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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나라]]는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혼란스러운 [[ | + | [[진나라]]는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다. [[진시황]]은 중국에 한민족을 주체로 한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처음으로 성립시킨 셈이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황제]](皇帝)라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서 사용하였고, 왕이 죽은 뒤에 칭하는 시호를 폐지하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로 하여 그 뒤는 이세, 삼세 황제로 부르게 하였다.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는 1인칭 단어인 짐(朕)이라는 단어도 만들어 내었다. 또한 [[(秦)정치]],[[(秦)경제]],[[(秦)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이 제도들을 통해서 진나라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하지만 진시황의 억압적인 통치로 결국 백성들은 불만을 터트렸고 그 결과 진나라는 막을 내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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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우세했던 이유는 그동안의 왕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다. | #[[진나라]]가 우세했던 이유는 그동안의 왕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다. | ||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 ||
− | "[[진나라]]의 국토는 산을 등지고 [[황하]]를 두르고 있어 견고하니 사방이 요새인 나라였다. 목공 이래로 [[진나라]] 왕([[시황제]])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왕이 늘 제후의 | + | "[[진나라]]의 국토는 산을 등지고 [[황하]]를 두르고 있어 견고하니 사방이 요새인 나라였다. 목공 이래로 |
− | + | [[진나라]] 왕([[시황제]])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왕이 늘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것이 어찌 대대로 | |
+ | 현명한 군주 때문이겠는가? [[진나라]]의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이다.<ref>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 본기』, | ||
+ | 민음사, 2012, p259</ref>" | ||
[[진나라]]는 비옥한 땅이 있는 [[관중지방]]에 위치해 있었고 [[함곡관]]이라는 요새로 인해 공격하기와 수비하기가 용이했다. 효공이 죽고 혜왕과 문왕의 시절,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들이 [[합종책]]을 맺고 백만의 군사들을 가지고 [[진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으나, [[함곡관]]이라는 요새를 넘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진나라]]가 위치했던 나라의 장소가 어떤 군주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간에 통일을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는 것이 가의의 지적이다. 이러한 가의의 평가는 역사적 서술 방식 중에서 정치나 전쟁사 보다는 지형을 중시하는 아날학파의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 [[진나라]]는 비옥한 땅이 있는 [[관중지방]]에 위치해 있었고 [[함곡관]]이라는 요새로 인해 공격하기와 수비하기가 용이했다. 효공이 죽고 혜왕과 문왕의 시절,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들이 [[합종책]]을 맺고 백만의 군사들을 가지고 [[진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으나, [[함곡관]]이라는 요새를 넘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진나라]]가 위치했던 나라의 장소가 어떤 군주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간에 통일을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는 것이 가의의 지적이다. 이러한 가의의 평가는 역사적 서술 방식 중에서 정치나 전쟁사 보다는 지형을 중시하는 아날학파의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 ||
#통일 이후의 왕들은 어리석었다. | #통일 이후의 왕들은 어리석었다. | ||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 ||
− | "[[진나라]] [[시황제]]는 자신에게 만족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잘못하고도 끝내 변하지 않았다. [[이세황제]]는 그것을 이어받았으므로 이를 고치지 않고 | + | "[[진나라]] [[시황제]]는 자신에게 만족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잘못하고도 끝내 변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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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붙이도 없었으며 위태롭고 약했으나 보좌하는 신하가 없었다. 세 군주는 미혹되었으면서도 죽는 날까지 | ||
깨닫지 못했으니 패망 또한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ref>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 본기』, 민음사, 2012, p260</ref>" | 깨닫지 못했으니 패망 또한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ref>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 본기』, 민음사, 2012, p260</ref>" | ||
[[진시황]]은 늘 오만했고 자신이 늘 옳다는 생각에 신하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진시황]]에게 지혜로운 신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진시황]]의 포악한 성격탓에 그 신하들은 소신있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개진할 수가 없었다. 실례로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의 경우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진시황]]의 정책에 간언하니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파견하여 몽염을 감시하게 만들었다. 이후의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맏아들의 간언도 받아들이지 않은데 다른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진시황]]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인 [[호해]]가 [[이세황제]]가 되었을 때는 간신 [[조고]]에 의해 나라가 흔들렸으며 지혜로운 선비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자영]]이 왕이 되었을 때는 그의 곁에는 지혜로운 신하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는 멸망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 [[진시황]]은 늘 오만했고 자신이 늘 옳다는 생각에 신하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진시황]]에게 지혜로운 신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진시황]]의 포악한 성격탓에 그 신하들은 소신있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개진할 수가 없었다. 