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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家자는 집 면(宀)자와 돼지 시([[豕]])자의 [[회의자]]로 집 가운데 돼지가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고대 중국의 주거 형식 가운데 간란(干欄) 가옥이라는 형태가 있다. 이 종류의 집의 가장 큰 특징은 위층에는 사람이 살고 집 아래에는 가축을 우리에 넣고 기를 수 있었다. 사람과 가축이 뒤섞여 사는 것이 간란(干欄) 가옥의 특징이다. 집에 돼지가 있는 것은 한 가정의 기본 상징이었다. <br> | |
− | + | 家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을 가리킨다. 《[[설문해자]]》에서는 집은 거주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갑골문]], [[금문]]의 윗부분은 가옥의 지붕을 나타내고 안쪽은 매우 구체적인 돼지 모양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소전]]에서는 점차 구체적인 돼지의 모양을 잃어갔고, 豕자로 고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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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는 집에 돼지가 있는 형상이다. 현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집안에 돼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고대의 보편적인 가옥구조를 살펴보면 이것이 왜 '집'을 의미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br> | 家는 집에 돼지가 있는 형상이다. 현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집안에 돼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고대의 보편적인 가옥구조를 살펴보면 이것이 왜 '집'을 의미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br> | ||
− | 돼지는 일찍이 가축으로써 사육된 동물이다. 돼지는 인분까지도 먹을 수 있는 잡식성인데다가 가죽과 많은 양의 고기를 제공하기에 유용한 가축으로 사육되어 왔다. 성격을 온순하게 하고 살이 쉽게 찌도록 만들기 위해서 돼지를 거세하였는데, 이 때문에 면역력이 약해져 비바람으로부터 돼지를 보호해야했다. 또 중국의 화남(華南)지역은 습기와 비가 많은 지역이며, 지표면이 축축하여 거주하기 적합하지 못하였다. 하여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말뚝 위에 가옥을 건설을 했고 가옥 아래에 돼지를 키웠다. 이를 | + | 돼지는 일찍이 가축으로써 사육된 동물이다. 돼지는 인분까지도 먹을 수 있는 잡식성인데다가 가죽과 많은 양의 고기를 제공하기에 유용한 가축으로 사육되어 왔다. 성격을 온순하게 하고 살이 쉽게 찌도록 만들기 위해서 돼지를 거세하였는데, 이 때문에 면역력이 약해져 비바람으로부터 돼지를 보호해야했다. 또 중국의 화남(華南)지역은 습기와 비가 많은 지역이며, 지표면이 축축하여 거주하기 적합하지 못하였다. 하여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말뚝 위에 가옥을 건설을 했고 가옥 아래에 돼지를 키웠다. 이를 간란(干欄)가옥이라고 하며, [[신석기시대]] [[하모도문화]]유적지에서 그 터가 발굴되었다. <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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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에서는 | + | 돼지는 단순히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사육되었으므로 더 살찌우기 위해 종종 거세를 하였다. 그러나 거세한 뒤에는 돼지의 신체가 나약해져서 비바람을 피할 수 없는 노천 울타리에서는 사육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돼지는 항상 인간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지붕이 있는 곳에서 사육되었다. 한나라 때의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던 모형 돼지 우리에는 대부분 지붕이 있으나, 소와 양의 모형 우리에는 지붕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ref>許進雄,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지식산업사, 1993, 76p</ref> <br> |
+ | 양과 함께 돼지가 주요 식재료가 된 것은 중국 정치 경제의 중심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대 사대부는 종묘를 따로 세우지 않고 실내에 제품을 진열하였다. 따라서 집을 나타내는 宀(집 면)과 그 제품을 나타내는 豕(돼지 시)를 조합하여 家(집 가)자를 만든 것이다. “대부는 부유하니, 정권이 장차 그들에게 가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家(집 가)’는 사대부가 정무를 보던 곳이며, 그 자형 안에 포함된 豕(돼지 시)는 그들이 주로 사용한 제품이다.<ref> 왕닝, 『설문해자와 중국고대문화』, 학고방, 204 ~ 205p</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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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에서는 집 면(宀)자 아래 글자가 돼지가 아닌 개 견([[犬]])자라는 주장이 있다. 고대에 개는 제기를 정화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제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축문을 나열하여 희생짐승인 개로 정화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가설은 家의 자형 변화 과정 중 宀아래 있는 글자가 돼지로 굳어져가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남는다.<ref>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의 세계, p.237</ref><br> | ||
