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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신속하고 간편하게 쓰려는 요구는 문자의 사용과 때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어 일찍이 상대 [[갑골문]]이나 주대 [[금문]]에서도 간략한 자체와 흘려 쓰는 필적을 볼 수 있다. 후한 장제(章帝, 76-88) 때 두도(杜度)는 서첩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장제는 두도에게 초서로 칙령을 작성하도록 하는 등 초서는 매우 중시되던 자체였다. 그러나 초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공식서체는 아니었다. | 문자를 신속하고 간편하게 쓰려는 요구는 문자의 사용과 때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어 일찍이 상대 [[갑골문]]이나 주대 [[금문]]에서도 간략한 자체와 흘려 쓰는 필적을 볼 수 있다. 후한 장제(章帝, 76-88) 때 두도(杜度)는 서첩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장제는 두도에게 초서로 칙령을 작성하도록 하는 등 초서는 매우 중시되던 자체였다. 그러나 초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공식서체는 아니었다. | ||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한흥유초서(漢興有草書)’라고 한 것은 초서가 일종의 서체로 공식화 된 효시가 된다. |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한흥유초서(漢興有草書)’라고 한 것은 초서가 일종의 서체로 공식화 된 효시가 된다. |
2017년 4월 17일 (월) 20:08 기준 최신판
초서의 개념
초서는 한대에 형성되었던 자체(字體)의 일종이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특성에 따라 장초(章草)·금초(今草)·광초(狂草)로 구분하였다.
‘草’자는 고대에는 거칠다·간편하다로 풀이할 수 있었다. 초서의 ‘草’는 대개 이러한 뜻을 취했을 것이다. ‘초서’에는 넓은 뜻과 좁은 뜻의 두 가지가 있다. 넓은 뜻의 초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거칠게 쓴 것은 모두 포함시킬 수 있다. 좁은 뜻의 초서, 곧 일종의 특정한 자체로서의 초서는 한대에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대략 동진(東晉) 시대로부터 당시의 신체(新體) 초서와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한대의 초서를 장초라고 불렀다. 신체 초서는 상대적으로 말하여 금초라고 불렀다.
문자를 신속하고 간편하게 쓰려는 요구는 문자의 사용과 때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어 일찍이 상대 갑골문이나 주대 금문에서도 간략한 자체와 흘려 쓰는 필적을 볼 수 있다. 후한 장제(章帝, 76-88) 때 두도(杜度)는 서첩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장제는 두도에게 초서로 칙령을 작성하도록 하는 등 초서는 매우 중시되던 자체였다. 그러나 초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공식서체는 아니었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한흥유초서(漢興有草書)’라고 한 것은 초서가 일종의 서체로 공식화 된 효시가 된다.
초서의 구분
장초
장초는 예서(隸書)의 기초 위에 형성되었다. 예서가 형성된 뒤 끊임없이 쓰기 편리한 방법이 시도되었는데 이는 초서의 발단이 되었다. 예서를 간결하고 신속하게 쓰기 위한 실용성의 추구는 결국 예서의 특성을 변화시켜 새로운 서체인 장초를 낳았다. 장초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연결은 없고 한 글자 중의 필획이 연결되는 현상을 보이고 예서의 필획 특성이 남아 있는 서체이다. 돈황(敦煌)의 한간(漢簡)이나 거연(居延)에서 출토된 거연한간 초서(漢 成帝 2년)는 필획이 연결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는 장초의 특징이다. 후한 이후 이러한 민간에서 유행한 초서는 서예가들의 노력으로 엄격한 규범이 형성되어 황제에게 올린 상서에도 사용할 정도가 되었다. 사유(史游)의 <급취편(急就篇)>의 자체를 대표로 꼽는다. 장초는 <급취장(急就章)>의 ‘章’에서 연유되었을 뿐 아니라 ‘章’자에는 조리·법칙이라는 의미가 있어 금초보다는 규범적이라는 뜻에서 장초라고 하였다.
