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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개요== | |
− | + | 5대 10국 시기를 거쳐 당 왕조의 정치와 제도를 계승한 '''송 왕조'''는 시기별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눌 수 있다. 북송은 피를 흘리지 않은 병변(兵變)형식으로 탄생한 왕조로, 중국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다. 북송은 개봉(開封)에 도읍을, 남송은 임안(臨安)에 도읍을 정했다. 지식과 발명의 시대이고, 엄청난 상업과 경제의 발달로 돈으로 주변국과의 평화를 유지한 나라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은 이런 발전을 사회 계급의 전환을 불러오는 것까지의 과정은 다소 부족했다. 또한 문치주의로 인해 군사력이 약했다는 것도 송의 한 가지 약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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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 | ||
+ | === 북송 === | ||
+ | [[파일:북송시대 영역도.png|400픽셀|오른쪽|섬네일|북송시대 영역도]] | ||
+ | ==== 송의 성립 ==== | ||
+ | 당의 멸망부터 송의 건국까지를 [[오대십국]]의 분열시대라 칭한다. 이 시기 오대의 영주라 불리우던 후주의 군주 세종이 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나 급사하였다. 그 후 세종의 친위 대장이었던 조광윤이 [[진교의 변]]을 통해 후주의 공제로부터 황제자리를 넘겨받아 송의 태조가 되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는 중앙의 금군을 복속시켰으며 관료조직의 질서를 정돈해 황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오대방식의 할거정권을 답습하지 않고 국책을 전략적으로 바꾸어 통일 왕조의 문을 열었다. | ||
− | + | ==== 송의 통일 ==== | |
+ | 건국 당시 송조의 영역은 중국전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남방에는 오월, 남당, 형남, 호남, 남한, 천주가 있었으며 사천에는 후촉, 북방의 산서지방에는 북한이 있었고 연운십육주도 요의 지배아래 있었다. 송은 선남후북책을 택하여 북방에서 요나라와의 소모전을 포기하고 남하하여 남방의 자주국들을 정복했다. 후세의 역사가는 태조의 통일 정책에 대해 강국을 뒤로하는 그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연운십육주를 끝내 탈환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북송을 수복하겠다는 몽상에 비해 실질적 이익이 훨씬 큰 결정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br> | ||
+ | 송은 우선 형남과 호남 두 나라를 토벌 후 후촉을 정복하였다. 이어 남한을 병합하고 남당을 멸망시켰다. 남당을 평정한 후 태조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였으나 통일 사업은 태종에 의해 계속되었다. 987년 오월의 항복을 마지막으로 남방의 국가를 병합하였으며 979년에는 북한을 멸망시켜 통일을 완수하였다.<br> | ||
+ | 태조와 그의 동생 태종의 시대는 송조의 제도 확립기로서 과거제와 모병제, 문신 관료의 채택, 강남지방의 개발 등 당대와는 다른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어냈다. 소극적인 문치주의정책을 펼친 송은 북방의 유목민족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특히 두각을 나타낸 것은 거란족이 건립한 요나라였는데, 이후 송과 대립하며 남북이 대치하는 국제관계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다. 요나라의 침략에 진종은 전언의 맹약을 하여 화의를 맺었으며, 서쪽의 서하에게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그 결과 평화가 도래해 북송의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한 재정과 세수의 문제로 왕안석을 등용하여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을 계기로 당쟁이 격렬하게 증가하여 송나라의 국력을 기울게 하였다. 결국 북송은 여진족의 금나라에 의하여 침략을 받고 멸망한다. | ||
− | + | === 남송 === | |
+ | [[파일:남송시대 영역도.png|400픽셀|오른쪽|섬네일|남송시대 영역도]] | ||
+ | 여진족이 건국한 금에 의해 북송이 멸망하자 조구는 1127년 임안(항저우)에서 즉위하여 고종이 되었고, 남송을 건국했다. <br> | ||
+ | 이후 남송과 금은 공방전을 계속했지만 모두 결정적인 계기를 얻지 못했다. 금 측은 인구가 많은 농경지대인 화북을 일거에 지배할 수 없어 한인관료를 이용한 괴뢰정권인 초와 제를 세웠지만 화북을 장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송 측도 악비등의 의병이 항쟁을 계속했으나 진회가 주전론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고 악비를 살해하였다. <br> | ||
+ | 이러한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교섭이 진행된 결과, 1142년에 회수와 섬서성 대산관에 이르는 선을 국경으로 하여 화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이에 따라 송은 금의 책봉을 받아 신하의 예를 취했다. 또한 매년 은 25만냥과 비단 25만필을 세폐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이는 남송에게는 치욕적인 화의였지만 평화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었다.<br> | ||
