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 16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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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의 여파로 유민에 의한 반란이 빈발하던 304년 유연(劉淵)이라는 부장이 좌국성(左國城)에서 자립해 한(漢)을 세웠다. 유연은 남흉노 선우(單于) 어부라(於夫羅, 150~194)의 자손으로 팔왕의 난 때는 성도왕 영(穎)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용병 대장이었다. 유연이 308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황제를 칭한 뒤 약 130년 동안 18개국, 22개의 정권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이 흥망의 시기가 바로 5호 16국 시대이다. 5호(五胡)는 흉노(匈奴), (羯), 선비(鮮卑), (氐), (羌) 이렇게 다섯 민족을 가리킨다. 호(胡)라는 용어는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이민족을 가리키기 때문에 차별적인 의미로 여겨져 당시에는 사용을 금했다고 한다. (羯)은 흉노의 한 갈래이고, (氐)와 (羌)은 티베트계 민족이다.

흉노(匈奴)

남흉노군이 천자 구원에 나선 무렵 선우(單于)어부라(於夫羅, 150~194)는 병상에 있다가 곧 죽었다. 그리고 동생인 호주천이 선우가 되었다. 어부라의 당시 너무 어렸던 아들 표(豹)는 흉노의 좌현왕이 되었다. 후한의 실권을 장악한 조조는 새로운 흉노 대책을 세웠는데, 수많은 부를 정리해서 지역마다 좌, 우, 남, 북, 중의 5부로 나누었다. 부의 수장을 수(帥)라고 불렀는데 위나라 말기에는 도위(都尉)로 바꾸었다. 태원(太原)을 근거지로 한 좌부가 가장 규모가 커서 1만여의 낙(落)을 지배했다. 가장 작은 부는 3천 남짓의 낙(落)을 통솔하는 남부였다. 어부라의 또 다른 아들 균이 가장 큰 좌부도위에 임명되었다. 이 균의 아들인 유연(劉淵)은 자가 원해(元海)였다. 당나라 고조의 이름도 이연(李淵) 이어서 당나라 때에 쓰인 『진서(晉書)』에는 연(淵)이라는 본명을 피해서 원해(元海)라는 자를 썼다. 흉노는 한(漢)과 형제의 인연을 맺은 탓에 흉노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한인식으로 칭할 때는 대개 유(劉)씨를 썼다. 그래서 어부라 선우의 손자가 유연(劉淵)이라는 한인 식 이름을 쓴 것이다.

유연(劉淵)

새외민족들에게도 공통점이 존재했는데 그 중 하나는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흉노는 유목생활을 하기 때문에 서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는데, 유연(劉淵)이 이 역할을 잘 해내었다. 유연(劉淵)의 뛰어난 통솔력으로 흉노는 순식간에 강성해졌다. 동족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인 족(羯族)까지 유연(劉淵)의 산하에 들어올 정도였다. 선비의 경우에도 초기엔 후한에 의해 이용당할 정도로 약했으나, 단석괴라는 뛰어난 통솔자가 나타나면서 점차 강력해졌다. 유연(劉淵)은 성뿐만 아니라 보통 한인 이상으로 한나라 문화에 교양이 있었다. 『시경』, 『역경』, 『상서』를 배웠고, 『춘추좌씨전』과 손오(孫吳)의 병법을 특히 좋아했으며, 『사기』, 『한서』, 그 밖에 제자백가의 책 등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근뿐만 아니라 무예도 배웠는데, 원숭이처럼 긴 팔로 활을 잘 쏘았고 완력(腕力)은 따를 사람이 없었다. 당나라 때 쓰인 『진서(晉書)』는 유연(劉淵)을 '체격이 크고 당당했으며, 신장이 8척4촌, 수염의 길이가 3척 남짓에다 가슴 언저리에 붉은 털이 세 개 났다. 그 길이가 3척 6촌'이라고 묘사했다. 당시 한나라의 1척(尺)은 약 22.9센티미터로 붉은 가슴털 세 가닥이 80센티미터가량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흉노에 뿌리내린 한족의 윤리 관념

민족 간의 혼합은 윤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의 황제 유연(劉淵)이 죽자 그의 태자 유총은 아버지의 정실부인이었던 미모의 선씨와 육체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아버지가 죽은 뒤 자신의 생모 이외에 아버지의 처첩을 취하는 흉노의 관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흉노 명문의 딸인 선씨는 수치심과 우울증으로 자살해 버렸다. 이것은 한족의 윤리 관념이 흉노 사이에 뿌리내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갈족(羯族)

족(羯族)의 지도자는 석륵(石勒)이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갈족의 작은 부락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매우 가난해서 석륵은 14세 때 낙양으로 물건을 팔러 갔을 정도였다. 병주(幷州)에 기근이 들었을 때 동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는데, 석륵은 북부도위인 유감(劉監)에게 붙잡혀 팔려 갈 뻔하다가 겨우 탈출했다. 이런 일로 새외민족은 한족에게 증오심을 품었다.