실례로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의 경우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진시황]]의 정책에 간언하니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파견하여 몽염을 감시하게 만들었다. 이후의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맏아들의 간언도 받아들이지 않은데 다른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진시황]]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인 [[호해]]가 [[이세황제]]가 되었을 때는 간신 [[조고]]에 의해 나라가 흔들렸으며 지혜로운 선비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자영]]이 왕이 되었을 때는 그의 곁에는 지혜로운 신하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는 멸망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 ||
#통일 이전과 통일 이후의 정책이 달라야 하는데 이를 바꾸질 못했다. | #통일 이전과 통일 이후의 정책이 달라야 하는데 이를 바꾸질 못했다. | ||
가의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진나라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 다음 글로 운을 떼고 있다. | 가의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진나라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 다음 글로 운을 떼고 있다. | ||
− | “무릇 [[진나라]]의 천하는 작거나 약해지지 않았고 옹주의 땅도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예전과 같았다. [[진섭]]의 지위는 [[제나라]],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 [[한나라]], | + | “무릇 [[진나라]]의 천하는 작거나 약해지지 않았고 옹주의 땅도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예전과 같았다. [[진섭]]의 지위는 [[제나라]], |
− | + |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송나라]] [[위衛나라]], 중산나라의 군주들 보다 존귀하지 않았다.··. | |
− | + | 한 사내가 난을 일으켜 칠묘가 무너지고 천자의 몸이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의를 베풀지 | |
− | + | 않았고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가 달랐기 때문이다.··.[[진나라]] 왕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을 품고는 이기적인 지모를 행하고 | |
− | + | 공신들을 믿지 않고 선비들과 백성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왕도를 없애고 사사로운 권위를 세워 문서를 금하고 형법을 가혹하게 | |
− | + | 했으며 기만과 폭력을 앞세우고 인의를 뒤로하여 포학함을 천하 통치의 시작으로 삼았다. 대체로 천하를 하나로 합친 자는 기만과 무력을 | |
− | + | 높이 여기며 천하를 안정시킨 자는 권력 변화에 순응하는 것으 귀하게 여기니, '''''이것은 얻는 것과 지키는 것은 법도가 다름을 말해준다. | |
+ | '''''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거쳐 천하에 왕 노릇 하면서도 그 도는 바꾸지 않고 그 정치도 개혁하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를 | ||
+ | 얻고 천하를 지키는 것에 차이가 없었던 까닭이다.'''''<ref>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 본기』,민음사, 2012, pp.265~266</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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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죽은 뒤에도, [[진나라]]는 약해지지 않았었다. [[진나라]]를 지켜주었던 관문인 [[함곡관]]도 여전히 건재했었다. 하지만 [[진섭]]([[진승]])이라는 농민의 반란 하나로 인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가의가 다음 그에서 언급하는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란 통일 이전의 정책과 통일 이후의 정책이 달라야 함을 시사한다. 통일을 하지 않았을 상황에는 전쟁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엄격한 법이 강조가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천하가 통일이 된 이후에는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가혹하게 고통받았을 백성들에게 좀 더 인의를 베풀었어야 한다. 하지만 [[진시황]]은 그것을 몰랐다. [[만리장성]]과 같은 토목공사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고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 [[진시황]]이 죽은 뒤에도, [[진나라]]는 약해지지 않았었다. [[진나라]]를 지켜주었던 관문인 [[함곡관]]도 여전히 건재했었다. 하지만 [[진섭]]([[진승]])이라는 농민의 반란 하나로 인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가의가 다음 그에서 언급하는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란 통일 이전의 정책과 통일 이후의 정책이 달라야 함을 시사한다. 통일을 하지 않았을 상황에는 전쟁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엄격한 법이 강조가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천하가 통일이 된 이후에는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가혹하게 고통받았을 백성들에게 좀 더 인의를 베풀었어야 한다. 하지만 [[진시황]]은 그것을 몰랐다. [[만리장성]]과 같은 토목공사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고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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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역사]] |
2016년 6월 27일 (월) 15:01 기준 최신판
진(秦) Q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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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전국시대 전국 칠웅 중의 한 국가이며,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중국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하였다. 현재 중국의 영어 이름인 China의 어원이 되었다. 중국어의 발음은 Qin. 국가의 색은 검은색으로 황제의 의복과 관리들의 복장, 군복, 국기 등이 검은색이었다.
