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힐
목차
생애
사관인가, 황제인가, 신인가
창힐(倉頡, 蒼頡, 간체자는 仓颉로 표기)은 한자를 창제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시대의 인물이다. 중국 고대 전설의 오제(五帝) 가운데 첫 번째인 황제(黄帝)의 사관(史官)으로 전해진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황제의 사관인 창힐은 조수의 발자국을 보고 문양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구별할 수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은 후강(侯剛),이름은 힐(頡), 호는 사황씨(史皇氏)이며, 창힐은 사관이 아니라 왕이나 고대 부족의 수령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대부분 위서의 기록으로 간주된다. 아래의 기록들에서는 창힐이 황제의 '사관'이 아니라 '창제(倉帝)'나 '사황(史皇)'으로 일컬어진다. 창힐에 대한 전설이 과장되면서 후대에 가공된 이야기로 보인다. 사황(史皇)이라는 이름도 황제의 사관이었다는 기록의 와전으로 보인다.
『회남자』(淮南子)의「수무훈」(脩務訓) "사황(史皇)은 태어나면서부터 문자에 능했다."
『춘추명력서』(春秋命曆序) "창제(倉帝) 사황은 용의 얼굴을 하고있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 "창제(倉帝) 사황은 이름이 힐이고 성이 후강이다. 용안은 넓고, 네 개의 눈은 신비로운 빛을 발한다.참으로 후덕한 모습으로서, 나면서부터 문자에 능했다."
도교에서는 창힐을 문자의 신이라 여긴다. 천계에서 내려와 천성이 슬기롭고 덕망이 두터웠으며 두개의 눈동자와 네개의 눈을 가졌다. 네 개의 눈으로 별자리의 움직임과 조수의 발자국을 관찰하여 문자를 창조했으며 이로인해 당시의 미개함을 청산하고 문명의 기초를 연 문자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외모의 특징-네 개의 눈
창힐은 네 개의 눈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관찰력을 통해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발명했다는 점에서 눈이 네 개라는 전설이 생겼고 이러한 전설이 후세에 전해져 후한시대 화상석(畫像石)이나 훨씬 더 후대에 그려진 그림에서도 눈이 네 개로 묘사되고 있다.
창힐의 묘
창힐은 중국의 문자인 한자의 발명자로서 역대 왕조로부터 종교적인 의식과 함께 숭배받아왔고, ‘조자성인(造字聖人)’, '제자선사(制字先師)', ‘서성(書聖)’, ‘사문비조(斯文鼻祖)’등으로 불리며 추앙받아 왔다. 그의 고향으로 알려진 허난성(河南省) 난러현(南樂縣) 서북쪽 오촌에는 창힐묘와 사당, 문자를 만든 장소 등이 남아있어 그를 기념하고 있다.
허난성 난러현에 위치한 창힐묘는 동한 영흥2년(154년)에 처음 건립되어 그 후 여러 차례 훼손과 복원을 반복했다. 1966년 치명적인 재난을 입고 폐허가 된 이후 도굴 당했는데, 앙소와 용산시기의 물건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현재 창힐묘에는 두개의 비석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원나라 연우(延佑)때의 것으로 "창힐이 이곳에서 나고 이곳에 묻혔다"라는 비문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북송 명상 구준이 창힐묘에 제사를 지낼때 남긴 "반고 유적지이며 하늘을 연 성인의 집이다."를 그 내용으로 한다. 묘의 서쪽에는 창힐 사당이 있으며 웅장한 건축물들은 문혁 때 훼손되기도 했었다. 이런 역사를 거쳐온 2000년 9월 25일 허난성의 인민정부에 의해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보호받고있다.
업적
한자 창제 설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은 전국시대 말기에 이미 유포되어 있었다.
『한비자』(韩非子)「오두」(五蠹): "옛날에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을 때 자기 주변을 둘러싼 것을 '厶'자라 하고厶에 등진 형태를 '公'자로 했다."
