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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サイ」의 발견 | + | ◉ 「サイ」의 발견 |
− | + | 트레이싱 페이퍼를 사용해 약 3000년 전의 중국의 고대 문자를 찍었다. 수만 장이나 찍으면서 문자의 성립과 연결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45세 때 '口'가 '입'이 아니라 하나님께 편지를 넣는 그릇 'サイ'임을 발견했습니다. 이 발견을 통해서 한자의 성립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약 2000년간 옳다고 여겨져 온 한자의 해설서인 ‘설문해자’와는 다른 학설을 구축하게 되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발견이었기 때문에 반대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많았다. 외로운 연구였지만, 자신만의 학문의 길을 외롭게 느끼지 않고 좋아하여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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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발표하는 장소로서 「甲骨金文学論叢」을 발행 | ◉ 스스로 발표하는 장소로서 「甲骨金文学論叢」을 발행 | ||
− | + | 갑골문자나 금문에는 활자가 없는 글자가 매우 많아 일반학술지에 기고하기에는 큰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스스로 도장 새기는 작은 칼을 잡고 등사기 인쇄라는 발표의 형태를 취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 『甲骨金文学論叢』입니다. ‘역사’ 일자의 성립을 언급한 「釈史」나, 마찬가지로 「文」의 성립을 언급한 「釈文」 등의 논문을 이 자리에서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풍부한 한자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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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73세'''<br> | '''60 ~ 73세'''<br> | ||
◉ 넓은 한자의 매력을 전파를 위한 『漢字』를 출판 | ◉ 넓은 한자의 매력을 전파를 위한 『漢字』를 출판 | ||
− | + | 6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100권을 넘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연구자를 위해 작성된 어려운 것뿐이었다.‘학문의 성과는, 보통의 사람에게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해서 처음으로 일반인들을 위한 책 「漢字」(岩波新書)를 썼는데, 그 책을 통해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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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 『詩経』과 『万葉集』을 새로 지필하였다. |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 『詩経』과 『万葉集』을 새로 지필하였다. | ||
− | + | 고대 동양의 가집(가곡을 모아 편집한 책)인 『詩経』과 『万葉集』에 대한 일반서도 새로 집필하였다. 어린 시절의 『詩経』과 『万葉集』을 읽고 비교하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万葉』에 대한 考説을 시도하는 것은 나의 소원의 하나이다. 처음에 중국의 고대문학에 뜻한 것도,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初期万葉論』 「あとがき」에 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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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br> | ◉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br> | ||
− | + | 시라카와 시즈카의 연구는 원래 일본의 고대를 고찰하는 것에 끝을 내고 있지만, 비교 연구의 필요성으로부터 중국의 고대에 퍼져, 한자 문화권 전체에 걸치는 장대한 연구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또, 이 무렵부터 시라카와 시즈카의 저작이 대만에서 번역되어 출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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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96세'''<br> | '''73 ~ 96세'''<br> | ||
◉역사적 위업이 되는 자서 3부작을 간행 | ◉역사적 위업이 되는 자서 3부작을 간행 | ||
− | + | “한 걸음씩 옮기면 산에서도 옮길 수 있다”. 73세 때, 지금까지의 연구의 정리로서, 글자 작성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매일 같은 페이스로 계속 써, 5만 장을 넘는 원고를 혼자 써 13년 반에 걸쳐 3권의 글을 완성하였다. 총 페이지 수가 3,000페이지를 초과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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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훈장 수장 | ◉문화훈장 수장 | ||
− | + | 2004년, 94세로,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님은 문화 훈장을 수장하였다. 장기간의 한자 연구,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비교 연구에 대한 성과가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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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명관 시라카와 시즈키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 개설 | ◉립 명관 시라카와 시즈키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 개설 | ||
− | + | 2005년, 시라카와 시즈카 자신의 연구 성과의 보급과 동양 문자 문화의 연구 교류의 발전을 목적으로, 입명관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가 개설되었습니다. | |
<ref>[https://www.ritsumei.ac.jp/research/shirakawa/about/introduce/#intro01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요시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ref> | <ref>[https://www.ritsumei.ac.jp/research/shirakawa/about/introduce/#intro01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요시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ref> | ||
2022년 11월 29일 (화) 01:35 판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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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0년 4월 9일, 일본 후쿠야현 |
사망 |
2006년 11월 30일 |
학력 | 교토대학 문학 박사 |
경력 |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
상훈 | 일본 문화훈장(중국고대문화 연구) |
개요
시라카와 시즈카는 일본의 한문 및 한자학자이다.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여 설문해자의 오류를 갑골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특히 갑골문과 금문을 통해 초창기 한자 성립에서 종교적 및 주술적 배경을 밝혀낸 업적이 지대하여, 그의 학문을 '시라카와 문자학'이라 지칭한다.