중원의 서부에 위치해 있어서 중원 사람들에게 야만인의 취급을 당했으나 기마민족들의 기마전술과 철기를 다루는 법을 일찍이 받아들여 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진시황의 사후, 2세 황제에 이르러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고 다음의 왕인 진왕 자영에 이르러 항우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통일 이후의 진나라의 정책
진나라는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다. 진시황은 중국에 한민족을 주체로 한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처음으로 성립시킨 셈이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황제(皇帝)라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서 사용하였고, 왕이 죽은 뒤에 칭하는 시호를 폐지하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로 하여 그 뒤는 이세, 삼세 황제로 부르게 하였다.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는 1인칭 단어인 짐(朕)이라는 단어도 만들어 내었다. 또한 (秦)정치,(秦)경제,(秦)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이 제도들을 통해서 진나라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하지만 진시황의 억압적인 통치로 결국 백성들은 불만을 터트렸고 그 결과 진나라는 막을 내리게 된다.
진나라의 멸망
진나라의 군사력은 강성했다, 그러나 진시황의 엄격한 법 집행은 오히려 백성을 탄압하고 박해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지방을 순시하던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짜고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를 살해하고 동생 호해를 진 2세로 즉위시킨다. 그를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려 했던 신하들은 서로 싸우기까지 하게 되었고 진 2세 때에는 정치가 더욱 더 잔혹해졌다. 도처에서 폭동과 반항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사람들은 진나라에 대한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진시황의 과도한 토목 공사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백성들의 많은 희생이 따랐다. 옛 고사에 맹강녀가 결혼한 지 3일 만에 장성을 쌓기 위해 부역을 간 남편을 면회 갔다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얼마나 많이 쏟았는지 쌓아 놓은 장성 10여리가 무너졌다는 말도 있다. 이는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인력이 희생되었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진시황의 법치주의가 나라의 통일과 번영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부작용도 많이 불러일으켰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의 범죄자가 사형을 받게 되면 친족 모두가 사형되는 족주에 처했으며, 한 가족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 전체가 벌을 받는 연좌제도 시행되었다. 이렇게 반진세력이 생겨나고 결국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
기원전 209년 일부 농민들이 어양으로 징발되었다. 그러나 대택향에서 큰비를 만나 기한 안에 어양에 도착할 수 없었는데 진법에 따르면 이것은 사형감이었다. 그러자 이들 중 진승과 오광이 ‘싸우다 죽으나 늦게 가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며 동행자들을 선동하여 호송 관리를 죽이고 난을 일으킨다. 이들의 기세로 대택항을 점령하고 주변에 있는 몇 현의 성마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진승은 스스로 왕이 되어 진에 대항하게 된다. 반진 세력에는 또 귀족 출신의 항우와 평민 출신의 유방이 있었다. 항우는 거록에서 진군과 만나 크게 승리를 거둔다.
위협을 받고 있던 조고는 호해, 즉 2세를 자진하게 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계위시킨다. 황제에 즉위한 자영은 황제라는 칭호를 없애고 자신을 왕이라 낮춘다. 끝으로 유방이 함양을 점령하게 되자 왕위에 오른 지 46일 만에 진나라는 막을 내린다. 비록 국가의 역사가 짧지만 진은 중국 전체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럽식 중국이름인 ‘China’가 진나라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일 뿐이지 진위 여부는 확인된 바가 없다.
평가
가의의 평가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해 매우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다. 사기의 진시황 본기 편의 마지막 부분에는 전한시기 문학가의 가의의 평가를 통째로 인용하는 파격적인 서술을 보인다.