『여씨춘추』(吕氏春秋)「군주」(君主): "해중은 수레를 만들고, 창힐은 문자를 만들고, 후직은 농사법을 만들었다."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 "옛날에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
후한시대에 이르러 허신은 당시까지의 중국문자에 대한 담론들을 정리한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편찬하는데 설문해자 역시 창힐을 문자 창제의 주인공으로 설명하고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 "복희씨(伏羲氏)가 최초로 역(易)의 팔괘(八卦)를 만들고 그 다음으로 신농씨(神農氏)가 결승(結繩)을 만들어 사물을 표시했으나 사물이 번다해지며 과장과 사기라는 것이 싹트게되었고 후에 황제의 사관 창힐이 조수의 발자국을 보고 문양에 따라 사물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
모두 창힐이 문자를 발명했다는 서술에는 다름이 없으나 창힐의 문자발명에 대한 자세한 과정으로는 여러가지 설들이 존재한다.
거북 등껍질의 문양 설
사냥을 나간 창힐이 산에 올라 강을 내려보다가 등에 푸른 문양이 선명한 거북을 보았다. 이를 이상하다고 여긴 창힐은 거북을 가져다 연구했고, 문양이 어떤 의미를 나타낸다면 그에 따른 규칙을 정하여 문양으로 기록하고 뜻을 전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창힐은 하늘과 땅의 모든것과 모든 짐승과 식물을 관찰해 그림으로 그려 서로 다른 부호를 만들었다. 또한 이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다. 이것이 창힐이 창제한 최초의 문자이다.
봉황의 발자국 설
사물이 번다해지면서 결승(結繩)으로 기록하는 방법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 황제(黄帝)가 그의 사관 창힐에게 방법을 강구하여 문자를 만들도록했다. 창힐이 강가의 언덕에 누각을 짓고 지내며 온힘을 다해 문자를 만들려 노력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창힐이 사색하던 중 하늘을 날고있는 봉황 한마리를 보았는데 봉황이 입에 물고 오던 물건이 그의 앞에 떨어졌다. 주워보니 물건 위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었는데 어떤 들짐승의 발자국인지 식별해낼수 없었는데 마침 걸어오던 한 사냥꾼이 있어 그에게 물어보았다.
사냥꾼은 발자국을 한번 보면 무슨 동물의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창힐은 사냥꾼의 말을 듣고 영감을 얻게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 모든 사물을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만약 그 사물의 특징을 그려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창힐은 해, 달, 구름, 산, 강, 호수, 바다 등 날짐승과 들짐승까지 각종 사물들의 특징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림으로 그려내 많은 상형문자를 만들어냈다.
창힐이 그가 만든 상형문자를 황제에게 바쳤더니 황제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구주(九州)의 추장들을 불러 모아 창힐이 만든 문자를 전했다. 창힐이 문자를 만든 공을 기념하기 위해 후대들은 창힐이 문자를 만든 지역을 봉황함서대(鳳凰銜書臺)라 불렀고 송대에는 이곳에 사당을 만들어 봉대사(鳳臺寺)라고 이름지었다.
짐승의 발자국 설
창힐이 집단 사냥을 하던 중 세 갈래 길을 만나게 되었다. 세 노인들이 어느 길로 갈지 논쟁을 하고 있었다. 한 노인은 동쪽을 가리키며 영양이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노인은 북쪽을 가리키며 사슴이 있다하고, 또 다른 노인은 서쪽에 두마리의 호랑이가 있다며 제때 잡지 않으면 기회를 놓친다고 주장하였다.그들은 바닥에 찍힌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각자 주장한 것이었다.
이를 보던 창힐은 기뻐하며 집으로 달려가 각종 부호를 사용해 사물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황제(黄帝)가 이를 안 후에 매우 칭찬하며 창힐에게 각 부락에 가서 이 방법을 전하라 명령했다.
炎黄二帝의 담판 설
창힐이 결승(結繩)으로 기록한 것이 시간이 오래 걸려 황제(黄帝)에게 제때 전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황제가 염제와의 영역 담판에서 손해를 보아 창힐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천하를 떠돌며 기록의 방법을 고민하던 창힐은 3년 뒤 고향에 돌아가 별자리와 자연을 관찰하며 만물을 대표하는 부호들을 만들었다. 창힐이 문자를 창제한 것을 알게된 황제는 기뻐하며 그에게 창(倉)이란 성을 하사했다.
