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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뒤를 이은 한 무제는 추은령(推恩令)을 실시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시작하였다. 기존에는 제후가 죽으면 적장자가 그 자리를 계승했는데, 추은령 반포 후 적장자 외의 아들들도 토지를 물려받고 제후가 되었다. 이는 결국 기존 봉건국의 세력이 쪼개어지면서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제후들이 종묘 제사에 바치는 황금의 양이 부족하거나 기준에 미달하면 작위를 거두는 등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켰다. 제후가 기존의 정치 권력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자 漢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갔다. | :경제의 뒤를 이은 한 무제는 추은령(推恩令)을 실시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시작하였다. 기존에는 제후가 죽으면 적장자가 그 자리를 계승했는데, 추은령 반포 후 적장자 외의 아들들도 토지를 물려받고 제후가 되었다. 이는 결국 기존 봉건국의 세력이 쪼개어지면서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제후들이 종묘 제사에 바치는 황금의 양이 부족하거나 기준에 미달하면 작위를 거두는 등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켰다. 제후가 기존의 정치 권력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자 漢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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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고조는 통일 후 제후를 관동의 봉국에 분봉하였으나, 수도와 근기지역을 중심으로는 군현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수립하였다. 중앙정부의 조직과 구조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으로 되어있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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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의 최고 직위는 삼공(三公)으로 태위(太尉)와 승상(丞相) 그리고 어사대부(御史大夫)가 있다. 승상(丞相)은 국가 일반 행정의 최고책임자이다. 황제의 지시를 받아 조의(朝議)를 주재하고 황제의 정책수립과 결정을 보필하였다. 승상(丞相)의 지위는 황제 다음이며, 관료의 최고 수반이었다. 어사대부(御史大夫)는 상승 다음의 고위관리였다. 주요 직무는 관료에 대한 감찰이었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전국 모든 관료들의 업무자체를 감독하였고, 비행이 있으면 적발하여 탄핵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는 또한 부승상(副丞相)으로서 승상을 보필하기도 하였으며, 황제의 비서로서의 역할도 컸다. 태위(太尉)는 군사를 담당하였는데, 한 고조의 친구였던 노관(盧綰)이 처음에 태위(太尉)로 임명되었었다. 후에 武帝때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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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3일 (금) 01:21 판
역사
통치체제
통치사상
秦의 실패
법가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지닌다. [인구가 증가해 거대 사회의 출현하고 이 때문에 사회를 관리할 公적 질서의 필요성이 증가한다. 이는 군주와 관료의 출현을 가져오고 公적 질서는 군주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법의 지배 아래 살아감으로써 유지된다.] 하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 公을 君權으로 보아 군주 개인이 입법권을 행사함으로써 군주가 법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군주가 대단히 뛰어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주가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결국 법은 군주 개인을 위한 것이 된다. 결국 법위에 선 권력자들의 仁義없는 권력욕과 물욕이 秦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秦의 멸망 원인에 대한 인식은 漢나라에서 새로운 통치방법에 대한 필요성을 불러 일으켰다.
황로사상
국가유교
통치구조
군현제
- 한 고조는 건국 초기 수도인 장안과 그 근기 지방에 대해서는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관동 지역에는 제후를 분봉하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혼합 형태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제후들은 통치 지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리하였으며 한의 율령에도 예속되지 않았다. 초기 한 왕실이 직접 장악한 군은 서부지역의 15개 군이었고, 관동 지역에 10개의 세습 왕국이 존재하였다.
-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향한 황제의 야욕은 분명했으며, 정국이 안정되자 반란의 혐의를 씌워 이성제후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제후의 자리는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는데, 고조 말기 제후국 장사국 하나만이 유일한 이성 제후로 남아있었다.
- 경제 때 조조는 경제와 함께 삭번책을 추진한다. 삭번책이란 동성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영지 삭감책으로, 이것은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된 제후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오초칠국의 난을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 왕실과 다른 제후국들의 도움으로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그 후 제후왕의 지위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 경제의 뒤를 이은 한 무제는 추은령(推恩令)을 실시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시작하였다. 기존에는 제후가 죽으면 적장자가 그 자리를 계승했는데, 추은령 반포 후 적장자 외의 아들들도 토지를 물려받고 제후가 되었다. 이는 결국 기존 봉건국의 세력이 쪼개어지면서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제후들이 종묘 제사에 바치는 황금의 양이 부족하거나 기준에 미달하면 작위를 거두는 등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켰다. 제후가 기존의 정치 권력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자 漢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갔다.
