 경계로 한나라와 대치하기 시작한다. 장성을 경계로 흉노를 방어해야 하는 한나라 입장에서 장성은 매우 중요한 방어요새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의 시간동안 정비를 하지 못했던 장성을 상대로 흉노는 자주 약탈을 했다. 이러한 흉노의 계속된 침범은 만리장성의 증강을 야기했다. 당초의 장성은 내몽골자치구에 남아 있는 조(趙)나라 시기의 장성 외판에 판축으로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역에 따라 재료나 만드는 방법이 각양각색이었다. 장성은 실제로 방어요새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제로 청불식과 같은 한나라의 장군이 장성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흉노가 장성을 범하지 못하였고 공손하, 공손선, 호거병은 흉노를 공격한 후 장성으로 퇴각하여 장성을 이용해 방어하였다.
그러나 장성도 흉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은 기원전 200년, 전차 중심의 32만 대군을 이끌고 장성을 넘어 침입했던 흉노족의 기마군단과 맞서 싸웠다. 전차 중심의 한군과 기마 흉노군 중 어느 쪽이 강한가를 판가름하는 전쟁이기도 했는데, 결과는 흉노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한편 이 패배 이후, 중국의 왕조와 정착민족은 북방민족의 무(武)에 대해 콤플렉스를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은 '무'를 업신여기고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잠재된 열등감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콤플렉스가 역으로 작용한 중화사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이러한 패배를 뒤로 하고, 한 무제는 곽거병과 위청를 보내 흉노를 북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장성을 서쪽으로 증축한다. 이는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한 이후 발견한 실크로드를 방어하기 위한 용도이다. 이후 한 무제는 장성을 증축, 정비하였다. 이 이후로 전국시대부터 국방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이 국방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기 시작하였다. 한나라 시대 증축된 장성은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와 무역을 안정화시키고, 북방의 위협으로부터 한족국가를 방어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재밌는 점은, 한나라 시기 장성을 쌓는 방법이다. 한나라 시기 지방에서 성벽을 완성한 후 완성 검사를 받을 때는 장성의 흙벽에 송곳이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지는지를 검사했다. 만약 송곳이 들어가면 현장 책임자가 처벌을 받았으며 심한 경우 사형을 당하는 자도 있었다. 그 밖에 영하의 중위에 남아있는 승금관장성과 같이 돌로 쌓은 장성은 내몽골에서 동북쪽에 걸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고양에 있는 진나라 때 장성이나 요령의 아골관 근처에 남아 있는 장성은 돌을 쌓은 후에 그 틈새를 진흙으로 메우는 방법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했다.
수·당
중국을 통일했던 수 문제는 북방의 돌궐에 대응하기 위해 장성을 축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과업으로 삼았다. 이는 수 양제또한 다르지 않아, 장성의 건립에 큰 공을 들였다. 수나라 시기 장성은 빠르게 축조되었다. 수나라의 38년 중 28년 동안 장성은 무려 7차례나 증축이 되었다. 수 황제들은 약 200만명의 노동력을 이용해 북부와 서북부에 장성을 증축해 나갔다. 때문에 장성과 관련된 수나라의 유물은 기간에 비해 매우 많은 편이다. 2007년 산서성에서 수 왕조 시기의 시공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내에서 최초의 발견으로, 수 왕조가 장성의 건립에 매우 많은 정성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수장성 역시 돌로 쌓여졌으며, 높이는 지표면에서 약 1.5m를 유지하고 있다. 이 당시 증축된 장성까지를 포함하였을 때 1700km에 다다른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또한 장성이 국방의 용도로 매우 공들여 세워졌기 때문에, 약간의 보수와 증축 이후 바로 명나라에서 사용하였다.[12] 명 시기가 장성이 가장 많이 증축되는 시기인 것을 감안하였을 때, 수 장성이 매우 잘 건립되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당나라 또한 돌궐의 침입에 방어를 해야만 했다. 때문에 당시기에도 장성의 증축이 주도되었는데, 때문에 한 무제 시절부터의 장성의 역할인 실크로드의 안정성이 강화되었다. 이는 당나라의 포용적인 이민정책과 어우러져 중국 문화가 매우 많이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이 당시 장성은 헤이룽장 성, 타이 구, 위서 현에서 주로 증축되었는데, 이는 돌궐의 주요 구역과 매우 밀접하다. 즉 당나라의 장성건립은 돌궐에 대응하여 국가를 방어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하던 당나라가 몇 안되는 강경정책을 펼친 민족이 돌궐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장성의 증축이 뒷받침해준다. 실제로 돌궐 세력을 뒤에 업고 자신을 왕이라 칭했던 유무주를 상대로 당 태종 이세민을 대응시키는 동시에 그 근방의 장성을 증축하였다.[13]