+ |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다. 남송은 영토와 인구에 있어 비록 북송의 5분의 3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대신 비옥한 강남지역의 개발에 주력해 생산력은 오히려 북송시기를 능가하였다. 또한 군사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북송의 문화적 전통과 경제적 풍요를 이어받을 수 있어 150년동안 국가를 유지하였다. <br> | ||
+ | 그러나 남송에게는 북송에서 물려받은 대토지 소유의 진행으로 인한 토지소유의 불균형과 북방의 이민족이라는 위협이 여전히 존재했다. 불안정한 대외관계와 황제권의 약화로 인해 권신들의 정치전횡이 계속되었다. 명분론과 공명심에 사로잡힌 위정자들은 새로이 등장한 몽골과 연합해 금조를 공략한다는 군사적 모험을 감행했다. 북송 말에 금이 대두하면서 금과 연합해 요를 공격하다 오히려 북송이 멸망한 외교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후 금이라는 완충역을 상실한 남송은 몽골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였고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 ||
+ | == 문치주의와 과거제 == | ||
+ | 송나라는 무(武)가 아닌 문(文), 즉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형태인 문치주의를 국책으로 삼았다. 당대와는 다른 새로운 국가체제를 바랬던 송나라는 중앙집권적 문신관료제를 채택했다. 당 말 중앙 정부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던 군사령관인 [[절도사]]와 같은 세력의 재현을 막기 위해서 중앙집권을 중시했으며 이 중앙집권 하에서 문신관료들이 전국적으로 지방의 행정 및 재정을 관리했다. | ||
+ | 이러한 문신관료들의 공급을 위해 시행되었던 제도가 바로 과거다. [[태조]] 때에는 1회에 열 몇 명에 지나지 않던 과거 합격자수를 수백 명으로 늘렸다. 또한 태조가 직접 과거의 최종시험을 행한 이 후 전시(展試)가 되면서 과거합격자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다. 이렇게 과거제가 문신관료로 가는 길이 되면서 시험의 객관성 및 공정성을 위해 답안의 이름 난을 봉하는 호명법, 필적에 의한 부정방지를 위해 제출된 답을 모두 옮겨 적어 채점을 하는 등록법 등이 실시되어 과거제는 더욱 권위 있는 시험이 되었다. | ||
+ | 하지만 과거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회의 평등성이 점차 사라지고, 우월한 가정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인맥에 의해 합격자가 선발되었다. 또한 이렇게 과거와 같은 문(文)을 중시하고 군사력을 대표하는 무(武)를 경시하는 중문경무 정책을 사용하면서 전쟁에서도 문관이 군대를 지휘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렇게 과도한 문치주의를 표방해 국책으로 삼으면서 군사력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송나라는 결국 외국의 침략을 한 번도 막아내지 못한 채 국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 ||
+ | === 왕안석의 개혁 === | ||
+ | 11세기 중반에 즉위한 신종(新宗)은 강서의 관료집안 출신인 왕안석의 신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개혁을 단행했다. 왕안석의 신법은 크게 부국을 위한 재정, 농촌진흥, 강병을 위한 군사, 교육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부국책은 물가를 조절하기 위한 균수법, 농민에게 영농 자금을 빌려주는 청묘법, 상인에게 자본금을 대출해주는 시역법, [[균역법]]이 있다. 농촌진흥책에는 어전사라는 관청 하에 증수기의 하천진흙을 이용하여 토질을 개선시키는 어전법,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개선하는 농전수리법, 토지를 정확히 측량하여 조세 부담을 균등하게 한 방전균세법이 있다. 그리고 강병책에는 관에서 지급한 말을 백성이 직접 키우는 보갑양마법(보마법), 변방의 방비를 강화시키는 장병법, 기준에 따라 군사 훈련 및 경찰을 하는 [[보갑법]]이 있다. 마지막으로 교육에는 학교 교육으로 과거제를 대체하려는 태학삼사법, 서리에게 수수료 대신 봉록을 지불하고 서리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창법 등이 있다. | ||
+ |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수많은 관료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쓰인 많은 비용 등이 배경이 되어 단행된 왕안석의 신법은 재정수지가 흑자를 넘어서 막대한 경제적 잉여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보수적 사대부들은 급격한 변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소상인과 소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왕안석의 신법이 국가적 측면의 재정과 군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적인 개혁이라는 점에서 혁신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계층을 모두 만족 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 ||
− | == | + | == 부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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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발전 === | === 경제발전 === | ||