관제
한 고조는 통일 후 제후를 관동의 봉국에 분봉하였으나, 수도와 근기지역을 중심으로는 군현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수립하였다. 중앙정부의 조직과 구조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으로 되어있었다.
중앙의 최고 직위는 삼공(三公)으로 태위(太尉)와 승상(丞相) 그리고 어사대부(御史大夫)가 있다. 승상(丞相)은 국가 일반 행정의 최고책임자이다. 황제의 지시를 받아 조의(朝議)를 주재하고 황제의 정책수립과 결정을 보필하였다. 승상(丞相)의 지위는 황제 다음이며, 관료의 최고 수반이었다. 어사대부(御史大夫)는 상승 다음의 고위관리였다. 주요 직무는 관료에 대한 감찰이었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전국 모든 관료들의 업무자체를 감독하였고, 비행이 있으면 적발하여 탄핵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는 또한 부승상(副丞相)으로서 승상을 보필하기도 하였으며, 황제의 비서로서의 역할도 컸다. 태위(太尉)는 군사를 담당하였는데, 한 고조의 친구였던 노관(盧綰)이 처음에 태위(太尉)로 임명되었었다. 후에 武帝때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제도
사회 구조
관료 등용
조세수입 확보수단
한 무제는 즉위 후 흉노족에 대해 기존의 화친 노선을 버리고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흉노와의 전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며, 문제와 경제 때 이루어 놓은 막대한 국부가 점차 소진되어갔다. 이에 문제는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각종 정책을 실시하였다. 주요한 정책으로 소금과 철의 전매와 평준균수법이 있다.
소금 전매
인간 생존의 필수품이자 식품보관 및 조미료로 활용되는 소금을 국가에서 판매를 독점하였다. 전국에 36곳의 염관을 설치하고 소금의 생산, 운송, 판매의 각 단계에서 세금을 징수하였다.
철의 전매
한 대에 들어서는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농기구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철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민중들에게 철제농기구는 필수품이었는데, 국가에서는 48곳의 철관을 설치해 철의 생산과 운송, 판매를 독점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평준균수법
재정 확충을 위해 한 무제는 평준법과 균수법을 시행하였다. 평준법은 상품의 가격이 저렴할 때 매입하여 가격이 오르면 내다팔아 그 차익으로 재정을 확충하는 정책이고, 균수법은 각 지방의 산물들을 조세로 징수하고 이를 다른 지방에 판매함으로써 재정을 확충하려한 정책이다.
외교
흉노와의 외교정책
한대에 특히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은 흉노였다. 진의 시황제 때 음산의 북방으로 쫓겨난 흉노는 진과 한과의 교체기를 틈타 다시 세력을 만회했다. 유방이 장성의 이남에서 초를 물리치고 한제국을 건설하자 한과 흉노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B.C 201년에 유방의 군대는 산서성 대동에서 흉노의 대군에 포위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치욕을 당했다. 이후 한의 고조 유방은 흉노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화친 정책을 추진했다. 무제가 즉위하고 나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자, 경제력 회복과 발전으로 인한 풍부한 재정을 기반으로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강경책으로 전환하고 대흉노작전을 펼쳤다. 무제는 한대 초기부터 오랫 동안 계속되오던 흉노와의 굴욕적인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군신선우를 유인해내어 모살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흉노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원제 때에는 호한사 선우가 한에 화친을 요구하였고, 한에서는 궁녀 왕소군이 자원해 그녀를 호한사에게 출가시켰다. 이로 인해 전한 말까지 한과 흉노의 관계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왕망 때 흉노의 재침을 받았다. 왕망정권 때에 이민족에 대한 처우를 강등했기 때문에 흉노는 격분해 이반했고, 이후 우호관계는 단절되고 중국을 다시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한 초인 48년 흉노에서 다시 내부분열이 발생해 일축왕비가 자립해 호한야선우라 칭하고 여러 부족을 이끌고 한에 항복했다. 후한에서는 이들 남흉노를 장성의 이남에 거주토록 하고 그들의 북흉노 공격을 지원했다. 븍흉노는 선비족과 정령에게 쫓기다가 91년에 오르콘강의 서쪽 본거지를 버리고 이리지방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남흉노는 한에 귀부하고, 북흉노만이 한의 변방을 괴롭혔는데, 화제 영원 원년에 두헌이 흉노를 쫓아내었다. 그 후 북흉노는 유럽으로 이동하였고 남흉노는 훗날 5호난화의 화근이 되었다.