석륵(石勒)

이 시대에는 문무의 재능이 뛰어난 인물도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금세 타락했다. 유연에게 천리구(千里駒)라고 격찬 받았던 유요도 제위에 오른 뒤부터 임금에게 아첨하는 신하와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며 지냈다. 간언했다가 참수된 자가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황제에게 조언하지 않았다. 반면에 문맹이었다는 석륵의 정치는 훌륭했다.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에 기초해 관리를 등용했는데 군자영(君子營)의 존재가 특히 유명하다. 군자영이란 한족 출신의 학식 있는 경험자를 모은 이른바 비서집단인데, 석륵은 군자영 사람들에게 정치 조언을 받았다. 후조(後趙)의 영토는 하북, 산서, 산동, 그리고 한남 일부여서 당시에는 한과 호가 뒤섞여서 살고 있었다. 석륵은 각 민족이 각자의 관습을 지키는 것을 존중했다. 백성의 소송이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문신제주(門臣祭酒)와 문생주서(門生主書)라는 직무가 있었는데, 전자에는 흉노족, 후자에는 한족을 임명했다. 그리고 한족이 흉노를 호인(胡人)이라고 부르는 것을 금했다. 호는 흉노를 이민족으로 구별 짓는 차별용어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국인(國人)’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했다. 또 한편으로는 국인, 즉 흉노가 한족에게 창피를 주는 일이 없도록 주의했는데, 민족문제에 매우 마음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호(石虎)

이렇게 올바른 정치를 펴고 있던 석륵후조(後趙)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석륵의 조카인 석호(石虎)였다. 그는 웅포다사(雄暴多詐)로 일컫는 무인이었다. 용맹한 것에 그치지 않고 매우 잔인했다. 성을 함락하면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석륵이 살아 있을 때부터 후조에서는 태자파와 석호파가 대립했다. 태자는 석홍(石弘)이라는 인물로 석호와 달리 인효온공(仁孝溫恭)이라고 형용될 만큼 온순했다. 석호는 어찌나 잔인했던지 석호의 권위를 빼앗고 서둘러 태자를 정치에 참여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석호는 뛰어나리만큼 용감무쌍했다. 서쪽의 전조(前趙), 남쪽의 동진(東晉), 북쪽에는 선비족이 군사활동을 벌이고 있어 석호는 후조(後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장(武將)이었다. 석호의 잔인함이 잘 드러난 사건은 후조의 석륵 일가가 전조를 멸망시킬 때의 일이다. 석륵이 전조 유요(劉曜)를 항복시킨 것은 후조왕 석륵 10년(328)때 였다. 유요(劉曜)는 술을 마시면서도 싸우고, 싸우면서도 술을 마시다 마침내 술에 취해 석감(石堪)의 포로가 되었고, 곧 살해되었다. 이듬해 석호유요(劉曜)의 태자 유희(劉熙)를 추격하여 붙잡아 죽이고 이로써 전조는 멸망했다. 석호는 전조(前趙)의 주요 가신 3천 명을 모두 죽였다. 또 전조의 왕공(王公)과 오군(五郡) 도각부족 5천여 명을 낙양에서 모조리 구덩이에 처넣어 죽여 버렸다. 석륵은 그 15년(333)년에 죽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났는데, 석호는 태자 석홍의 제위를 빼앗고 곧바로 그를 죽여버렸다. 사서에 묘사된 석호는 악마 그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석륵은 만년에 업(鄴)에 궁전을 지었는데 석호 시대에 이곳으로 천도했다. 수렵광(狩獵狂)인 그는 온갖 취향을 살려서 사냥을 즐겼는데, 사냥을 하기 위해 18만 군사를 동원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궁녀의 목을 쳐서 그것을 접시에 담아 바라보거나, 소고기나 양고기에 함께 삶아 먹는 등 정말 그랬을까 의심스러운 일이 사서에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기를 좋아해 16만 명의 남녀를 징용하고 10만 명이 한꺼번에 탈 수 있는 수레로 흙을 날라 화림원(華林苑)을 짓고 업(鄴)의 북쪽에 긴 담장을 만들었다. 고대 능묘를 파헤쳐 그 보화를 훔치는 것을 특히 좋아해 조간자(趙簡子)의 무덤이나 진시황제의 묘 등을 파헤쳤다. 또 다른 끔찍한 사례를 들자면, 석호는 1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석도(石韜)를 가장 사랑했다. 그런데 아들들 사이에서 후계자 쟁탈이 벌어지면서 석선(石宣)이 석도(石韜)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석호(石虎)는 자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석선(石宣)의 목에 쇠고리를 채워서 곳간 안에 처넣거 대나 돼지처럼 구유통으로 밥을 먹게 했으며 처형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히다 죽였다. 머리털을 뽑고 혀를 뽑고 도르래로 쥐어짜고 손발을 절단하고 눈알을 뽑고 배를 도려내고 사방에서 불을 놓아 태워 죽였다. 석선(石宣)의 처자 아홉 명도 죽음을 당했다. 석선(石宣)의 자식이라 하면 석호(石虎)의 손자이기도 한데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석호는 여관 수천 명을 데리고 이 처형을 구경했는데, 진서가 과장이 많은 역사서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제 자식을 처형하는 것은 매우 섬뜩한 일이다. 이러한 석호는 물론 전쟁도 좋아했는데, 전조(前趙)를 토벌한 전쟁에서는 이겼으나 주변국 작전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남하작전도 실패했다. 선비족 여러 부의 싸움에 개입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 선비 모용부(慕容部)는 모용황(慕容皝)이라는 뛰어난 지도자 덕분에 상당히 강했다. 그것을 가볍게 보고 생트집을 잡는 바람에 선비의 내분에 개입해서 얻은 토지까지 내놓아야 했다.