− | 송의 영토를 보면 가로로 긴 강과 넓은 삼각 지대를 볼 수 있다. 특히 남송의 남방 이전으로 인해 풍족한 경작지와 수운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삼아 직물과 금속 가공 등의 소공업도 점점 번영을 누려갔다. | + | 송의 영토를 보면 가로로 긴 강과 넓은 삼각 지대를 볼 수 있다. 특히 남송의 남방 이전으로 인해 풍족한 경작지와 수운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삼아 직물과 금속 가공 등의 소공업도 점점 번영을 누려갔다. 또 송 왕조는 상품 경제가 발달하고 도시 생활은 번화했다. 송대에 들어 [[성시]]의 개념의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개봉의 성시 전체가 상업분위기로 물들었다. 이에 정부는 금수하를 성시안으로 끌어들여 공공 식수로 제공하는 것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락과 서비스 업종이 상품화되어 전문 오락장과 공연 장소인 '구란(句欄)과 와사(瓦肆)과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번화했을 때 개봉의 인구는 당대의 장안성보다 1.5배 많았다. 이런 영향을 받아 각지에서 비정치적인 순수 상업 성시, 즉 진시(鎭市)가 출현했다. 그것의 전신(前身)은 백성들이 약속을 정해 놓고 열었던 초시(草市)였다. 이러한 번영은 성시기능의 송의 비교적 긴 평화기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남송은 반쪽 강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6000만 명에 이르러 성당 시대를 방불케 했다. 송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상인의 지위도 송대에 크게 향상되었다. 정보도 너그러운 정책으로 상인이 과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상인은 이제 더 이상 관기(官妓)나 거지와 함께 분류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동업 조직인 '행단(行團)'도 송대에 형성되었다. 상업의 번영은 화폐 부족 현상인 '전황(錢荒)을 초래하여 동전으로 유통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자 철로 만든 화폐와 세계 최초의 지폐'[[교자]](交子)' 등장했다. 지폐 출현의 기술적 배경은 대외 무역의 재도약이었다. '해외 비단길'이 대외 무역의 주요 노선이 되었으며, 수출 상품 중 자기는 중국의 가장 특징적인 상품이었다. 이 와중에 [[왕안석]]의 경제사상이 등장했다. |
=== 문화 === | === 문화 === | ||
− | 역대급 경제 호황과 | + | 역대급 경제 호황과 문치주의의 영향으로 송의 문화는 발전양상을 보인다. '사(詞)'는 본래 민간에서 유행한 속요에 지나지 않았으나 송대에 들어 새로운 예술 체제로 탈바꿈했다. 북송의 '사(詞)'는 감정이 섬세하게 반영된 풍격을 구비하여 '일절(一絶)'이라고 칭해졌다. 송사와 함께 산수화가 발달했다. 북송의 산수화에는 객관적이고 풍부한 표현법이 사용되었다면, 남송에 들어서는 대치 상황으로부터의 안정을 바라는 사회심리적인 요소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있다. 고문이나 통속 문학, 희극, 설창(說唱) 예술도 급격히 발전했다. [[활자인쇄술]]ㆍ화약ㆍ나침반의 3대 발명품은 북송 시대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상징한다. 남송에 들어 도자기 제조, 제지업, 인쇄업은 북송을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한다. 또한 남송 시대에 [[주희]](1130-1200년)는 백록동 서원을 창립하고 이학(理學)을 선전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민학(閩學)'학파를 창립했다. |
− | == | + | == 대외관계 == |
− | === | + | === 북송과 서하, 요 === |
송이 건국된 10세기 초,중기는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지나친 문치주의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송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꾸준한 위협과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당과 밀접했던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성립되었다. 이 시기에 특히 두각을 나타낸 것은 거란족이 건립한 요나라였는데 이후 송과 대립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제관계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다. | 송이 건국된 10세기 초,중기는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지나친 문치주의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송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꾸준한 위협과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당과 밀접했던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성립되었다. 이 시기에 특히 두각을 나타낸 것은 거란족이 건립한 요나라였는데 이후 송과 대립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제관계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다. | ||
− | [[거란]]은 10세기초 | + | [[거란]]은 10세기초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이 8대 부족으로 나뉘어있던 부족을 통합하고 전제적인 권력을 확립하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이후 당이 멸망한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요(遼)를 건국하였다. 요의 성종은 994년 고려를 굴복시킨 후 계속해서 남진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송 역시 당시 국정의 최고과제가 장성 이남의 연운십육주의 회복인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황하의 전주 지방에서 송과 요가 대치하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결국 ‘[[전연의 맹약]]’이라는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후 송과 요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