실크로드
무제는 월지국이 흉노에게 패했다는 정보를 얻게 되자, 그들과 연합하여 흉노를 칠 계획으로 낭관인 장건을 사자로 월지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월지에 파견된 장건과 그의 일행은 즉각 흉노에게 잡혀 10여 년간 억류되었다. 이 동안에 그는 흉노 여성을 아내로 맞아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탈출하여 수십 일만에 대월지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하를 속국으로 삼아 번영한 이 나라는 흉노와 싸울 의지가 없었으므로 장건은 1년 남짓한 체류 후에 타림 분지의 남쪽을 거쳐 귀로에 올랐다. 거기서 그는 다시 한번 흉노에게 붙잡혀 1년간 억류되었지만 내분을 이용하여 126년에야 가까스로 창안에 돌아왔다. 장건의 목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로 인해 서역의 사정이 중국에 알려졌다. 서역에는 36국이 있었는데 이들 국가들이 연결되는 길을 통하여 중국과 서역의 문물이 교류되었다. 중국의 비단이 서쪽으로 운반되었고, 서역의 특산인 포도와 석류 등은 물론 인도의 불교도 이 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전해 왔다. 바로 이 길은 비단길, 또는 실크로드라 부른다.
사회
호족의 등장
전한 무제 이후 소농민들이 살아가던 향리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한 초 당시의 농민들의 생계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자연적인 재해와 세역의 부담이 여전했기 때문에, 토지나 가옥을 저당 잡히기도 하고 자식을 노비로 파는 경우마저 생겼다. 여기에 소제 이후 지방의 유력계층인 호족이 등장해 자립적인 소농민의 기반을 더욱 잠식했다. 특히 무제시기의 신재정정책으로 인해 상업활동이 침체되어 불황을 초래했고, 이 여파가 소농민의 생계를 위협했다. 결국 전통적인 향리사회는 붕괴되고 변질되었다. 향리의 부로는 덕망 있는 인사가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자산을 갖춘 호족 중에서 선발되었고, 이에 소농민의 대부분은 몰락했다. 소농민이 몰락해 간 반면 이들이 잃어버린 토지를 집적하는 대토지소유자가 등장했는데 이러한 대토지소유자를 일반적으로 호족이라고 한다. 이로써 진, 한을 지탱해주던 제민지배체제가 붕괴되고 호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체제의 길로 접어들었다. 호족의 등장으로 빈부의 격차는 심해져 갔고, 이들의 확대에 대한 대처가 전한정권의 중요한 과제였다. 따라서 애제 때에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이 입안된 바 있고, 왕망 때에는 왕전제가 반포되었다. 그러나 호족의 지지를 얻은 후한왕조가 재건되면서 이들에 의한 대토지소유는 더욱 심해졌다.
문화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왕소군
인물 설명
한나라 원제 때의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중국의 ‘4대 미녀 ’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원제의 궁녀로 있다가 후에 흉노의 선우 였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 처가 된다.
이름은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이며, 훗날 태조 문황제 사마소 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불리기도 했다.
생애(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한궁추의 내용을 중심으로)
생애 (가장 대중적인 한궁추를 중심으로)
한 원제는 모연수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모집한다. 왕소군이 궁녀로 발탁되었으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내내 냉궁에 있다가 우연히 원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하라고 명한다. 모연수가 흉노에 투항하여 왕소군의 미인도를 선우에게 바치자 선우는 왕소군을 요구하며 화친을 제안한다. 원제는 전쟁을 불사하지만 신하들이 화친을 주장하여, 결국 왕소군은 흉노 땅에 보내진다. 원제와 이별한 왕소군은 원제를 위해 술을 뿌리고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호한야선우는 충절에 감동하여 장례를 치를 후 모연수를 한나라로 보내고, 원제가 끝내 그를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에서 ‘한서’라고 할 수 있다.
경녕(竟寧) 1년(33년) 선우는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물품]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비단,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하사하였다. 선우가 매우 기뻐하였다. (한서-「흉노전」)
앞서 말했듯이 정말 간결하다. 텍스트의 주체는 원제, 선우 두 명으로 왕소군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물론, 왕소군 그녀가 흉노로 감으로써 한과 흉노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이것은 그녀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뒤의 -『후한서』는 그 양상이 상이하다.
