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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周)나라는 전통적으로 봉건적 국가라고 불려 왔는데, 그 귀족제 하에 있는 도시국가군이 집합한 것이 | + | 주(周)나라는 전통적으로 봉건적 국가라고 불려 왔는데, 그 귀족제 하에 있는 도시국가군이 집합한 것이 [[춘추]]의 국가이다. 도시국가의 특색은 제정일치, 즉 제사를 행하는 자와 정치를 행하는 자의 일치, 즉 서구에서 말하는 신정국가다. 그러므로 국가의 지도원리는 종교적 관습 위에 입각한 예(禮)라는 질서였기에 도시국가는 각기 부족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종교적 권위에 의해 국가를 지배했다. 따라서 춘추 때까지 도시국가는 서로 패권을 겨루는 전쟁을 했지만, 본래 종교적 권위에 의해 국가가 섰기 때문에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다. <br> |
+ | 그러나 이처럼 정치적인 현상이 종교에 기초하고 있다는 신념이 희박해짐에 따라 점차 스스럼없이 타국을 멸망시켜 나갔다. 이러한 경향이 강해지고 멸망과 탈취가 대규모로 행해진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다. | ||
===형성과정=== | ===형성과정=== | ||
− |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권위가 몰락하고 그 자리에 강력한 군사력을 쥔 패자(覇者)가 등장하여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 즉 [[춘추오패]](제(齊), 진(晉), 초(楚), 오(吳), 월(越))는 춘추 말기가 되자 북의 진(晉), 남의 초(楚)가 그 권세를 잃게 되고 양쯔강 하류의 남쪽에 오, 월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급부상하게 된다. 북의 진은 초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고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했고 이렇게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고사가 탄생한 [[오월전쟁]]이 발생, 수년간 되풀이되었다. 그 결과 오왕 부차가 패하여 오는 멸망하고 이후 월 역시 쇠망한다. 한편 북의 진(晉)은 내부의 분열로 조(趙), 위(魏), 한(韓) 3씨가 진을 3등분하고 주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는다. 이후 위(魏)가 강력해지고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과 연(燕)이 강대해져 세력을 팽창했다. 이렇게 비로소 중원은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진]](秦) 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 + |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권위가 몰락하고 그 자리에 강력한 군사력을 쥔 패자(覇者)가 등장하여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 즉 [[춘추오패]](제(齊), 진(晉), 초(楚), 오(吳), 월(越))는 춘추 말기가 되자 북의 진(晉), 남의 초(楚)가 그 권세를 잃게 되고 양쯔강 하류의 남쪽에 오, 월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급부상하게 된다. <br> |
+ | 북의 진은 초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고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했고 이렇게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고사가 탄생한 [[오월전쟁]]이 발생, 수년간 되풀이되었다. 그 결과 오왕 부차가 패하여 오는 멸망하고 이후 월 역시 쇠망한다. <br> | ||
+ | 한편 북의 진(晉)은 내부의 분열로 조(趙), 위(魏), 한(韓) 3씨가 진을 3등분하고 주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는다. 이후 위(魏)가 강력해지고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과 연(燕)이 강대해져 세력을 팽창했다. 이렇게 비로소 중원은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진]](秦) 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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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듯 춘추말기부터 주 왕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그 역할을 상실하여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진(秦) 7대 제후들은 자신들을 왕(王)이라 칭하였다. 또한 이들은 겸병 전쟁을 대규모로 전개하여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로 이끌었으며 이 일곱 대 제후국을 ‘전국7웅’이라고 부른다. 이 | + | 이렇듯 춘추말기부터 주 왕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그 역할을 상실하여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진(秦) 7대 제후들은 자신들을 왕(王)이라 칭하였다. 또한 이들은 겸병 전쟁을 대규모로 전개하여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로 이끌었으며 이 일곱 대 제후국을 ‘전국7웅’이라고 부른다. <br> |