소개
시라카와 시즈카는 1910년 일본 후쿠야현에서 출생하였으며 리츠메이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교토대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모교인 리츠메이칸대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1976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직을 역임하며, 집필과 학문 연구를 지속하였다. 특히 대만의 굴만리, 동작빈 등의 학자와 교류하였다. 이는 그가 국공내전 중 대만으로 옮겨진 갑골문 자료를 연구하여 독자적인 학문관을 성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90세를 넘긴 노년까지도 학문에 열중하여 많은 저서와 업적을 남겼으며, 2004년 중국고대문화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문화훈장('19년도까지 총 413명만 수상한 권위있는 훈장)을 수상하였다. 이후 2006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
생애
0-35세
◉독서에 몰두한 청춘시대
시라카와 시즈카는 1910년 4월 9일 후쿠이현에서 태어났다. ‘눈이 나빠진다’라고 어머니로부터 주의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독서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13세가 되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오사카의 법률 사무소에서 거주지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또한 그 법률 사무소에는 한문 시집을 비롯한 많은 장서가 있었으며,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법률 사무소에서 하락해주어 시라카와 시즈카는 더욱더 독서에 몰입하였다. 이러한 책들에 열중하면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죽을 때까지 독서를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후에 리츠메이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교토대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문자 연구의 세계로
독서를 진행하는 동안 점점 '동양'이라는 말에 마음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집(가곡을 모아 편집한 책) '만엽집'과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시경'을 비교하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의 고대 문자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 교원을 목표로 하게 된 것이다.
35 ~ 65세
◉ 「サイ」의 발견
트레이싱 페이퍼를 사용해 약 3000년 전의 중국의 고대 문자를 찍었다. 수만 장이나 찍으면서 문자의 성립과 연결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45세 때 '口'가 '입'이 아니라 하나님께 편지를 넣는 그릇 'サイ'임을 발견했습니다. 이 발견을 통해서 한자의 성립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약 2000년간 옳다고 여겨져 온 한자의 해설서인 ‘설문해자’와는 다른 학설을 구축하게 되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발견이었기 때문에 반대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많았다. 외로운 연구였지만, 자신만의 학문의 길을 외롭게 느끼지 않고 좋아하여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 스스로 발표하는 장소로서 「甲骨金文学論叢」을 발행
갑골문자나 금문에는 활자가 없는 글자가 매우 많아 일반학술지에 기고하기에는 큰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스스로 도장 새기는 작은 칼을 잡고 등사기 인쇄라는 발표의 형태를 취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 『甲骨金文学論叢』입니다. ‘역사’ 일자의 성립을 언급한 「釈史」나, 마찬가지로 「文」의 성립을 언급한 「釈文」 등의 논문을 이 자리에서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풍부한 한자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60 ~ 73세
◉ 넓은 한자의 매력을 전파를 위한 『漢字』를 출판
6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100권을 넘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연구자를 위해 작성된 어려운 것뿐이었다.‘학문의 성과는, 보통의 사람에게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해서 처음으로 일반인들을 위한 책 「漢字」(岩波新書)를 썼는데, 그 책을 통해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 『詩経』과 『万葉集』을 새로 지필하였다.