송
송나라시기 장성은 서쪽으로는 커란 현까지 증축되었고, 동쪽으로는 연잎평산까지 증축되었다. 이를 송장성이라고 하는데, 길이 약 38km, 높이 약 4.2km의 돌성벽으로 되어있다. 송장성의 주변에는 송시기의 도자기 파편이 있고, 일부 지방에는 송 시기에 사용되었던 포댓자루가 보이기도 한다. 중국의 장성 전문가인 성대림은 커란 현의 장성은 북제, 수나라, 송나라시기에 모두 축조되었다고 한다.[14] 송나라시기 장성 축조의 역사가 비교적 도드라지지 않았는 점에서 이 발견은 매우 유의미하다. 한편 송 시인 문천상은 망강녀의 비를 보며 진시황을 비판하고 망강녀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는데, 무(武)를 천시하고 문(文)과 백성을 중시하는 송시기의 특징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명·청
명나라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바로 흔히 북로남왜라고 부르는 북로, 즉, 북방민족들이었다. 때문에 명나라에게 장성은 매우 중요한 방어선이었고, 장성을 증축하고 보수하는데에 많은 공을 들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이 바로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16세기 명나라 시기에 기존에 있던 만리장성을 보수, 신축하였다. 장성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명대 이전에 자주 일어났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공격하는 쪽도, 수비하는 쪽도 기술이 과거보다 진보한 상태이기에, 축조된 장성의 높이도 7~8M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장성은 말이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훌륭한 것인데 기존의 장성보다 평균 100KM나 남하한 위치에 형성되었다.[15] 이 시기 장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곳이 많다. 이는 적이 침입했을때 접근이 쉽지 않은 험준한 곳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한편 이 시기 강수량이 많은 지역으로 장성이 남하한 이유는 둔전(屯田) 경작의 용이함을 위해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둔전이란 주둔군이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밭을 경작하는 등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16] 만약 전체 군사를 열 명으로 본다면 이 중 여덟명은 둔전을 경작하고, 나머지 둘이 근무를 서는 것이 당시 명나라 군사 체제였다. 한편 1년동안 농사를 지으려면 연 평균 강수량이 200ml로는 힘들다. 따라서 이들은 둔전을 유지할 수 있는, 연 평균 강수량이 500ml인 지역으로 내려온 것이다.[17]
명대 말에 접어들면 현재의 장성과 유사하게 구운 벽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벽돌은 오르도스 내의 장성 중간 부분에서 동쪽으로 한정된 지역에 나타나는데, 이런 벽돌을 '전(磚)'이라 부른다. 당시 장성의 평균 높이는 7~8m 정도였고, 폭은 기저부가 8m정도, 상부는 4~6m 정도였다. 절벽이나 능선에도 장성을 쌓았는데, 이는 몽골 말이 장성을 뛰어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중국 왕조 역사 중 한나라와 함께 몇 안 되는 한족 중심의 왕조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가 명대에 쌓은 장성의 은혜를 입었다. 