− | 동북방의 요와 함께 송을 위협한 것은 서북방의 [[ | + | 동북방의 요와 함께 송을 위협한 것은 서북방의 [[탕쿠트족]]이 건립한 [[서하]](西夏)였다. 이원호는 탕쿠트 내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서하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원호는 송조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서북지방에 침입하면서 양국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송은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투입하고 명신으로 유명한 [[범중엄]]과 한기를 전선에 파견해 방어했지만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약 7년간의 장기적인 소모전이 계속되자 송은 막대한 군사비와 이 틈을 노린 요의 침입이 우려되기 시작하였고, 서하는 전쟁비용의 부담과 송조의 경계봉쇄에 따른 물자결핍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어 1044년 송과 요 사이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서하가 송에 신하의 예를 갖추는 대신 송은 매년 세폐로서 은 5만 냥과 비단 13만 필, 차 2만 근을 지급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해 교역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이 평화조약에 의해 서하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재정이 극도로 고갈되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하의 침입을 받았다. |
거란족의 요가 11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이때 요의 배후지역인 만주에서는 퉁구스계인 여진족이 일어났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은 1115년 아골타(阿骨打)가 금을 건국하면서 요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요는 대군을 보내 금을 공격하였지만 요와의 전쟁에서 금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금은 남하하여 요동을 공략하고 요의 본거지인 요서로 진격하였다. 금이 이렇게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맹안모극제]]라는 특유의 제도 덕이 컸다. 금의 세력이 요동에 미치자 송조는 금에게 요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였다. 이후 금군은 요군에 대패하였고 이로써 요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 거란족의 요가 11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이때 요의 배후지역인 만주에서는 퉁구스계인 여진족이 일어났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은 1115년 아골타(阿骨打)가 금을 건국하면서 요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요는 대군을 보내 금을 공격하였지만 요와의 전쟁에서 금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금은 남하하여 요동을 공략하고 요의 본거지인 요서로 진격하였다. 금이 이렇게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맹안모극제]]라는 특유의 제도 덕이 컸다. 금의 세력이 요동에 미치자 송조는 금에게 요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였다. 이후 금군은 요군에 대패하였고 이로써 요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 ||
− | === 북송의 | + | === 남송과 금 === |
+ | 북송 때 국경을 접하며 여러 교류와 교전을 통해 송나라의 무능에 대해 알게 된 금나라는 남침하여 정복하고자 하는 계획을 도모했다. 금나라는 그들의 군대를 이끌어 동서로 북송을 압박하여 북송의 멸망을 이끌어냈다. 이때 금나라에게 투항서를 보내 송나라의 끝을 맞이했던 왕은 [[흠종]]이었다. | ||
+ | 이후 휘종과 흠종을 붙잡아 간 금나라는 장방창을 초제로 세워 한족을 다스리려했다. 그래서 금나라의 장방창 괴뢰정권이 수립되었다. 금나라의 군대가 돌아간 후 송의 신하들이 장방창을 설득하여 제호를 포기하도록 했다. 이후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남송의 건국을 이끌도록 했다. 조구는 1127년 남경에서 즉위하여 남송이라는 나라의 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남송과 금나라는 서로 각각 북벌과 남침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약 20년간의 전쟁 끝에 그들은 화의를 맺었다. 이는 20년간 유지되었다. 1162년 금나라의 60만군의 남침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대응하여 북벌을 하려던 주전파의 입장을 주화파의 요구로 인해 다시금 40년간 충돌이 없는 상태로 두 나라가 지속되었다. 1206년 송나라의 한탁주가 북벌을 도모하였다. 이를 [[개희의 북벌]]이라 한다. 그러나 송군이 패배하여 남송은 한탁주를 죽이고 다시금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이후 60년간 서로는 잘 지냈다. 