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표(表)는 연표다. 어느 해에 어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엑셀 프로그램처럼 세로에는 연대, 가로에는 인명을 배열하고 연도별 관직 임명과 파면, 좌천 등을 기록했다. 황제시대부터 한무제까지 족보의 형식으로 인물을 서술하였고, 본기에 나오는 제왕과 제후의 흥망을 총 10편에 담아 기록하고 있다. 10편 중 1편은 하,상,주 삼대와 오제의 제왕들의 세계世系를 다룬 세표世表이고, 1편은 진한 교체기를 월별로 기록한 월표月表이며, 나머지 8편은 모두 연표年表이다.
권13<삼대세표(三代世表)>제1: 하,은,주 3대의 사적은 너무나 오래 되어 그 연기를 생각할 수가 없다. 아마 계보系譜의 서에서 채록했을 것이라 생각되며, 고문서들은 어차피 여기에 기준을 두고있다. 그래서 사마천은 대략 추정하여 제1에 <삼대세표>를 작성했다.
권14<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제2: 유왕,여왕 이후로는 주 왕실이 쇠미하여 제후들이 정권을 오로지 했다. 이에 관해서는 각국의 기록에 빠져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계보에 기록되어 있는 경략의 흔적을 추적해 보니 오패가 번갈아 가면서 성쇠했다. 그래서 주 왕조 때 제후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성쇠한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여 제2에 <12제후연표>가 서술되었다.
권15<육국연표六国年表>제3: 춘추시대 이후로 배신이 정권을 잡고 강국들이 서로 왕이라 칭했다. 진에 이르러서 중원의 제후국을 병합하고 그들의 봉토를 없애 버렸다. 그러고는 제멋대로 황제라고 호칭했다. 그것을 제3 육국연표에 담았다.
권16<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제4: 진秦이 포학했으므로 초楚나라 사람 진승,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항씨(항우项羽)가 난폭하게도 회왕을 살해했으므로 한왕汉王은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항우를 정벌했다. 8년간에 천하에는 세 차례의 정변이 있었다. 사건은 빈번하고 변란이 꼬리를 물었다. 이것을 상세히 한 것이 제4 <진초지제월표>다.
권17<한흥이래제후연표(漢興以來諸侯年表)>제5: 한 제국이 흥기한 이래로 금상폐하의 태초 연간에 이르기까지 1백년은 제후가 폐립되고 혹은 분봉되고 혹은 영지가 삭감되어 그 후계자에 관한 기록이 분명치가 않다. 관리가 취한 강간약지책의 근원을 차례대로 밝히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제5<한흥이래제후년표>가 만들어졌다.
권18<[[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候者年表)>제6: 한 고조의 대공신인 보필,고굉의 신하들은 한부를 받아 작위를 얻고 그 은택은 후손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그것이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상전했다는 사실을 망각하여 혹은 망신하고 혹은 망국했다. 그것을 제6<고조공신후자년표>에 담았다.
권19<혜경간후자연표(惠景間侯年表)>제7: 효혜제와 효경제 사이에 고조의 공신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자들에게 추상하고 또 종족 관계자들에게 작읍을 하사했다. 그것을 제7<혜경간후자년표>에 잘 서술하였다.
권20<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候者年表)>제8: 한나라 융성기에 북방으로 강대한 흉노를 토벌하고 남방으로는 강력한 월越을 주벌했다. 이토록 오랑캐를 정복해서 그 무공으로 열후에 봉해진 자가 많다. 그들을 제8<건원이래후자연표>에 상세히 기록했다.
권21<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建元以來王子候者年表)>제9: 제후가 강성하게 되자 오,초칠국이 합종,연횡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제후들의 자제수가 너무 많아 작록과 봉읍이 없을 경우 제후가 직접 제 영지를 자제들에게 잘라 주어 은혜를 입히고 의義를 행하게 했다. 이렇게해서 제후들의 세력이 쇠약해지고 위덕威德이 모두 한실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제9 <건원이래왕자후자년표>를 작성했다.
권22<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제10: 국가에 현상,양장이 있으면 백성에게는 사표가 된다. 한제국이 흥기한 이래로 장,상,명신의 연표를 저술해 현자는 그 치적을 기록하고 불현자는 그 전말을 밝혔다. 그것을 제10 <한흥이래장상명신년표>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