청나라는 몇 번이나 북방 이민족을 쫓아버린 일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봤을 때 북방의 이민족이 강성해진 것은 항상 습격과 약탈에 의해 식량과 자원을 공급받은 시기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전 왕조들이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막으려고 했던 장성인데, 청나라가 들어서고 나서는 청나라 정착민족이 또 다시 이민족을 막기 위한 '방어'의 개념으로 장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유목민들과 한족이 뒤섞이는 중국 역사를 참고해본다면 장성은 장성 안쪽과 밖을 나누는 기준으로서 작용하지만, 그 경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불분명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92년 9월 26일,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대영제국 최초로 통상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당시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심각한 적자를 내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중국산 차(茶)에 열광했지만, 중국인들은 영국의 은 이외에는 어떠한 물건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들은, 문화적 차이로 결국 외교 협상에 실패한다.[18] 거창한 외교적 실패를 겪은 뒤, 영국 사절단원들은 그들의 여행기에서 중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중국의 연극은 투박하고 조야하다', '중국의 음악은 째질듯한 음향의 집합체이다', '중국의 묘기는 실망스럽다', '중국에는 수세식 변기나 용변을 제대로 볼 만한 장소가 하나도 없다'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국 외교단도 인정하고 간 것이 바로 장성이었고, 이 당시 작성한 장성에 대한 기록은 서양 세계에 중국의 만리장성이 전파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북경 동북부를 지나는 고북구(古北口) 관문에서 멈추었는데, 이 곳은 만리장성을 과시하는 장소였다. 이들은 장성을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푸르스름한 색깔의 벽돌로 구성된 장성은, 높이는 약 9m, 너비 약 2m 인 사각형 망루가 45~60m 간격으로 세워져 성벽을 보강한다. 내가 여러 군데에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 성벽은 아주 가파르고 높으며 바위투성이인 산등성을 넘어 구불구불하게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길이는 2400km에 이른다. 이 모든것은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것 중 가장 거대한 업적이며,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주택 전체에 쓰인 석재의 총량이 이 장성을 짓는데 사용된 석재의 총량과 맞먹을 것이다.
건축 방법
사기에 장성의 축조와 관련해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대체로 ‘築’과 ‘立’이 ‘쌓다’라는 의미로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장성이 인공적인 힘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내포하는데, ‘築’이 ‘나무와 삽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성은 사람이 힘을 가하여 쌓은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장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험한 자연물을 이용하여 축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내려온 전통 중 하나인데, 사기에 따르면 ‘趙' 장성은 장수(漳水)와 부수(涪水)를 이용하여 지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는 장성을 두 강의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는 의견과, 두 강의 제방을 증축하였다, 즉 제방이 곧 장성이 되었다는 의견이다. 대다수의 학자는 秦의 서장성이 비슷한 방법으로 축조되었다고 서술하였으나 실제로는 빈락(濱洛)과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자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다고 해석한다.[19] 즉,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장수와 부수가 1차 방어선이고 장성이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높은 산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축조한 것도 장성의 축조법 중 하나였는데, 사기에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장성을 축조하였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팔달령 장성’또한 높은 산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또한 ‘랴오둥 장성’은 축조할 당시 절벽을 깎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렇게 험한 자연물은 적으로 하여금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성을 축조할 때 최대한 이용하였다.