그런데 몽골족이 금나라를 정벌하려 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상황은 악화되어갔고, 이를 기회로 삼은 송나라는 몽골과 손을 잡아 금을 정벌하였다. 이후 황하 이남의 땅의 소유에 대한 약속을 어긴 몽골은 그들의 군대로 남송군을 급습하였고 남송군은 패배하였다. 이후 1257년 몽골군의 몽케 칸이 사망하자 다시금 화의를 체결하였다. 이 화의가 이어진 것은 10년 밖에 되지 않았다. 1267년 몽골의 수장 계승문제가 해결 되자 다시 남송을 공격하였다. 이후 1268년부터 1279년까지 남송의 [[문천상]]을 필두로해서 송나라의 거센 반격에도 몽골은 결국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남송이 멸망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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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참고문헌 == | ||
+ | * 풍국초,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중국 상하오천년사 >>, 이원길 역, 신원문화사, 2005 | ||
+ | * <<세계 각국사 시리즈 중국사(하)>>, 신승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 ||
+ |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 2014 | ||
+ | * <<중국역사박물관6>>, 강영매, 중국사학회, 2001 | ||
+ | * <<인물로 보는 중국역사>>, 정성환 역, 신원문화사, 1995 | ||
+ | *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05 중국사 (하)>>, 맥세계사편찬위원회, 느낌이 있는 책, 2014 | ||
+ | * 이근명, <<중국역사>>, 신서원, 2002 | ||
+ | * 저우스펀, <<중국사강의>>, 김영수 역, 돌베개, 2006 | ||
+ | |||
+ | [[분류:송나라| ]] |
2016년 6월 27일 (월) 17:26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5대 10국 시기를 거쳐 당 왕조의 정치와 제도를 계승한 송 왕조는 시기별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눌 수 있다. 북송은 피를 흘리지 않은 병변(兵變)형식으로 탄생한 왕조로, 중국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다. 북송은 개봉(開封)에 도읍을, 남송은 임안(臨安)에 도읍을 정했다. 지식과 발명의 시대이고, 엄청난 상업과 경제의 발달로 돈으로 주변국과의 평화를 유지한 나라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은 이런 발전을 사회 계급의 전환을 불러오는 것까지의 과정은 다소 부족했다. 또한 문치주의로 인해 군사력이 약했다는 것도 송의 한 가지 약점이다.
역사
북송
송의 성립
당의 멸망부터 송의 건국까지를 오대십국의 분열시대라 칭한다. 이 시기 오대의 영주라 불리우던 후주의 군주 세종이 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나 급사하였다. 그 후 세종의 친위 대장이었던 조광윤이 진교의 변을 통해 후주의 공제로부터 황제자리를 넘겨받아 송의 태조가 되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는 중앙의 금군을 복속시켰으며 관료조직의 질서를 정돈해 황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오대방식의 할거정권을 답습하지 않고 국책을 전략적으로 바꾸어 통일 왕조의 문을 열었다.
송의 통일
건국 당시 송조의 영역은 중국전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남방에는 오월, 남당, 형남, 호남, 남한, 천주가 있었으며 사천에는 후촉, 북방의 산서지방에는 북한이 있었고 연운십육주도 요의 지배아래 있었다. 송은 선남후북책을 택하여 북방에서 요나라와의 소모전을 포기하고 남하하여 남방의 자주국들을 정복했다. 후세의 역사가는 태조의 통일 정책에 대해 강국을 뒤로하는 그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연운십육주를 끝내 탈환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북송을 수복하겠다는 몽상에 비해 실질적 이익이 훨씬 큰 결정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송은 우선 형남과 호남 두 나라를 토벌 후 후촉을 정복하였다. 이어 남한을 병합하고 남당을 멸망시켰다. 남당을 평정한 후 태조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였으나 통일 사업은 태종에 의해 계속되었다. 987년 오월의 항복을 마지막으로 남방의 국가를 병합하였으며 979년에는 북한을 멸망시켜 통일을 완수하였다.
태조와 그의 동생 태종의 시대는 송조의 제도 확립기로서 과거제와 모병제, 문신 관료의 채택, 강남지방의 개발 등 당대와는 다른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어냈다. 소극적인 문치주의정책을 펼친 송은 북방의 유목민족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특히 두각을 나타낸 것은 거란족이 건립한 요나라였는데, 이후 송과 대립하며 남북이 대치하는 국제관계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다. 요나라의 침략에 진종은 전언의 맹약을 하여 화의를 맺었으며, 서쪽의 서하에게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그 결과 평화가 도래해 북송의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한 재정과 세수의 문제로 왕안석을 등용하여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을 계기로 당쟁이 격렬하게 증가하여 송나라의 국력을 기울게 하였다. 결국 북송은 여진족의 금나라에 의하여 침략을 받고 멸망한다.
