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후

ChineseWiki
Radog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5월 14일 (토) 17:58 판 (참고 문헌)
이동: 둘러보기, 검색

여태후의 이름은 여치(呂雉).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인 아버지 여공의 뜻에 따라 (秦)의 사수(泗水) 정장(亭長) 유방 劉邦과 결혼한다.(정장(亭長)이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었으며, 사마천여태후본기에 ‘미천한 신분’이라고 유방을 서술했던 걸 보면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부자였던 여태후가 이 혼인에 불만을 가질 법도 하지만, 그녀는 유방에게 최선을 다해 내조한다.

후에 유방이 패(沛)지역에서 반진(反秦) 대열에 합류하자, 그녀는 집 안에서만 유방을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집 밖에서도 유방을 보필하며, 많은 수모를 겪었다. 우선 유방(劉邦)이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지역에 도망쳐 숨어있을 때는 몰래 그곳을 찾아가 유방을 돕고, 『史記』卷8,「高祖本紀」) 유방(劉邦)이 수배자였던 시절에는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史記』卷96,「張丞相列傳」) 초한(楚漢)전쟁 중에는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 군대에게 대패하였을 때 그녀는 (楚)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그 후 초한(楚漢)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2년 5개월 동안 초(楚)의 포로생활을 하다 석방되기도 하였다.(『史記』 卷8,「高祖本{紀」)

(漢) 제국이 건립되어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면서 그녀는 황후가 되었는데, 한나라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 제왕(齊王) 한신(韓信)과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주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 예이다. (『史記』卷92 ,「淮陰侯列傳」, 『史記』卷90,「魏豹彭越列傳」)

인간 돼지, 인체(人彘) 사건

‘인간 돼지’ 사건은 여태후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여태후본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태후는 혜제와 딸 노원태후를 낳았다. 고조가 한왕이 된 이후 다시 정도에서 척부인을 얻어 매우 총애했다. 척부인은 후에 여의를 낳았다. (중략) 고조의 총애를 받은 척부인은 고조의 면전에서 밤낮으로 울며 자기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해 달라고 애원했다. (중략) 척부인의 아들 여의는 조왕이 된 이후 일찍이 몇 번에 걸쳐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뻔하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대신들의 간언과 유후 장량의 계책으로 태자는 가까스로 폐위되는 운명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한 고조 유방이 죽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척부인의 위협으로 척부인에게 원한이 있던 여태후는 조왕 여의를 주살한다. 그러고 나서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벙어리가 되게 하는 음약을 먹인 뒤 그녀를 변소에 내다 버려 그곳에서 기거하게 했다. 여태후는 그녀를 인체(人彘), 즉 사람 돼지라고 불렀다. 며칠 후 여후혜제를 불러 사람 돼지를 구경시킨다. 한참 후에야 혜제는 그것이 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 놓아 울었다. 그 후로 혜제는 온종일 술과 여자에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결과 병을 얻게 되었다.'

여태후에 대한 평가

흉노와의 관계

여씨의 몰락과 죽음

참고 문헌

사마천, 『사기』, 「여태후본기
金澤中, 「呂太后와 人彘사건」, 『중앙사론』,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02
양중석, 「사마천이 서술한 여태후 이야기 : 《한서·고후기》와의 비교를 통한 《사기·여태후본기》 읽기」, 『中國文學』, 韓國中國語文學會,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