명나라 이전의 장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소재가 사용되었다. 중국 쪽에서 볼 때 동쪽이나 산간 지역에서는 주변에서 조달하기 쉬운 돌을 쌓아 만든 곳도 있고, 돌과 흙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한 곳도 있다. 흙은 주로 황토를 사용했다. 황토는 물과 함께 절구에 빻아 건조시키면 아주 단단해지는 성격이 있기에 성벽을 쌓는데 유리했다. 그래서 치수를 재어 나무 판으로 만든 틀 안에 황토와 물을 넣고 반죽하여 건조시킨 후 시간이 지나 틀을 빼면 제방과 같은 장성이 생긴다. 이러한 건축 기법을 '판축(板築)이라고 한다. 서쪽의 실크로드가 있는 곳으로 가면 황토 점토 안에 억새나 타마리스크 가지 등의 보강재를 섞은 곳도 존재한다. 또한 표면에 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곳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벽돌은 판축 장성과 같은 방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황토와 물을 반죽해 넣어 햇볕에 건조시킨 벽돌이다. 한편, 만리장성의 벽돌이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최근에 색다른 견해가 등장했다. 중국 문화 유적보존 및 복원 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보수공사 중에 벽돌과 벽돌 사이에서 의미불명의 접착 물질이 나왔고, 이를 분석해본 결과 성분이 찹쌀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과거 만리장성의 벽돌과 벽돌을 붙일 때, 찹쌀 죽을 쒀서 돌 사이에 발랐고, 이 찹쌀의 끈기가 성벽을 지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현황
진나라이전부터 청나라까지 장성의 주 목적은 북방민족의 침략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방민족의 위협이 사라지고 국가의 존속이 크게 변화할 일이 없는 현대에는 본래의 목적을 잃고 관광의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리장성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2007년에는 신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2005년 발표된 장성보호공정의 일환으로 국가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동시에 관광상품으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인터넷상에 중국 여행이라 검색하면 만리장성이 코스로 들어가 있는 상품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로 수많은 언론에서 보다한다. 이는 만리장성이 가지고 있는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는 지위와 만리장성이 축조된 지방의 자연환경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기 때문이다. 빼어난 주변 자연 경관역시 이유 중 하나이다. 인간이 쌓은 위대한 업적과 숲, 산, 강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 역시 파괴와 복원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이다. 현재 만리장성의 파괴는 심각한 수준으로, 전체의 약 50%가 댐으로 인한 수몰, 거주지 조성을 위한 파괴, 그리고 관광객의 낙서 및 훼손 등등의 이유로 훼손되었다. 또한 현지 주민들이 관광 상품으로 팔기 위해 만리장성의 벽돌을 빼내는 등의 훼손역시 잦았다.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며, 때문에 중국정부에서는 복원 및 법률 강화라는 대책을 내놓는 결과가 되었다 또한 중국정부가 시멘트로 대충 모양만 내는 듯이 복원을 하여 이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중국정부의 복원은 타 국가에서 시행하는 복원사업과 다르게 매우 비효과적이다. 또한 법률강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장성은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마오쩌둥의 '장성에 올라보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는 말처럼 중국의 이념과 사상의 중심이 되는 건축물이다. 중국의 과거와 함께한 구조물이다 보니 만리장성을 따라가다 보면 중국의 모든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관련 논란
장성의 위치와 북한 논란
'사기진은', '진서'에서 진(秦)나라 때 축조된 장성이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했다. 이를 보고 다양한 학자들이 '낙랑군'의 위치와 진나라 장성의 시작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했다. 이중 낙랑군을 북한의 평양으로 봐야 하며, 진나라 장성이 평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의견이 등장했다. 북한에 존재하는 '대령강 장성'이 진나라 장성의 일부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사료의 해석차이로 나타난 오해이며, 장성이 시작하는 낙랑군은 북한의 평양이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屬幽州>.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 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 有雲鄣. 縣二十五 朝鮮...(중략)...遂成(『漢書』 卷28 下, 地理志8 下, 樂浪郡). [20]
위의 사료는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한 이후 세운 한사군과 관련된 내용인 동시에,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에 관한 내용이다.
秦已並天下 乃使蒙恬將三十萬 北逐戎狄 收河南. 築長城 因地形 用制 險塞 起臨洮至遼東 延袤萬餘里(『史記』 卷88, 列傳28, 蒙恬列傳). [21]
반면 위의 사료는 장성의 건축과 관련된 내용으로, 진의 국경과 조선의 국경문제에 대해서 서술이 되어있다. 즉 위의 사료와는 성격이 다른 내용이다. 그러나 점점 이 두 개의 사료를 교차해 서술한 글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한, 중, 일 세 국가의 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게 된다.