+ | 이 가운데 [[진]](秦)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후 국력이 신장하여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전국시대는 전국7웅을 중심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진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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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미야자키 이치시다, | + | * 미야자키 이치시다, 『中國史』, 조병한 역, 역민사, 1983 ISBN 89-85154-07-9 |
− | * 신승하, | + | * 신승하, 『중국사上』,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ISBN 89-378-3078-7 |
− | * 진순신, | + | * 진순신, 『중국의 역사 2.춘추전국시대』, 권순만 역, 한길사, 1995, ISBN 89-356-1010-0-04900 |
− | * 가이즈카 시게키, 이토 미치하루, | + | * 가이즈카 시게키, 이토 미치하루, 『중국의 역사-선진시대』, 배진영 역, 혜안, 2011, ISBN 978-89-8494-398-8 |
− | * 종청한, | + | * 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임태홍 역, 무우수, 2007 ISBN 978-89-91334-12-0 |
− | * 임건순, | + | * 임건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978-89-74836-80-1 |
− | * 공원국, | + | * 공원국,『춘추전국이야기-합종연횡』, 역사의 아침, 2000, ISBN 978-89-93119-86-2 |
− | * 문승용, | + | * 문승용,『중국역사와 문화 들여다보기』,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12, ISBN 978-89-74647-44-5 |
− | * 풍국초, | + | * 풍국초,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중국 상하 오천년사』, 신원문화사, 2005, ISBN 89-359-1287-5 |
− | * 신성곤, 윤혜영, | + | *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ISBN 89-7483-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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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0일 (토) 00:24 판
전국시대(戰國時代)는진(晉)의 3분을 기점으로 하는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전국이란 이름은 전한(前漢) 시대의 유향이 이시기의 역사를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취하였다고도 하며, 여러 제후국이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전국시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전국칠웅
배경
주(周)나라는 전통적으로 봉건적 국가라고 불려 왔는데, 그 귀족제 하에 있는 도시국가군이 집합한 것이 춘추의 국가이다. 도시국가의 특색은 제정일치, 즉 제사를 행하는 자와 정치를 행하는 자의 일치, 즉 서구에서 말하는 신정국가다. 그러므로 국가의 지도원리는 종교적 관습 위에 입각한 예(禮)라는 질서였기에 도시국가는 각기 부족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종교적 권위에 의해 국가를 지배했다. 따라서 춘추 때까지 도시국가는 서로 패권을 겨루는 전쟁을 했지만, 본래 종교적 권위에 의해 국가가 섰기 때문에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적인 현상이 종교에 기초하고 있다는 신념이 희박해짐에 따라 점차 스스럼없이 타국을 멸망시켜 나갔다. 이러한 경향이 강해지고 멸망과 탈취가 대규모로 행해진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다.
형성과정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권위가 몰락하고 그 자리에 강력한 군사력을 쥔 패자(覇者)가 등장하여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 즉 춘추오패(제(齊), 진(晉), 초(楚), 오(吳), 월(越))는 춘추 말기가 되자 북의 진(晉), 남의 초(楚)가 그 권세를 잃게 되고 양쯔강 하류의 남쪽에 오, 월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급부상하게 된다.
북의 진은 초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고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했고 이렇게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고사가 탄생한 오월전쟁이 발생, 수년간 되풀이되었다. 그 결과 오왕 부차가 패하여 오는 멸망하고 이후 월 역시 쇠망한다.