남송
여진족이 건국한 금에 의해 북송이 멸망하자 조구는 1127년 임안(항저우)에서 즉위하여 고종이 되었고, 남송을 건국했다.
이후 남송과 금은 공방전을 계속했지만 모두 결정적인 계기를 얻지 못했다. 금 측은 인구가 많은 농경지대인 화북을 일거에 지배할 수 없어 한인관료를 이용한 괴뢰정권인 초와 제를 세웠지만 화북을 장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송 측도 악비등의 의병이 항쟁을 계속했으나 진회가 주전론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고 악비를 살해하였다.
이러한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교섭이 진행된 결과, 1142년에 회수와 섬서성 대산관에 이르는 선을 국경으로 하여 화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이에 따라 송은 금의 책봉을 받아 신하의 예를 취했다. 또한 매년 은 25만냥과 비단 25만필을 세폐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이는 남송에게는 치욕적인 화의였지만 평화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었다.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다. 남송은 영토와 인구에 있어 비록 북송의 5분의 3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대신 비옥한 강남지역의 개발에 주력해 생산력은 오히려 북송시기를 능가하였다. 또한 군사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북송의 문화적 전통과 경제적 풍요를 이어받을 수 있어 150년동안 국가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남송에게는 북송에서 물려받은 대토지 소유의 진행으로 인한 토지소유의 불균형과 북방의 이민족이라는 위협이 여전히 존재했다. 불안정한 대외관계와 황제권의 약화로 인해 권신들의 정치전횡이 계속되었다. 명분론과 공명심에 사로잡힌 위정자들은 새로이 등장한 몽골과 연합해 금조를 공략한다는 군사적 모험을 감행했다. 북송 말에 금이 대두하면서 금과 연합해 요를 공격하다 오히려 북송이 멸망한 외교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후 금이라는 완충역을 상실한 남송은 몽골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였고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문치주의와 과거제
송나라는 무(武)가 아닌 문(文), 즉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형태인 문치주의를 국책으로 삼았다. 당대와는 다른 새로운 국가체제를 바랬던 송나라는 중앙집권적 문신관료제를 채택했다. 당 말 중앙 정부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던 군사령관인 절도사와 같은 세력의 재현을 막기 위해서 중앙집권을 중시했으며 이 중앙집권 하에서 문신관료들이 전국적으로 지방의 행정 및 재정을 관리했다. 이러한 문신관료들의 공급을 위해 시행되었던 제도가 바로 과거다. 태조 때에는 1회에 열 몇 명에 지나지 않던 과거 합격자수를 수백 명으로 늘렸다. 또한 태조가 직접 과거의 최종시험을 행한 이 후 전시(展試)가 되면서 과거합격자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다. 이렇게 과거제가 문신관료로 가는 길이 되면서 시험의 객관성 및 공정성을 위해 답안의 이름 난을 봉하는 호명법, 필적에 의한 부정방지를 위해 제출된 답을 모두 옮겨 적어 채점을 하는 등록법 등이 실시되어 과거제는 더욱 권위 있는 시험이 되었다. 하지만 과거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회의 평등성이 점차 사라지고, 우월한 가정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인맥에 의해 합격자가 선발되었다. 또한 이렇게 과거와 같은 문(文)을 중시하고 군사력을 대표하는 무(武)를 경시하는 중문경무 정책을 사용하면서 전쟁에서도 문관이 군대를 지휘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렇게 과도한 문치주의를 표방해 국책으로 삼으면서 군사력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송나라는 결국 외국의 침략을 한 번도 막아내지 못한 채 국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왕안석의 개혁
11세기 중반에 즉위한 신종(新宗)은 강서의 관료집안 출신인 왕안석의 신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개혁을 단행했다. 왕안석의 신법은 크게 부국을 위한 재정, 농촌진흥, 강병을 위한 군사, 교육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부국책은 물가를 조절하기 위한 균수법, 농민에게 영농 자금을 빌려주는 청묘법, 상인에게 자본금을 대출해주는 시역법, 균역법이 있다. 농촌진흥책에는 어전사라는 관청 하에 증수기의 하천진흙을 이용하여 토질을 개선시키는 어전법,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개선하는 농전수리법, 토지를 정확히 측량하여 조세 부담을 균등하게 한 방전균세법이 있다. 그리고 강병책에는 관에서 지급한 말을 백성이 직접 키우는 보갑양마법(보마법), 변방의 방비를 강화시키는 장병법, 기준에 따라 군사 훈련 및 경찰을 하는 보갑법이 있다. 