세 국가의 학자들의 학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북한의 평양지역이라는 학설이다. 일부 사료에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으며, 심지어 '대령강 장성'이라는 천리장성과 다른 장성유적이 남아있다는 근거를 들어 북한의 평양지역이 낙랑군이며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다른 사료의 내용을 통해서 낙랑군이 현 요서지역이라는 주장이다. 이 또한 사료를 통해 주장한 것이므로 타당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후, 북한의 학계에서 '대령강 장성'이 고구려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기와무늬 [22], 장성의 위치 [23], 산성의 모양 [24]를 이유로 고구려의 장성임을 주장했다. 또한 근처에서 고려 유물도 매우 많이 나와 고려시대까지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오류가 등장하였다. 학자들이 사료적 기반으로 내세웠던 '태강지리지'와 '진서'에서 서술되었던 낙랑군은 서로 다른 낙랑군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비교적 늦게 기술되었던 '진서'에서 낙랑군을 요서지방으로 기술한 선례 [25]가 존재하자 낙랑군을 평양으로 써버린 것이었다. '태강지리지'에서는 낙랑군을 요서지방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두개의 사료를 잘못 해석한 학자들의 오류인 것이다.
혹사논란과 맹강녀의 전설
만리장성은 지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큰 구조물이다. 피라미드가 지어질 당시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듯, 만리장성 역시 대규모 노동력을 바탕으로 축조되었다. 장성 건설에도 어느 시대에나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는데, 그 원인은 주로 기아와 과로였다. 갈증 역시 주요 원인으로 꼽는데, 힘든 노동으로 땀을 흘려도 쉽게 물을 구할 수 없는 곳이 많고, 보급되는 물 역시 턱없이 부족해서 많은 수의 사람이 죽어갔다고 추정된다. 장성 건설에 따른 노동자의 피해는 심각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된 노동에 내몰린 사람들의 3분의 1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6] 황하강 유역의 공사 현장이라도 물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은 마찬가지로 추정되는데, 황하강은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27] 고된 노동과 생존을 보장하기 어려웠던 작업 환경 탓에, 만리장성과 관련된 민간의 이야기들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맹강녀(孟姜女)이야기이다. 맹강녀 이야기는 제(齊)나라 시기의 이야기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섬서성에 사는 젊은 부부인 범기량(范杞梁)과 맹강녀의 이야기이다.
이 둘이 신혼생활에 푹 빠져있을 때 남편 범기량이 장성 공사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다. 범기량이 끌려간 곳이 바로 산해관(山海關)이다.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가장 동쪽에 있는 관문이자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다. 일년이 지나도 노역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를 않자, 맹강녀는 남편을 위해 준비한 겨울옷을 가지고 공사 현장을 찾아갔다. 이 때 머슴과 몸종을 하나씩 데리고 갔는데, 머슴이 몸종을 죽이고 맹강녀를 겁탈하려 했다. 하지만 맹강녀는 정조를 지키겠다는 일념만으로 머슴을 죽이고 혼자 산해관을 향해 갔다.여러 고초를 겪고 도착한 산해관에서 맹강녀가 들은 소식은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시신은 자신이 짓고 있던 장성 안에 묻혀 있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맹강녀가 장성에 기대어 목이 터져라 울자 갑자기 장성의 일각이 무너지더니 그 안에서 남편의 시신이 나왔다.
이러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중국 전역에서 유행하였다. 이는 당시 만리장성 축조에 대한 당시 백성들의 원망과 공포를 잘 나타낸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만리장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나라 속담 중 '하루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속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만리장성을 쌓으러 갔는데, 부인이 글을 모르는 어떤 남자를 유혹하여 하룻밤을 동침하고는 그에게 남편에게 옷가지와 편지를 전해주고 오면 남편을 버리고 함께 살겠다고 했다. 남자가 이 말을 믿어 심부름을 했는데, 편지에는 남편 대신 성 쌓을 사람이 이 편지를 들고가는 사람이니, 그를 대신 붙잡아 성을 쌓게 하고 남편은 빨리 도망쳐 나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남편은 그 남자에게 옷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잠시 성을 쌓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대로 도망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내와 함께 살았다.
