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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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개요== |
− | ==== | + | ==통치체제== |
+ | ===통치사상=== | ||
+ | [[秦]]의 실패<br> | ||
+ | [[법가]]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지닌다. [인구가 증가해 거대 사회의 출현하고 이 때문에 사회를 관리할 公적 질서의 필요성이 증가한다. 이는 군주와 관료의 출현을 가져오고 公적 질서는 군주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법의 지배 아래 살아감으로써 유지된다.] 하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 公을 君權으로 보아 군주 개인이 입법권을 행사함으로써 군주가 법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군주가 대단히 뛰어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주가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결국 법은 군주 개인을 위한 것이 된다. 결국 법위에 선 권력자들의 仁義없는 권력욕과 물욕이 秦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秦의 멸망 원인에 대한 인식은 漢나라에서 새로운 통치방법에 대한 필요성을 불러 일으켰다. | ||
+ | ====[[황노사상]]==== | ||
+ | 진의 멸망 이후 초한대전을 거쳐 한나라의 건국에 이르는 과정 동안 전국의 사회와 경제가 피폐해졌다. 따라서 통일 후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히 요구되었다. 한대의 많은 이들이 진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지나친 형벌, 법의 강조를 들고있다. 이 때문에 한대에는 법에 의한 통치에 대해 전 사회적인 반감이 존재했으며 따라서 법가와 많은 부분에서 반대되는 [[황노사상]]이 [[한 경제]]에 이르기까지 통치사상으로 유행하였다. | ||
− | ==== | + | ====[[국가유교]]==== |
− | + | 청정무위를 강조한 [[황노사상]]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한 [[무제]]에게는 맞지 않았다. 무제는 [[유가]]의 [[공양학]]에 담긴 대일통(大一統)의 의미에 주목하고 이 [[공양학]]을 토대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유교]]는 본래의 [[유교]]와 달리 황제의 중앙집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써, 법에 의한 통치를 교묘히 포장하는 도구로써 이용되었다. 이에 기존의 유교와 구별하여 [[국가유교]]라 칭한다. | |
− | ===== | + | ===통치구조=== |
− | + | ====군국제==== | |
+ | [[한 고조]]는 건국 초기 수도인 장안과 그 근기 지방에 대해서는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관동 지역에는 제후를 분봉하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혼합 형태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제후들은 통치 지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리하였으며 한의 율령에도 예속되지 않았다. 초기 한 왕실이 직접 장악한 군은 서부지역의 15개 군이었고, 관동 지역에 10개의 세습 왕국이 존재하였다. 이후 [[한 고조]]에 의해 이성제후 제거가 이루어졌고 [[무제]] 때 동성제후의 권력을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한의 군국제는 [[군현제]]와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 ||
− | ==== | + |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 |
− | + | 중앙의 정치제도<br> [[한 고조]]는 통일 후 제후를 관동의 봉국에 분봉하였으나, 수도와 근기지역을 중심으로는 군현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수립하였다. 중앙정부의 조직과 구조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으로 되어있었다. <br> | |
+ | 지방의 정치제도<br>지방제도는 제후국(諸侯國)과 열후국(列侯國)을 제외하고는 군현(郡縣)제도를 실시하였다. 한 대에는 100여 개의 군이 있었으며 1개 군은 10~18개 정도의 현을 포함하였다. | ||
+ | 군에는 군수(郡守), 승(丞), 도위(都尉)가 있는데 모두 황제가 파견하였다. 이들의 역할은 중앙의 태위(太尉), 승상(丞相) 그리고 어사대부(御史大夫)의 그것과 유사하다. 군수(郡守)는 군의 최고행정수반으로 군 행정을 총괄한다. 승(丞)은 군수아래 등급으로 군수를 도와 군정을 처리하였다. 도위(都尉)는 군의 병무를 장악, 군사의 훈련을 담당하였고, 군내의 사회질서와 치안을 유지하였다. | ||
− | + | ====군사제도==== | |
− | + | 수도 장안을 수비하는 중앙군과 변군(邊軍) 및 국경을 수비했던 지방군으로 나눌 수 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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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중앙군 | |
+ | :수도 장안을 수비했던 군대는 南軍과 北軍으로 나눌 수 있다. 북군은 주로 삼보지역(三輔地域)에 주둔하며 도성을 수비, 남군은 궁성과 일반관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사 확장을 꾀한 한 무제 때 이르러 군제가 상당 부분 변화하였다. 관중지방의 군비증강을 위해 경보도위, 좌보도위, 우보도위의 삼보도위를 창설하였다. 또 기원전 91년 여태자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성문교위를 설치하였다. 무제는 칠교위(七校尉)를 창설하였는데, 이들은 장기복무하는 우수한 부대로 수도 장안 부근에 배치되어 감군(監軍)의 역할을 맡았다. | ||
+ | ;지방군 | ||
+ | :지방군은 각 군(郡)에 소속되어 있다. 각 군의 도위(都尉)가 병사(兵事)를 담당하였다. 도위는 태수의 규제를 받았는데, 병력을 동원할 때에는 중앙에서 [[동호부(銅虎符)]]를 가진 사자를 파견하여 이 동호부가 태수가 가지고 있는 좌반부(左半部)와 합치되면 태수는 도위에게 병력동원의 명령을 내렸다. 기원전 121년 흉노 곤사왕(昆邪王)이 부족 4만을 이끌고 투항하여 왔을 때에 이들을 통솔하기 위해 오속국도위(五屬國都尉)를 두었다. | ||