한편 북의 진(晉)은 내부의 분열로 조(趙), 위(魏), 한(韓) 3씨가 진을 3등분하고 주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는다. 이후 위(魏)가 강력해지고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과 연(燕)이 강대해져 세력을 팽창했다. 이렇게 비로소 중원은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진(秦) 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결과
이렇듯 춘추말기부터 주 왕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그 역할을 상실하여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진(秦) 7대 제후들은 자신들을 왕(王)이라 칭하였다. 또한 이들은 겸병 전쟁을 대규모로 전개하여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로 이끌었으며 이 일곱 대 제후국을 ‘전국7웅’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진(秦)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후 국력이 신장하여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전국시대는 전국7웅을 중심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진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전국시대 개요
정치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전쟁은 만연하였고 각 국가는 군사적 힘을 키우는 것이 필수불가결했다. 이에 따라 군국주의(軍國主義) 정책을 썼고, 제후들은 능력있는 인재들을 등용해서 나라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관료제(官僚制)가 등장하였으며, 새로 얻은 땅을 제후가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가 나타났고, 국가가 백성을 직접 지배하려는 제민지배(齊民支配)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전국시대에는 혈육중심의 씨족공동체가 해체되고 왕의 중앙집권적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사(士)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이게 된다. 정치와 군사가 분리되고 군주가 각 분야의 책임자를 임명하여 선출했다. 그러므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장군이라는 직위가 새로 등장하여 전쟁을 할 때마다 군주가 장군을 임명하였다. 농민이나 일반 백성들 가운데 병사를 징집하기 시작하여 군사 확보에 중점을 두었고 전차군에서 보병으로 변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물리적인 전쟁뿐만 아니라 외교정책도 매우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였다. 소진의 합종책(合從策), 장의의 연횡책(連衡策), 원교근공책 등의 외교정책을 통해 거대한 진나라와 다른 국가들 간의 첨예한 대립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군주권 강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났으며 이회(李悝)의 중국 최초의 성문법, 농지개발과 신 재정정책, 오기(吳起)의 토지개혁과 신법제, 상앙의 변법이라는 혁신정책에 의해 법체계가 확립되었다.
사회
전국시대에는 주왕(周王)의 권위가 급격하게 하락하였고, 각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독립을 하여 제각기 왕을 칭하기 시작하였다. 약한 제후는 강한 제후에게 잡아먹히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이며, 하극상을 다반사로 여기는 시대였다. 때문에 제후국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더욱 강성해지기 위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야만 했다. 평민 가운데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재상이나 장군이 되는 포의장상(布衣將相)의 국면을 열게 되어 귀족 계급이 약화되었고, 평민들의 정치 참여가 많아 졌으며, 귀족이 아닌 평민들에게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각국의 국군들이 인재를 다투어 초빙하는 풍조로 인해 능력이 있는 사람은 각국의 국군을 찾아가 각자 나름대로의 부강의 법을 설파하면 관직을 얻고 후한 봉록(俸祿)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출신의 재상, 즉, 객경(客卿)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여불위(呂不韋), 장의(張儀), 상앙(商鞅) 등이 있다.
제후국 사이에는 자기 소유의 영토 개념이 나타나면서 국경이 명확해지고 본격적으로 영토국가(領土國家)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작은 촌토(寸土)라도 소유하려고 했으며, 이를 직접 관할하기 위해 중앙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강한 자만 살아남고 약한 자는 몰락하여 전쟁이 끊이질 않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서로 빼앗고 뺏기는 풍조가 만연하였고, 이에 따라 의협심이 강한 자객(刺客)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의로운 일에 자기의 생명을 던지려고 했기 때문에 ‘의사(義士)’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인물은 형가(荊軻)로, 연의 태자 단(旦)의 부탁을 받고 진왕을 칼로 찔러 죽이려다 실패하였다. 유협들은 후에 그룹을 지었고 그 중 우두머리를 호협(豪俠)이라고 불렀다.
경제
토지의 사유화가 허락되면서 대토지 소유자가 등장했으며 귀족에게 예속되었던 상공업이 자유롭게 영위되면서 대상인이 등장했다. 이들은 지조를 받고 타인에게 경작시켰으며 농사법에 있어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우경법(牛耕法)을 바탕으로 철제 농구를 사용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또 심경법(深耕法)이 도입되어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심지어 말을 이용하는 마경(馬耕)도 일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관개의 장려 또한 농업의 발전을 더욱 촉진 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경작 방법의 개선으로 인해 토양을 구분하여 비료를 사용하였으며, 분뇨 이외에 풀과 불에 탄 나무의 재를 적당히 배합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이처럼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지고 생산 관계에 변화가 나타나 부세(賦稅)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원래 병역이나 군부(軍賦)는 국인의 부담이었으나, 전쟁이 빈번해지고 그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야인에게도 부과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인과 야인의 구별이 점차 모호해지고 토지의 사유화 추세가 더욱 발전되었다.