이러한 설화 역시 당시 장성 축성과정이 얼마나 고댄 것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또 한편으로는 장성과 관련된 속담이 우리나라까지 들어와 사용되는 것을 보아 과거 한국 사회에도 장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사마천 역시 이러한 혹사에 대해서 평한 바 있다. 사마천은 진나라 때 무리하게 쌓은 장성과 직도(直道)를 직접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야말로 백성의 괴로움을 무시한 공사로다. 진이 제후를 멸했을 때는 천하의 인심은 아직 불안했고, 다친 자들의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명장 몽염은 공사를 멈추게 하는데 몸을 바치지 않았다. 노역에 내몰린 백성을 구하지 않았고 늙은이와 고아를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백성의 화합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해 시황제에게 아첨하느라 오히려 공사를 권했던 것이다.
이렇듯 장성은 시황제의 폭정의 상징으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이다.[28] 사마천 식의 해석으로만 장성 건설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또한 장성은 비록 단기적으로 봤을 때 심각한 노동력 착취로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왔다. 황하 강 아래에서 거주하는 중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실상 장성의 보호 아래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29]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때 장성을 억압의 상징으로만 보는것은 옳지 않다.
장성보호공정(長城保護工程)
개요
2004년 장성이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라가면서 중국 정부가 비상에 걸렸다.[30] 여기에 대한 조치로 시작된 것이 바로 장성보호공정(長城保護工程)이다. 2005년 말부터 이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호방안>의 주요 내용 [31] ① 장 성 기반의 파악: 장성 자원 조사의 실시, 장성 문물 기록 보고서 의 작성 ② 총 체적인 계획의 편성: <장성보호총체규획(長城保護總體規劃)>의 편성, 보호범위와 규제지구의 확정 ③ 관 련 법규의 제정: <장성보호관리조례(長城保護管理條例)>의 제 정, 관련 법규의 완비 ④ 장 성 보호 관리체제의 정돈: 장성 보호 관리체제의 정돈, 명확한 장 성 보호 책임선의 확정 ⑤ 장 성 보호에 관한 선전 실시: 장성 보호에 관한 철저한 선전과 교육 실시 ⑥ 장 성 및 그 보호 관리를 위한 연구 강화: 장성 보호를 위한 과학적 연구의 강화와 ‘장성 및 그 보호 관리 연구’ 과제의 완성 ⑦ 장 성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보수계획의 수립: 과학적인 장성 보호 와 수선계획의 제정, 중점 구간 유적에 대한 수선방안 편성과 중점 부위의 응급처치 공사의 완성 ⑧ 장 성 파괴행위에 대한 엄격한 감독과 법집행: 법률에 근거한 관리 감독의 강화, 장성 파괴행위에 대한 엄격한 처벌 ⑨ 장 성 보호를 위한 경비 증대: 장성 보호 작업에 대한 경비 증대
장성의 규정
장성보호공정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장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장성에 대한 인식이 몸통이 되는 성벽'만' 포함했었다면, 2005년 장성보호공정의 발표 이후로 장성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었다. 다음은 장성보호공정에 나타나는 장성의 구성이다.