마지막으로 교육에는 학교 교육으로 과거제를 대체하려는 태학삼사법, 서리에게 수수료 대신 봉록을 지불하고 서리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창법 등이 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수많은 관료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쓰인 많은 비용 등이 배경이 되어 단행된 왕안석의 신법은 재정수지가 흑자를 넘어서 막대한 경제적 잉여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보수적 사대부들은 급격한 변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소상인과 소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왕안석의 신법이 국가적 측면의 재정과 군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적인 개혁이라는 점에서 혁신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계층을 모두 만족 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부흥
경제발전
송의 영토를 보면 가로로 긴 강과 넓은 삼각 지대를 볼 수 있다. 특히 남송의 남방 이전으로 인해 풍족한 경작지와 수운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삼아 직물과 금속 가공 등의 소공업도 점점 번영을 누려갔다. 또 송 왕조는 상품 경제가 발달하고 도시 생활은 번화했다. 송대에 들어 성시의 개념의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개봉의 성시 전체가 상업분위기로 물들었다. 이에 정부는 금수하를 성시안으로 끌어들여 공공 식수로 제공하는 것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락과 서비스 업종이 상품화되어 전문 오락장과 공연 장소인 '구란(句欄)과 와사(瓦肆)과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번화했을 때 개봉의 인구는 당대의 장안성보다 1.5배 많았다. 이런 영향을 받아 각지에서 비정치적인 순수 상업 성시, 즉 진시(鎭市)가 출현했다. 그것의 전신(前身)은 백성들이 약속을 정해 놓고 열었던 초시(草市)였다. 이러한 번영은 성시기능의 송의 비교적 긴 평화기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남송은 반쪽 강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6000만 명에 이르러 성당 시대를 방불케 했다. 송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상인의 지위도 송대에 크게 향상되었다. 정보도 너그러운 정책으로 상인이 과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상인은 이제 더 이상 관기(官妓)나 거지와 함께 분류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동업 조직인 '행단(行團)'도 송대에 형성되었다. 상업의 번영은 화폐 부족 현상인 '전황(錢荒)을 초래하여 동전으로 유통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자 철로 만든 화폐와 세계 최초의 지폐'교자(交子)' 등장했다. 지폐 출현의 기술적 배경은 대외 무역의 재도약이었다. '해외 비단길'이 대외 무역의 주요 노선이 되었으며, 수출 상품 중 자기는 중국의 가장 특징적인 상품이었다. 이 와중에 왕안석의 경제사상이 등장했다.
문화
역대급 경제 호황과 문치주의의 영향으로 송의 문화는 발전양상을 보인다. '사(詞)'는 본래 민간에서 유행한 속요에 지나지 않았으나 송대에 들어 새로운 예술 체제로 탈바꿈했다. 북송의 '사(詞)'는 감정이 섬세하게 반영된 풍격을 구비하여 '일절(一絶)'이라고 칭해졌다. 송사와 함께 산수화가 발달했다. 북송의 산수화에는 객관적이고 풍부한 표현법이 사용되었다면, 남송에 들어서는 대치 상황으로부터의 안정을 바라는 사회심리적인 요소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있다. 고문이나 통속 문학, 희극, 설창(說唱) 예술도 급격히 발전했다. 활자인쇄술ㆍ화약ㆍ나침반의 3대 발명품은 북송 시대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상징한다. 남송에 들어 도자기 제조, 제지업, 인쇄업은 북송을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한다. 또한 남송 시대에 주희(1130-1200년)는 백록동 서원을 창립하고 이학(理學)을 선전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민학(閩學)'학파를 창립했다.
대외관계
북송과 서하, 요
송이 건국된 10세기 초,중기는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지나친 문치주의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송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꾸준한 위협과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당과 밀접했던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성립되었다. 이 시기에 특히 두각을 나타낸 것은 거란족이 건립한 요나라였는데 이후 송과 대립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제관계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다.