한족(漢族)의 최후, 염민(冉閔)

북방에서 일어난 선비족의 막강한 세력에 석호조차 애를 먹었다. 석호가 죽고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석세가 33일, 석준이 183일, 석감이 103일동안 재위에 있었고, 마지막으로 석호의 양손(養孫) 염민(冉閔)이 석감을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석호에게는 아들이 13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여덟은 서로 싸우다 죽고 나머지 다섯은 염민(冉閔)에 의해 죽었다. 이렇게 후조(後趙)를 멸망시킨 염민은 349년 대학살을 단행했다. 오랑캐(흉노)의 목을 베어 봉양문으로 보낸 자가 문관이면 품위를 삼등 진급시키고 무관이면 모조리 아문에 임명한다는 현상을 내걸었다. 이 때 죽음을 당한 사람이 20여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들이 전부 흉노는 아니었다. 당시 흉노는 키가 크고 코가 높고 털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던 탓에 잘못 죽은 이가 절반에 이르렀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그때까지 염민(冉閔)은 자신을 석민(石閔)이라고 칭했으나, 곧바로 원래의 성으로 바꾸어 염민(冉閔)이라 칭했으며 국호를 위(魏,350~352)라고 하고 연호를 영흥(永興)이라고 고쳤다. 전량(前凉,317~376), 서량(西凉,400~421), 북연(北燕,409~436)이라는 한족(漢)이 세운 세 나라가 5호 16국 안에 포함되지만, 하북에 출현한 염민(冉閔)의 한족왕국 위(魏)는 겨우 3년밖에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16국 안에는 들지 못한다. 그 때 북방에서 들고 일어난 선비족의 모용부(慕容部)는 모용외(慕容廆), 모용황(慕容皝), 모용준(慕容㒞)이라는 유능한 통솔자가 잇따라 등장해 부족을 지도했다. 염민의 상대는 모용준이었다. 염민은 모용준과의 전쟁에서 패해 포로가 되었다. 모용준이 '그대는 노복하재(奴僕下才,노비와 같은 하찮은 남자)인데, 어찌 함부로 황제를 칭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자, 염민은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너희들 이적금수(夷狄禽獸) 무리조차 황제를 칭한다. 하물며 나는 중토(中土)의 영웅이니, 어찌 황제라 칭하지 못할쏘냐.'라고 대답했다. 이에 모용준이 크게 노하여 매질하기를 300대라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염민은 352년에 참수되었다. 그리고 위(魏)는 막을 내렸다. 이 해에 큰 가뭄이 있었고 메뚜기떼가 농작물을 모조리 갉아먹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용준은 이것이 염민을 죽인 뒤탈이라고 생각하고 사자를 파견해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한순간의 한족 왕조가 무너지고 흉노의 여러 부도 세력이 예전 같지 않아 화북은 동으로는 선비족(鮮卑), 서쪽으로는 (氐)와 (羌) 같은 티베트 계통의 민족이 병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선비 모용부 왕조는 국호를 연(燕)이라 칭했다. 저족(氐族)인 부씨(符氏)왕조는 진(秦)이라 이름 지었다. 모두 춘추전국 시대 나라 이름을 따랐다. 이 두 왕조가 멸망한 뒤에 같은 국호를 사용한 왕조가 뒤를 이었기 때문에 후세에는 편의상 각각 전(前)과 후(後)자를 붙여서 구별하고 있다. 후연(後燕)은 전연(前燕)과 같은 선비 모용부였으나, 후진(後秦)은 강족의 요씨(姚氏)가 세운 나라로 전진(前秦)의 족(氐族)과 마찬가지로 티베트 계통이긴 하나 부족이 다르다.

참고문헌

  •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3>>, 진순신, 살림 출판사, 2011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유혜영, 서해문집, 2004
  • <<수정증보판 新中國史>>, 존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 까치,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