<조사방안>에서 규정한 장성 구성 [32] •장성 본체: 성벽 및 성벽 상의 시설. 적대(敵臺)·마면(馬面) 등 •부 속 시설: 장성과 함께 방어체계를 이루는 관련 시설. 관보(關堡)· 봉화대(烽火臺) 등 •관 련 유적: 성벽 양측으로 장성 방어체계와 관련 있는 유적. 호구(濠 溝), 당마장(擋馬墻), 품자교(品字窖), 역참(驛站), 창저(倉儲), 거주 지(居住地), 전와교(磚瓦窖), 채석장(採石場), 적신(積薪) 등
즉 이는, 장성의 개념을 단순한 성벽에서 끝나지 않고, 주변 군사시설, 관련 시설, 더욱 더 나아가 벽이 아닌, 나무 울타리나 능선까지 확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보호조례>를 통해 정부가 장성 조사와 보호를 주도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호조례> 중 지방정부 관련 조항 [33] 2조: 본 조례에서 지칭하는 장성은 장성의 성벽, 성보, 관애, 봉화대, 적루 등을 포괄한다. 5조: 장 성 소재 현급(縣級) 이상 지방정부는 장성 보호 경비를 재정 예 산에 책정해야 한다. 6조: 국 가는 장성 보호를 위해 전문가 자문제도를 실행한다. 8조: 국 무원 문물 주관부, 장성 소재 현급 이상 지방정부 및 문물 주 관부서는 장성 보호에 출중한 공헌을 한 조직 및 개인을 표창해야 한다. 9조: 장 성 소재 성(省)·자치구·직할시 정부는 해당 지역 내의 장성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11조: 장 성 소재 성·자치구·직할시 정부는 <장성보호총체규획> 규 정에 따라 해당 지역 내의 장성 보호범위와 규제지역을 획정하고 공포해야 한다. 15조: 장 성 소재 성·자치구·직할시 정부는 해당 지역 내의 장성 구간 보호 담당 기구를 확정해야 한다.
이는 장성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보호를 의미한다. 정부 차원에서 이를 진행함에 따라 날로 파괴되고 있는 장성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장성 조사 및 연구에 국가가 집중적으로 지원하게 되면서, 장성 연구가 '장성학'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하나의 학문으로 성장했다. 한편 모든 장성 연구가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진행되다 보니, 기존과 연구 경향이 바뀌었고 이에 대해 중국 정부의 사상을 합리화 시키는 연구 결과에 중점을 두는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것 역시 어느정도 일리는 있어 보이는 것이, 확대된 장성에 대한 규정에 맞춘것처럼, 연구 경향역시 변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연구가 장성의 축조 방식에 대한 연구이다. 일반적으로 장성이라면 달구질하거나, 쌓거나, 최소한 겹쳐 올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파내는 것이나 깎아 내는 것들은 흔히 참호를 파거나 자연에 다소의 힘을 가해 자연 방어물을 구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장성자원조사명칭사용규범(長城資源調査名稱使用規範)>을 보면산험장(山險墻)과 관련해서는 깎아 내는 것을, 호참(壕塹)/계호(界壕)와 관련해서는 파내는 것[塹]을 축성의 한 방법으로 규정하였다.[34] 이러한 연구가 지속되면서 장성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국가가 의도하는 것 처럼 변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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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승현, 「중국의 장성보호공정과 장성 연구의 새로운 경향」, 동북아역사논총, 2014.
- 이수자, 「만리장성 설화의 형성 기원과 문화사적 의의 -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 설화와 관련하여」, 역사민속학, 2008.
- 공석구, 「中國歷史地圖集의 평양지역까지 연결된 진 장성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재단, 2015.
각주
- ↑ 출처 : 세계의 불가사의, 만리장성. : http://m.tourtips.com/dest/content/1006_beijing?contentID=1000045815101&type=theme
- ↑ 꼭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축조한 것은 아니다. 국가의 질서 및 왕권의 강화 목적으로도 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을 생각해보면 적당한 비유가 되는데, 고인돌은 무덤이지만 반드시 무덤의 기능만 수행하지는 않는다. 고인돌의 크기로 생전 무덤 주인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듯, 장성 역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한다.
- ↑ 실제로 중국정부는 장성을 국가 문화재 및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고 관리를 하고 있다.
- ↑ 다른 7대 불가사의로는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인도의 타지마할,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 멕시코의 치첸 이트사,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이 있다.
- ↑ 만리장성이 워낙 길다보니 관리하는 지역이 분화되어 가격도 다르다.