왕소군은 자가 장으로 남군사람이다 이전 원제의 치세(BC 43-33)에 양가자로 선발되어 액정으로 들여졌다 당시 호한야선우가 내조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궁녀 다섯 명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황제를 보지 못하여 슬픔과 원망에 싸여 이에 액정령(직책)에게 흉노로 가고 싶다고 청구하였다. 호한야선우가 큰 연회에 참석하여 연회를 마치고 떠날 즈음 황제는 다섯 여인을 불러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왕소군은 풍려한 외모에다가 단장을 하고, 치장을 하니 한궁에서도 빛나게 돋보였고 그녀가 뒤돌아볼 때는 옷이 치렁치렁하게 돌아가는 광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움직일 정도였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서크게 놀라서 속으로는 그녀를 궁중에 남겨두고 싶었으나 신뢰를 잃을까 걱정하여 마침내 그녀를 흉노에게 주었다. (後漢書-「南匈奴列傳」)
반면, 『후한서』에는 왕소군이 주체가 되며, 그녀의 의지로 흉노에 간 것으로 제시된다. 이는 ‘양가자(良家子,’라는 어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양가자’는 ‘청빈한 농민 집안의 자제’라는 뜻으로 왕소군이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역사서인 『후한서』는 평민이라는 지위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여성의 지위는 높아졌으나, 아직도 왕소군이라는 여성이 한과 흉노 사이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여성학적으로 높게 평가될 변화는 아니다. 그리고 따라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서』, 『후한서』 와 같은 문학 작품이 아닌 역사서들이 그 내용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한서』가 후한 시대에 쓰였고, 『후한서』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송(宋)에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혹은 사(史)관의 개인적 의견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라 볼 수 있는 『한서』와 왕소군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다른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리텔링
다음은 문학작품에서의 ‘리텔링’이다.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
그리고 왕소군이 문학작품으로서 갖는 의의는 왕소군에 대한 문학이 『한서』, 『후한서』의 내용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위에 제시한 왕소군의 생애는 ‘한궁추’가 현재 세상에 알려진 왕소군의 이미지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텍스트이므로 ‘한궁추’에 그 바탕이 있다. 하지만 '한궁추'는 리텔링된 것이고 문학 작품이라는 점에서 허구성이 있다.)
서경잡기에서의 리텔링
왕소군에 대한 초기의 문학은 『서경잡기([西京雜記])』로 추정된다.
왕소군은 16세의 나이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원제 때인 BC38년에 전국의 미녀를 선발하여 후궁으로 보충토록 명을 내렸기 때문에 아마 왕소군도 이 시기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궁녀가 많아 황제는 화공의 그림을 통해 궁녀들의 외모를 평가했다. 하지만 왕소군은 가난한 출신으로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고, 그녀의 얼굴은 못나게 그려져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후에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여 한나라의 미녀를 구해 그 비로 삼겠노라고 요구했고, 원제는 그림(그림을 그린 화공은 모연수라는 설이 있다.)에 의거하여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소군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원제는 그녀의 미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며, 행동거지 또한 한아함을 알게 되었다. 원제는 후회스러웠지만 흉노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터라 다른 궁녀로 바꿀 수 없었다. 이에 그 일을 철저히 따져 화공들 모두 기시(죄인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형벌)에 처하고 화공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재산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그녀가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떨어지고,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호한야 선우의 처로서 살았다고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위의 한서, 후한서와 다른 점은 화공이라는 관료층이 등장하고, 왕소군(평민층)이 보다 주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나라 사회의 계층 간 장벽이 두껍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료층인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평민)은 평민층에게 희열의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유학자인 유흠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직 종이의 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저자인 유흠이 대중성을 위해 『서경잡기([西京雜記])』를 지었다고 추측할 수 없다.
반대로 이는 당시의 지식인·지배층을 위한 문학으로 보이는데, 흉노에 대한 한의 거부 이데올로기라 볼 수 있다.(이민족은 한나라 이전의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부터 거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왕소군이라는 평민 출신의 여성은 흉노에 대한 거부감을 은연중에 내포하기 위해 나약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또한 유교 프레임에 맞게 뇌물을 받은 관료를 ‘악’으로 지정하며, 그에 대한 명군(원제) 의 처벌을 정당화한다.
한궁추에서의 리텔링
“왕소군에 대한 대표적인 인식은『한궁추』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궁추』는 영향력이 있는 문학 작품이다.(위에 제시한 왕소군의 생애도 『한궁추』가 대중적이기에 『한궁추』를 요약하여 제시하였다.)