금초
해서(楷書)가 만들어진 후 해서의 기초 위에 또 흘려 쓰는 초체(草體)가 형성되었는데, 여기서는 필획 간의 연결은 물론 위아래 글자와도 연결되는 현상을 보여 예서 필획의 특성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러한 형체를 금초라 한다. 금초는 한나라 말 장지(張芝)에게서 발아하여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에 이르러 최고봉을 이루었다. 진대(晉代) 이후 서예가들은 해서나 행서에 근거한 초서를 쓰게 되면서 그 근원이 다원성을 띠게 되어 수많은 초서이체를 보여주고 있다. 후한시대 초서이면서 예서체가 짙은 <공양전전(公羊傳磚)>은 일반인들이 즐겨 쓰던 서체이다. 일명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라고도 하는 유가 경전 중의 하나로 구전되어 오다가 한초(漢初)에 이르러서 금문경학자들이 정치이론을 펴기 위해 글로 써 놓았다. 전국 진한시대 유가사상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 이 전은 초서이면서 예서풍을 보이며 음각되어 있다. 후한시대 서법 예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광초
광초는 전혀 구속이 없이 자유분방한 필세의 초체를 말한다. 광초는 당대의 장욱(張旭)의 <두통첩(肚痛帖)>에 이르러 실용성을 완전히 벗어나 예술의 경지로 돌입한다. 따라서 난해하고 실용성이 결여된 탓에 단지 서예가들의 전유물이 되어 서법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송대 황산곡(黃山谷)의 <이백의구유시(李白憶舊遊詩)>는 광초의 걸작이다.
위에서 살펴본 각 초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체 | 구분 | 주요특징 | 바탕서체 |
---|---|---|---|
초서 | 장초 | 한 글자 중 필획이 연결됨 | 예서 |
금초 | 한 글자 및 글자간의 필획까지 연결됨 | 해서 | |
광초 | 자유분방한 초서체 |
초서의 형성원리
(1) 자형의 일부분을 생략하였다.
예컨대 ‘時’는 로 되어 ‘寺’방의 윗부분을 생략하였다(간화자(또는 간체자) ‘时’는 초서의 해화자(楷化字)로 볼 수 있다). ‘慰’는 로 되어 왼쪽의 오른쪽 아랫부분을 생략하였다. ‘盧’는 로 되어 중간 부분을 생락하였다(초서 ‘虍’방은 로 되고, ‘皿’방은 으로 되었다). ‘尙’은 으로 되어 왼쪽의 한 세로 획을 생략하였다.
(2) 필획을 생략하고 병합하여 자형의 윤곽을 보존하거나 혹은 점·획으로 자형의 일부분을 대체하였다.
예컨대, ‘長’은 으로 되고, ‘爲’는 로 되고(간화자 ‘长’ ‘为’는 모두 초서의 해화자이다.), '疆' 으로, ‘君’은 으로 되고, ‘論’은 으로 되었다(간화자 ‘论’도 역시 초서의 해화자로 볼 수 있다).
(3) 필법을 개변하였다. 초서는 빨리 쓰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럽게 예서의 필법을 개변시켰다. 예컨대, 예서의 비교적 긴 삐침[撇]은 꼬리 부분이 좀 굵고, 초서의 삐침은 꼬리 부분이 일반적으로 뾰족하다. 예서는 기본적으로 단지 만필(彎筆)만을 사용하고, 갈고리[鉤]를 사용하지 않으며 구부림이[彎]이 일반적으로 매우 완만하게 돌지만, 초서의 구부림은 매우 빠르게 돌아서 어떤 전절(轉折) 이후의 일부의 비교적 짧은 만필은 간화하여 갈고리를 가진 필획으로 되었다. 예컨대 예서의 宀·冖 등의 편방 중의 꺾임은 초서에서 대부분 로 변하였다. 이러한 필법은 후에 행서로 흡수되고 아울러 해서의 딱딱한 갈고리로 발전되었다. 초서의 가로획은 도법(挑法)을 사용한 것은 팔분보다 적고, 점과 누름[捺] 등의 필획의 서사법도 역시 모두 예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밖에, 초서에는 또 연필(連筆)을 대량으로 사용하였다. 예컨대, 위에서 든 '時' 자의 제2필 와 '慰'자의 제1필 이 그것이다. 어떤 글자들은 심지어 하나의 필획으로 쓸 수 있었다. 예컨대 (卿), (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금초와 비교한다면 장초에서 사용하는 연필은 아직 적다고 할 수 있다. 장초는 매 글자마다 스스로 처음과 끝이 갖추어 있는데, 이것은 금초의 글자와 글자가 때때로 서로 구련(鉤連)되는 상황과는 또한 같지 않은 것이다.
참고문헌
- 양동숙, 『중국문자학』, 2015, 차이나하우스, pp180-183
- 구석규, 『중국문자학의 이해』, 2010, 신아사, pp163-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