- ↑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북방의 유목민족은 어린 시절부터 말에 익숙하여 말을 타고 사냔을 배웠다고 서술했다. 따라서 유목민 기마병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우수한 전투력을 지녔고, 중국 농경민족의 농민병은 이들에게 대항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 ↑ 무조건 이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반례로 명나라때는 강수량과 같은 기후조건으로 인해 장성의 축조위치가 변화하기도 하였다.
- ↑ 장성을 건립하는 것이 처벌에 이용되기는 하였지만, 죄인만 장성의 축조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일반 백성들 또한 장성의 건립에 참여하였다.
- ↑ 이는 이후 조선의 유학자들이 진시황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에 따르면 이다.
- ↑ 이를 통해 생각해보면, 장성의 목적은 단순히 이민족의 기마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싸우기 위한 무기의 개념으로도 장성을 고려한 것 같다.
- ↑ 「长城-百度百科」
- ↑ 「长城-百度百科」
- ↑ 「长城-百度百科」
- ↑ 기존의 만리장성이 형성된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200ml 인 지역이었는데, 남하한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500ml인 지역이었다.
- ↑ 명나라는 평지에서 '둔팔수이(屯八守二)를 주둔군의 방침으로 삼았다.
- ↑ 또한 연 평균 강수량이 200ml인 지역의 경우 해발이 너무 높고 연 평균 기온도 낮을 뿐더러 토질에 암반이나 돌멩이가 많아 둔전을 유지하기에 힘들었다.
- ↑ 이들이 가져온 서양의 문물은 황제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차마 하지 못했다.
- ↑ 홍승현, 「중국 고대 長城 개념과 역할* — 秦漢時期 장성을 중심으로」,『사림』, No. 62, 수선사학회, 2017.10.
- ↑ 공석구, 「秦 長城 東端인 樂浪郡 遂城縣의 위치문제」, 『한국 고대사 연구, 한국 고대사 학회, No. 81, 2016, 03.
- ↑ 공석구, 「秦 長城 東端인 樂浪郡 遂城縣의 위치문제」, 『한국 고대사 연구, 한국 고대사 학회, No. 81, 2016, 03.
- ↑ 대령강 장성 유적에서 고구려 계가의 '수막새기와'가 출토되었다
- ↑ 만약 중국의 장성이었다면 동쪽의 적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큰 강 서쪽에 지어져야 했지만, 대령강 장성은 큰 강 동쪽에 지어졌다.
- ↑ 산성 중 고구려의 고로봉 산성 형식이 적지 않다.
- ↑ 태강지리지
- ↑ 인간은 몸 속 수분의 15~20%를 잃으면 사망에 이른다고 알려져있다.
- ↑ 황하 강 유역 지하수에는 불소 성분이 많아 음료수로로 적당하지 않다.
- ↑ 사마천은 한 무제와 진시황을 어느정도 겹쳐서 보았는데, 동시대의 한 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글을 쓸 수 없었다. 사마천 본인이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에 처해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진시황과 만리장성을 축조한 몽염에 대한 비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 명나라 때의 순무왕예나 여자준이 오르도스 현지에서 장성의 수축을 통절히 상소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 진굉(秦紘)은 장성 건설이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일이라고 답한 바 있다.
- ↑ 주된 이유는 훼손인데, 관광지로 수많은 인구가 오다보니 자연스럽게 훼손된 면도 있으나, 지역 주민들이 만리장성을 관광 상품으로 취급해, 돌을 빼 판매하는 등의 이유도 있다.
- ↑ 홍승현. 2014, 「중국의 장성보호공정과 장성 연구의 새로운 경향」, 동북아역사논총
- ↑ 출처 : 앞의 글
- ↑ 출처 : 위의 글
- ↑ 또한 지방단체에서 관광자원을 늘리고자 하는 차원에서 장성의 구성을 확장하고 이와 관련하여 연구 방향을 선회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