또 다른 해석은 家자는 아예 돼지우리를 나타낸 회의자였는데, 그 모양이 비슷하여 후에 사람이 사는 집의 뜻으로 차용되었다는 설도 있다.<ref> 이돈주, 한자․한어의 창으로 보는 중국 고대문화, p.142</ref> | 또 다른 해석은 家자는 아예 돼지우리를 나타낸 회의자였는데, 그 모양이 비슷하여 후에 사람이 사는 집의 뜻으로 차용되었다는 설도 있다.<ref> 이돈주, 한자․한어의 창으로 보는 중국 고대문화, p.142</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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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상의 유파를 지칭하기도 하며,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를 뜻하기도 한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8, 6P</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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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6일 (금) 13:42 기준 최신판
語源
家자는 집 면(宀)자와 돼지 시(豕)자의 회의자로 집 가운데 돼지가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고대 중국의 주거 형식 가운데 간란(干欄) 가옥이라는 형태가 있다. 이 종류의 집의 가장 큰 특징은 위층에는 사람이 살고 집 아래에는 가축을 우리에 넣고 기를 수 있었다. 사람과 가축이 뒤섞여 사는 것이 간란(干欄) 가옥의 특징이다. 집에 돼지가 있는 것은 한 가정의 기본 상징이었다.
家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을 가리킨다. 《설문해자》에서는 집은 거주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갑골문, 금문의 윗부분은 가옥의 지붕을 나타내고 안쪽은 매우 구체적인 돼지 모양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소전에서는 점차 구체적인 돼지의 모양을 잃어갔고, 豕자로 고정되었다.
文化
家는 집에 돼지가 있는 형상이다. 현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집안에 돼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고대의 보편적인 가옥구조를 살펴보면 이것이 왜 '집'을 의미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돼지는 일찍이 가축으로써 사육된 동물이다. 돼지는 인분까지도 먹을 수 있는 잡식성인데다가 가죽과 많은 양의 고기를 제공하기에 유용한 가축으로 사육되어 왔다. 성격을 온순하게 하고 살이 쉽게 찌도록 만들기 위해서 돼지를 거세하였는데, 이 때문에 면역력이 약해져 비바람으로부터 돼지를 보호해야했다. 또 중국의 화남(華南)지역은 습기와 비가 많은 지역이며, 지표면이 축축하여 거주하기 적합하지 못하였다. 하여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말뚝 위에 가옥을 건설을 했고 가옥 아래에 돼지를 키웠다. 이를 간란(干欄)가옥이라고 하며, 신석기시대 하모도문화유적지에서 그 터가 발굴되었다.
돼지는 단순히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사육되었으므로 더 살찌우기 위해 종종 거세를 하였다. 그러나 거세한 뒤에는 돼지의 신체가 나약해져서 비바람을 피할 수 없는 노천 울타리에서는 사육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돼지는 항상 인간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지붕이 있는 곳에서 사육되었다. 한나라 때의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던 모형 돼지 우리에는 대부분 지붕이 있으나, 소와 양의 모형 우리에는 지붕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1]
양과 함께 돼지가 주요 식재료가 된 것은 중국 정치 경제의 중심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대 사대부는 종묘를 따로 세우지 않고 실내에 제품을 진열하였다. 따라서 집을 나타내는 宀(집 면)과 그 제품을 나타내는 豕(돼지 시)를 조합하여 家(집 가)자를 만든 것이다. “대부는 부유하니, 정권이 장차 그들에게 가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家(집 가)’는 사대부가 정무를 보던 곳이며, 그 자형 안에 포함된 豕(돼지 시)는 그들이 주로 사용한 제품이다.[2]
한편에서는 집 면(宀)자 아래 글자가 돼지가 아닌 개 견(犬)자라는 주장이 있다. 고대에 개는 제기를 정화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제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축문을 나열하여 희생짐승인 개로 정화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가설은 家의 자형 변화 과정 중 宀아래 있는 글자가 돼지로 굳어져가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남는다.[3]
또 다른 해석은 家자는 아예 돼지우리를 나타낸 회의자였는데, 그 모양이 비슷하여 후에 사람이 사는 집의 뜻으로 차용되었다는 설도 있다.[4]
학술상의 유파를 지칭하기도 하며,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를 뜻하기도 한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