거란은 10세기초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이 8대 부족으로 나뉘어있던 부족을 통합하고 전제적인 권력을 확립하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이후 당이 멸망한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요(遼)를 건국하였다. 요의 성종은 994년 고려를 굴복시킨 후 계속해서 남진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송 역시 당시 국정의 최고과제가 장성 이남의 연운십육주의 회복인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황하의 전주 지방에서 송과 요가 대치하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결국 ‘전연의 맹약’이라는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후 송과 요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동북방의 요와 함께 송을 위협한 것은 서북방의 탕쿠트족이 건립한 서하(西夏)였다. 이원호는 탕쿠트 내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서하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원호는 송조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서북지방에 침입하면서 양국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송은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투입하고 명신으로 유명한 범중엄과 한기를 전선에 파견해 방어했지만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약 7년간의 장기적인 소모전이 계속되자 송은 막대한 군사비와 이 틈을 노린 요의 침입이 우려되기 시작하였고, 서하는 전쟁비용의 부담과 송조의 경계봉쇄에 따른 물자결핍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어 1044년 송과 요 사이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서하가 송에 신하의 예를 갖추는 대신 송은 매년 세폐로서 은 5만 냥과 비단 13만 필, 차 2만 근을 지급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해 교역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이 평화조약에 의해 서하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재정이 극도로 고갈되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하의 침입을 받았다.
거란족의 요가 11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이때 요의 배후지역인 만주에서는 퉁구스계인 여진족이 일어났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은 1115년 아골타(阿骨打)가 금을 건국하면서 요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요는 대군을 보내 금을 공격하였지만 요와의 전쟁에서 금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금은 남하하여 요동을 공략하고 요의 본거지인 요서로 진격하였다. 금이 이렇게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맹안모극제라는 특유의 제도 덕이 컸다. 금의 세력이 요동에 미치자 송조는 금에게 요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였다. 이후 금군은 요군에 대패하였고 이로써 요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남송과 금
북송 때 국경을 접하며 여러 교류와 교전을 통해 송나라의 무능에 대해 알게 된 금나라는 남침하여 정복하고자 하는 계획을 도모했다. 금나라는 그들의 군대를 이끌어 동서로 북송을 압박하여 북송의 멸망을 이끌어냈다. 이때 금나라에게 투항서를 보내 송나라의 끝을 맞이했던 왕은 흠종이었다. 이후 휘종과 흠종을 붙잡아 간 금나라는 장방창을 초제로 세워 한족을 다스리려했다. 그래서 금나라의 장방창 괴뢰정권이 수립되었다. 금나라의 군대가 돌아간 후 송의 신하들이 장방창을 설득하여 제호를 포기하도록 했다. 이후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남송의 건국을 이끌도록 했다. 조구는 1127년 남경에서 즉위하여 남송이라는 나라의 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남송과 금나라는 서로 각각 북벌과 남침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약 20년간의 전쟁 끝에 그들은 화의를 맺었다. 이는 20년간 유지되었다. 1162년 금나라의 60만군의 남침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대응하여 북벌을 하려던 주전파의 입장을 주화파의 요구로 인해 다시금 40년간 충돌이 없는 상태로 두 나라가 지속되었다. 1206년 송나라의 한탁주가 북벌을 도모하였다. 이를 개희의 북벌이라 한다. 그러나 송군이 패배하여 남송은 한탁주를 죽이고 다시금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이후 60년간 서로는 잘 지냈다. 그런데 몽골족이 금나라를 정벌하려 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상황은 악화되어갔고, 이를 기회로 삼은 송나라는 몽골과 손을 잡아 금을 정벌하였다. 이후 황하 이남의 땅의 소유에 대한 약속을 어긴 몽골은 그들의 군대로 남송군을 급습하였고 남송군은 패배하였다. 이후 1257년 몽골군의 몽케 칸이 사망하자 다시금 화의를 체결하였다. 이 화의가 이어진 것은 10년 밖에 되지 않았다. 1267년 몽골의 수장 계승문제가 해결 되자 다시 남송을 공격하였다. 이후 1268년부터 1279년까지 남송의 문천상을 필두로해서 송나라의 거센 반격에도 몽골은 결국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남송이 멸망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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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각국사 시리즈 중국사(하)>>, 신승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 2014
- <<중국역사박물관6>>, 강영매, 중국사학회, 2001
- <<인물로 보는 중국역사>>, 정성환 역, 신원문화사, 1995
-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05 중국사 (하)>>, 맥세계사편찬위원회, 느낌이 있는 책, 2014
- 이근명, <<중국역사>>, 신서원, 2002
- 저우스펀, <<중국사강의>>, 김영수 역, 돌베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