고대 동양의 가집(가곡을 모아 편집한 책)인 『詩経』과 『万葉集』에 대한 일반서도 새로 집필하였다. 어린 시절의 『詩経』과 『万葉集』을 읽고 비교하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万葉』에 대한 考説을 시도하는 것은 나의 소원의 하나이다. 처음에 중국의 고대문학에 뜻한 것도,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初期万葉論』 「あとがき」에 따라)
◉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
시라카와 시즈카의 연구는 원래 일본의 고대를 고찰하는 것에 끝을 내고 있지만, 비교 연구의 필요성으로부터 중국의 고대에 퍼져, 한자 문화권 전체에 걸치는 장대한 연구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또, 이 무렵부터 시라카와 시즈카의 저작이 대만에서 번역되어 출판하였다.
73 ~ 96세
◉역사적 위업이 되는 자서 3부작을 간행
“한 걸음씩 옮기면 산에서도 옮길 수 있다”. 73세 때, 지금까지의 연구의 정리로서, 글자 작성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매일 같은 페이스로 계속 써, 5만 장을 넘는 원고를 혼자 써 13년 반에 걸쳐 3권의 글을 완성하였다. 총 페이지 수가 3,000페이지를 초과하였다.
◉문화훈장 수장
2004년, 94세로,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님은 문화 훈장을 수장하였다. 장기간의 한자 연구,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비교 연구에 대한 성과가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립 명관 시라카와 시즈키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 개설
2005년, 시라카와 시즈카 자신의 연구 성과의 보급과 동양 문자 문화의 연구 교류의 발전을 목적으로, 입명관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가 개설되었습니다.
[2]
학문관
그의 이론은 넷으로 요약된다.
① 한자의 초형(初形)을 통해서 그 초훈(初訓)을 구명한다.
② 한자의 기원과 효용을 제례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③ 한자는 상징이며, 상징을 넘어 사유와 철학의 세계를 낳았다고 본다.
④ 한자의 구조는 본래 체계적이므로 한자를 연구하려면 체계적인 이해 를 시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 예시를 들어 설명하자면, 東은 설문해자에서는 해가 '부상'이라는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된다. 이는 소전을 기준으로 중국인의 가치관에 부합한다. 허나 1900년대에 갑골문과 금문 연구가 진행되며 설문해자의 오류가 발견된다. 갑골문에서는 東이 주머니 탁(囊)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자가 동쪽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은 단순히 '동쪽'과 '주머니'를 뜻하는 어휘의 발음이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는 이렇게 갑골문과 금문에 의거하여 설문해자의 오류를 사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한자는 회화나 모사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징에서 기원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갑골문의 주술적 및 종교적 의미를 밝혀내었다. 이는 다음 한자들의 예시를 통해 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한다. 婦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여자'라는 기존의 설문해자의 해석을 뒤엎고 이를 신전을 정화하는 무녀(媚)라고 해석하였으며, 여러 해석이 난무하였던 告를 단순히 牛와 口의 형성자가 아닌, 신에 대한 축고를 걸어 놓은 그릇 위에 나뭇가지가 꽂혀 있는 모습(나무에 매달린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眉는 그저 눈썹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가 아니라, 주술을 실행하는 무녀가 눈화장을 한 모습을 뜻한다고 주술적 의미에 입각하여 설명하였으며, 기원에 다양한 의견이 있는 帝 또한 꽂받침을 형상화하였다고 정의하며 샤머니즘에 입각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한자가 상징이라는 단순한 문자의 특징을 넘어, 사유와 철학의 세계에 있다는 가치관이다. 따라서 한자는 본래는 표음문자가 아니며, 표음의 기능은 가차나 형성에서 나타났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자의 기원을 갑골을 연구하지 않고 후대의 변형된 자형으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サイ (漢字学)
저서
『중국의 신화』
『중국의 고대문학』
『갑골문의 세계/금문의 세계』
『만엽집』
『갑골 금문학논총』
『공자전』
『한자백화』등
참고자료
1.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의 세계』, 고인덕 역, 솔출판사, 2008.
2.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 기원과 그 배경』, 심경호 역, AK, 2017.
3. 沈慶昊(Sim Kyung-ho).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의 문자학 세계." 동아한학연구 -.1 (2005): 89-108.
4. 시라카와 시즈카, 『漢字 백 가지 이야기』, 심경호 역, 황소자리, 2005.
5. 전창재,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학의 배경과 특징: 한자학의 배경과 언어학적, 한자의 형태 분석적 특성을 바탕으로", 인문예술학회, (2021): 223 -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