한자 정리 설
선사시대 여러 유적지에서 발견된 도문(陶文)이나 중국 문자의 특성으로 볼 때 중국문자는 개인에 의해 창제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민족의 노력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창힐은 문자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중국 최초로 문자를 하나로 정리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황제(黄帝)가 치우(蚩尤)와의 격전에서 승리한 뒤 사회적 안정을 위해 천문, 역법, 문자, 건축, 의술등 사회,문화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사관 창힐에게 문자를 정리하게 하였다는 고대의 기록이 있으며, 이는 한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사용되었던 문자를 황제의 명으로 창힐이 한차례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순자(荀子)』「해폐편(解蔽篇)」: "문자를 좋아한 사람은 많았으나 이를 전한 사람은 오직 창힐 한 사람이었다."
문자 창제와 관련된 인물이 여러명이고 창힐은 그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후대의 평가
창힐은 문자 창제로 인해 영웅으로 추앙받아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문자 창제가 불러일으킨 부정적 반향을 강조하며 불만을 가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 역사는 2천년 전 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과거의 기록들은 이후 근세까지 이어져와 한자 회의론의 시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 "옛날에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하늘은 곡식을 뿌리고 귀신은 밤새 울었다."
『회남자』(淮南子) 고유(高誘) 주석 : "창힐은 처음으로 새의 발자국 모양을 보고 서계를 만들었다. 그러자 사기와 허위가 생겨났다. 사기와 허위가 생겨나자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뒤쫓으며, 농사를 버리고 송곳과 칼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데 힘을 쏟게 되었다. 하늘은 인간이 굶주리게 될 것을 알고서 곡식을 뿌렸다. 귀신은 문서로 탄핵받을까 두려워서 밤새 울었다."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의 기록과 그에 대한 고유(高誘)의 주석에 따르면 한자 발명으로 인해 타인을 속이는 폐해가 발생했고 농사를 버리고 문자 새기는 것에만 몰두해 누구도 일하지 않았으므로 식량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하늘이 곡물을 내려주지 않으면 안되었고 오로지 누군가를 중상하는데만 사용된 문자로 귀신 조차 탄핵받을까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 : "......(창힐은) 이리하여 천지의 변화를 다 궁구하며, 우러러 규성(奎星)의 둥글고 굽은 모습을 관찰하고, 고개 숙여 거북의 문양과 새의 깃털 및 산천을 살펴 손바닥에 그려보고 문자를 창조했다. 하늘은 곡식을 뿌리고, 귀신은 밤새 울었으며, 용은 숨어버렸다."
『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 : "창힐이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자 그것에 의해 백관을 구별해 다스리고 만사를 관리했다. 이로써 어리석은 자는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하고, 현명한 자는 원대한 생각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쇠망하게 되자 함부로 위조문서를 만들어 죄 있는 자를 석방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춘추원명포』에는 『회남자』(淮南子) 「본경훈」에 서술된 내용과 더불어 용이 숨는다는 표현이 실려있다. 용이 숨는다는 것은 덕이 쇠했다는 상징이고『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의 기록 역시 문자의 사용으로 세상이 쇠망하게 되어 더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고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와같은 한자 발명에 대해 회의적인 기록들과 반대로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앞서 보았듯이 '과장과 사기' 같은 부정적인 영향은 한자 이전의 기록방법인 결승에 전가하고 한자가 이런 혼란을 극복했다고 찬미하고 있다.
참고문헌
- 양동숙, 『그림으로 배우는 중국 문자학』, 차이나하우스, pp.33~34.
- 아츠지 데츠지, 『한자의 역사』, 학민사, pp.11~16.
- 다케다 마사야, 『창힐의 향연』, 이산, pp.16~26.
-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편』, 김영사, pp.210~211.
- 百度百科 仓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