“漢 원제는 毛延寿(모연수)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모집한다. 王昭君이 궁녀로 발탁되었으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내내 냉궁에 있다가 우연히 원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하라고 명한다. 모연수가 흉노에 투항하여 왕소군의 미인도를 선우에게 바치자 선우는 왕소군을 요구하며 화친을 제안한다. 원제는 전쟁을 불사하지만 신하들이 화친을 주장하여, 결국 왕소군은 흉노 땅에 보내진다. 원제와 이별한 왕소군은 黑水(흑수)에서 漢王(한왕)을 위해 술을 뿌리고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呼韩邪單于(호한야선우)는 충절에 감동하여 장례를 치른 후 모연수를 한 나라로 보내고, 원제가 끝내 그를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중략)
선우: 나는 호한야선우요. 어제는 사신을 한나라로 보내어 공주를 내게 시집보내라고 했는데, 한나라 임금은 공주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거절해 와서 내 마음이 얺짢소! 한나라 궁중에는 수많은 궁녀가 있다니, 그 중에서 한 사람쯤 내게 준대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오. 그런데도 사신을 곧장 쫓아 들여보내다니! 군대를 동원하여 남침을 하자니 몇 년 동안의 평화를 잃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 형편 돌아가는 것을 보아 달리 도리를 강구하도록 해야겠소.
모연수: 어제는 성도(成都) 자귀현(秭歸縣)에 가서 한 사람을 뽑았는데, … 외모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서 진실로 천하의 절색이라 할 만합니다. … 나는 그들에게 돈 백 냥만 내놓으면 첫째로 뽑아 올려주겠다고 했는데도, 살림이 가난한데다가 자신의 용모가 출중한 것을 믿고 전혀 말을 듣지 않더군요.
(중략)
원제: 내 이제껏 군사를 길러온 것은 유사시에 쓰기 위함이다! 공연히 조정엔 문무백관이 잔뜩 있단 말이오? 누가 나를 위해 오랑캐 군사를 물리쳐 주겠소? 모두들 칼과 화살이 무서워 이렇게 맥을 못추고 있는 거요? 어찌 명비를 내주고 오랑캐와 화친을 한단 말이오? (중략)
원제: 명비가 연약하고 착하다 하여 업신여기는 모양인데, 만약 옛날 여태후가 계시던 시절이라면, 누가 감히 한마디 명령인들 거역하였겠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왕소군이 한 번 더 리텔링 되어 내용이 전과 상이하다는 것이다. 우선 『서경잡기』에서 뇌물을 받은 화가인지 아닌지 모호했던 모연수는 뇌물을 받은 악덕 화공의 모습으로 변하고 흉노로 도망가는 비열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고급관료가 아니었던 작가 마치원이 어느 정도 계급·신분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원나라 시대의 한족이었는데, 따라서 그는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왕소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킨다. 또한 한과 흉노의 화친정책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세력이 비교적 약했던 흉노를 ‘흉노가 원하는 여인을 한나라에서 취할 정도로’ 강하게 묘사한 것은 흉노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키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원제의 “옛날 여태후가 계시던 시절이라면, 누가 감히 한마디 명령인들 거역하였겠나?”라는 말은 당시에 여태후가 흉노에게 타협적인 정책을 펼친 사실과 모순된다. 이는 흉노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했다고 본다.)
현대에 리텔링된 왕소군
'현대에 리텔링된 왕소군'의 대표적인 예로 조우의 『왕소군』을 들 수 있다. 조우의 역사극 ‘왕소군’은 1978년에 발표되었지만, 작품 구상은 주은례 총리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조우에게 임무(리텔링)를 맡겼다. 조우가 고백하길 “이 연극은 경애하는 주총리가 생전에 나에게 맡긴 임무였다 그것은 1960년대 이전의 일로, 주총리는 우리에게 대한족주의를 가지지 말고, 함부로 잘난 체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말은 몽고족과 한족간의 혼인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총리는 한족 여성들이 소수민족들에게 시집을 가도록 제창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왕소군을 거론하면서 주총리는 .... 나에게 왕소군 극본 창작을 권유하였다.”
이는 모택동의 여섯 가지 표준 중에서 첫 번째 조항인 ‘민족 단결에 유리하고, 민족적 분열을 조장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과 어울린다. 또한 그는 내몽골에 가서 왕소군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몽골 사람들은 왕소군을 온화한 여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무덤에 가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고, 아이를 갖지 못한 부부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미신까지 생긴 것이다. 즉, 그녀는 몽고족 여인들이 좋아하는 한족 여성이었고, 이는 주총리의 소수 민족을 존중하는 사상과 연관되기 충분했다. 즉 당대의 이데올로기 혹은 당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가 '왕소군'에 개입되어 리텔링된 것이다.
정리하면, ‘왕소군’이라는 역사서에 나온 인물은 각 시대마다 그 시대, 혹은 작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변화한 양상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이춘식,『중국고대사의 전개』, 1986
왕천유,『중국고대관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