철기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 기술의 개량은 수공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소금, 야철, 칠기 등의 신흥 수공업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철제 공구가 다양해지면서 서서히 청동제를 대체했다. 그 외에도 제련업, 제도업, 제염업, 칠기 도예 등의 다양한 분야의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농업의 부업으로서 자리 잡아 가정 수공업 이외에 관영과 민영 수공업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은 상업과 도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에 따라 화폐도 대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교통이 발달됨에 따라 각 나라간의 무역이 발달 했다. 하지만 여러 제후들이 할거 하고 있어 상업 발달의 장애 요인이 되었으며 자급자족의 자연 경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춘추시대 후기부터 철기의 보급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철기의 보급으로써 철제 농기구가 사용, 보급되었고 금속화폐의 주조와 보급이 이뤄졌다. 철기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돌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했다. 철기 농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고 잉여 생산물의 양이 늘어났다. 그로 인해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의 성장에도 영향을 끼쳐 전반적인 경제력이 성장했다. 경제력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읍 공동체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발생했다. 이들을 장악하여 세역과 군역을 부과함으로써 직접 지배의 통치 형식을 갖출 수 있었다.
금속 화폐는 춘추시대부터 주조되기 시작하여 전국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금속 화폐의 주재료는 청동이었으며 초기에는 대도시 상인들이 주조했으나 후에는 제후국이 직접 나서 주조했다. 화폐는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대도시에서 주로 주조되었다.
진나라는 철기 보급을 이용해 전국시대를 통일했다. 생활에 필수적인 철제 농기구를 국가가 직접 생산하고 백성들에게 판매했다. 이로써 백성들에게는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하고 백성들의 잉여 생산물을 국가로 유입시켜 국가 재정을 증대시켰다. 또한 화폐를 주조하여 통용함으로써 국가가 풍흉에 따라 화폐 공급을 조작하고 잉여 생산물을 국가 재정으로 회수해 국가 재정을 증대시켰다. 진나라는 이렇게 늘린 국가 재정을 병사를 징발하고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데 사용했다. 강력해진 군사력을 기반으로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했다.
문화
전국시대의 문화는 제자백가와 철기문화 두 가지를 가장 주목해 볼 만 하다.
전국시대 군주들은 자신의 부국강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인재가 필요했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다수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민간교육이 등장하였으며 대표적인 예로 공자와 묵자의 학단이 있다. 이들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상을 제자들에게 자유롭게 전달하였고, 그 제자들은 다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이러한 인재들을 양성하였는데, 제 선왕이 전국 각지의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직하학궁(稷下學宮)을 만들어 자유로운 학문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를 '제자백가’라고 부른다.
제자백가에서도 주류를 이루었던 사상은 인도주의의 유가, 엄벌주의의 법가, 겸애와 비공론을 주장하는 묵가이다. 도가는 당시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제후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참고문헌
- 미야자키 이치시다, 『中國史』, 조병한 역, 역민사, 1983 ISBN 89-85154-07-9
- 신승하, 『중국사上』,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ISBN 89-378-3078-7
- 진순신, 『중국의 역사 2.춘추전국시대』, 권순만 역, 한길사, 1995, ISBN 89-356-1010-0-04900
- 가이즈카 시게키, 이토 미치하루, 『중국의 역사-선진시대』, 배진영 역, 혜안, 2011, ISBN 978-89-8494-398-8
- 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임태홍 역, 무우수, 2007 ISBN 978-89-91334-12-0
- 임건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978-89-74836-80-1
- 공원국,『춘추전국이야기-합종연횡』, 역사의 아침, 2000, ISBN 978-89-93119-86-2
- 문승용,『중국역사와 문화 들여다보기』,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12, ISBN 978-89-74647-44-5
- 풍국초,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중국 상하 오천년사』, 신원문화사, 2005, ISBN 89-359-1287-5
-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ISBN 89-7483-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