- 진나라가 우세했던 이유는 그동안의 왕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다.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의 국토는 산을 등지고 황하를 두르고 있어 견고하니 사방이 요새인 나라였다. 목공 이래로 진나라 왕(시황제)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왕이 늘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것이 어찌 대대로 현명한 군주 때문이겠는가? 진나라의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이다.[1]"
진나라는 비옥한 땅이 있는 관중지방에 위치해 있었고 함곡관이라는 요새로 인해 공격하기와 수비하기가 용이했다. 효공이 죽고 혜왕과 문왕의 시절,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들이 합종책을 맺고 백만의 군사들을 가지고 진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으나, 함곡관이라는 요새를 넘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진나라가 위치했던 나라의 장소가 어떤 군주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간에 통일을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는 것이 가의의 지적이다. 이러한 가의의 평가는 역사적 서술 방식 중에서 정치나 전쟁사 보다는 지형을 중시하는 아날학파의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 통일 이후의 왕들은 어리석었다.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 시황제는 자신에게 만족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잘못하고도 끝내 변하지 않았다. 이세황제는 그것을 이어받았으므로 이를 고치지 않고 포악하여 화를 가중시켰다. 자영은 외톨이로 가까운 피붙이도 없었으며 위태롭고 약했으나 보좌하는 신하가 없었다. 세 군주는 미혹되었으면서도 죽는 날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패망 또한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2]"
진시황은 늘 오만했고 자신이 늘 옳다는 생각에 신하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진시황에게 지혜로운 신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진시황의 포악한 성격탓에 그 신하들은 소신있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개진할 수가 없었다. 실례로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의 경우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진시황의 정책에 간언하니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파견하여 몽염을 감시하게 만들었다. 이후의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맏아들의 간언도 받아들이지 않은데 다른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진시황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인 호해가 이세황제가 되었을 때는 간신 조고에 의해 나라가 흔들렸으며 지혜로운 선비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자영이 왕이 되었을 때는 그의 곁에는 지혜로운 신하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는 멸망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 통일 이전과 통일 이후의 정책이 달라야 하는데 이를 바꾸질 못했다.
가의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진나라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 다음 글로 운을 떼고 있다.
“무릇 진나라의 천하는 작거나 약해지지 않았고 옹주의 땅도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예전과 같았다. 진섭의 지위는 제나라,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송나라 위衛나라, 중산나라의 군주들 보다 존귀하지 않았다.··. 한 사내가 난을 일으켜 칠묘가 무너지고 천자의 몸이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의를 베풀지 않았고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가 달랐기 때문이다.··.진나라 왕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을 품고는 이기적인 지모를 행하고 공신들을 믿지 않고 선비들과 백성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왕도를 없애고 사사로운 권위를 세워 문서를 금하고 형법을 가혹하게 했으며 기만과 폭력을 앞세우고 인의를 뒤로하여 포학함을 천하 통치의 시작으로 삼았다. 대체로 천하를 하나로 합친 자는 기만과 무력을 높이 여기며 천하를 안정시킨 자는 권력 변화에 순응하는 것으 귀하게 여기니, 이것은 얻는 것과 지키는 것은 법도가 다름을 말해준다.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거쳐 천하에 왕 노릇 하면서도 그 도는 바꾸지 않고 그 정치도 개혁하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를 얻고 천하를 지키는 것에 차이가 없었던 까닭이다.[3]”
진시황이 죽은 뒤에도, 진나라는 약해지지 않았었다. 진나라를 지켜주었던 관문인 함곡관도 여전히 건재했었다. 하지만 진섭(진승)이라는 농민의 반란 하나로 인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가의가 다음 그에서 언급하는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란 통일 이전의 정책과 통일 이후의 정책이 달라야 함을 시사한다. 통일을 하지 않았을 상황에는 전쟁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엄격한 법이 강조가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천하가 통일이 된 이후에는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가혹하게 고통받았을 백성들에게 좀 더 인의를 베풀었어야 한다. 하지만 진시황은 그것을 몰랐다. 만리장성과 같은 토목공사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고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