+ | ;군사의 징집 | ||
+ | :한의 군사제도는 농민 대상의 징병제가 그 기본이다. 징병연령은 20세부터이고, 56세에 면역(免役)되었다. 복무기간은 2년으로 1년은 둔졸(屯卒)로, 1년은 정졸(正卒)로 근무하였다. 이렇게 징병제를 통해 이루어진 사병들이 한의 주력부대를 형성하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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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제도=== | ===사회제도=== | ||
+ | ====[[전한 사회구조]]==== | ||
+ | 한 대의 사회는 크게 귀족계층과 사민계층 그리고 천민계층으로 구분된다. 귀족계층에는 종친과 외척, 공신이 있으며 사민계층은 士,農,工,商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천민계층은 사회의 최하위계급으로 노비로 구성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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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세정책==== | ||
+ | 국가의 재정은 크게 제실재정과 국가재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br> | ||
+ | 국가재정의 주요한 세원(稅源)으로는 전조세(田租稅)와 인두세(人頭稅)가 있다. 전조세는 수확의 1/15 혹은 1/30이었으며, 인두세는 연간 1인당 120전이었다. 이것들로 관리의 봉록을 충당하였다. <br> | ||
+ | 제실재정의 주요한 세원(稅源)으로는 산림의 벌채, 불하의 수입, 광산 제철 제염의 세금, 시장의 상업세, 이궁(離宮)이나 황실 원유(苑囿)의 산물매상, 공전의 소작료, 연간 1인당 20전의 인두세가 있다. <ref>중국사연구실, <중국역사. 상>, 신서원, 1993, p213-214</ref> (제철과 제염의 세금은 [[무제]]시기 국가재정으로 넘겨졌다. [[곽광]]이 정권을 장악한 후 국가재정과 제실재정의 구분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br> | ||
==외교== | ==외교== | ||
+ | 전한 시기 한 제국의 주변에는 흉노와 남월국, 조선 등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한 제국은 이들 세력과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한 제국은 이들 세력과 外臣, 外藩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평화적으로 공존하기도 하고 주변 세력이 약해질 때에는 적극적인 군사정책으로 이들을 한 제국의 체제 내로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 ||
===흉노와의 외교정책=== | ===흉노와의 외교정책=== | ||
+ | 한대에 특히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은 [[흉노]]였다. 진의 시황제 때 음산의 북방으로 쫓겨난 흉노는 진과 한과의 교체기를 틈타 다시 세력을 만회했다. [[유방]]이 장성의 이남에서 [[초]]를 물리치고 [[한]]제국을 건설하자 한과 흉노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B.C 201년에 [[유방]]의 군대는 산서성 대동에서 흉노의 대군에 포위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치욕을 당했다. 이후 한의 고조 유방은 흉노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화친 정책을 추진했다. [[무제]]가 즉위하고 나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자, 경제력 회복과 발전으로 인한 풍부한 재정을 기반으로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강경책으로 전환하고 [[대흉노작전]]을 펼쳤다. 한이 대흉노작전을 통해 10년 이상의 전투에 승리하면서 흉노가 장성 내로 침공해오는 일은 없었지만 오랜 전투로 한의 재정도 현저하게 악화되었다. 원제 때에는 호한사 선우가 한에 화친을 요구하였고, 한에서는 궁녀 [[왕소군]]이 자원해 그녀를 호한사에게 출가시켰다. 이로 인해 전한 말까지 한과 흉노의 관계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왕망 때 흉노의 재침을 받았다. 왕망정권 때에 이민족에 대한 처우를 강등했기 때문에 흉노는 격분해 이반했고, 이후 우호관계는 단절되고 중국을 다시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한 초인 48년 흉노에서 다시 내부분열이 발생해 일축왕비가 자립해 호한야선우라 칭하고 여러 부족을 이끌고 한에 항복했다. 후한에서는 이들 남흉노를 장성의 이남에 거주토록 하고 그들의 북흉노 공격을 지원했다. 븍흉노는 선비족과 정령에게 쫓기다가 91년에 오르콘강의 서쪽 본거지를 버리고 이리지방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남흉노는 한에 귀부하고, 북흉노만이 한의 변방을 괴롭혔는데, 화제 영원 원년에 두헌이 흉노를 쫓아내었다. 그 후 북흉노는 유럽으로 이동하였고 남흉노는 훗날 5호난화의 화근이 되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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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 | ||
+ | [[백등지위]]사건 이후,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하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 흉노의 침입이 잦아지자 [[유방]]은 책사 [[류경]]을 불러 해결책을 요구한다. [[류경]]은 [[유방]]의 딸인 [[장공주]]를 출가시킬 것을 건의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 | ''''‘’폐하께서 만일 진실로 장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후한 예물을 하사한다면 , (중략) 선우는 비록 오랑케이나 공주를 흠모하여 [[연지]]로 삼고, 만일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대를 계승할 것입니다. (중략) 묵돌이 살아서는 폐하의 사위가 되고, 죽으면 폐하의 외손이 선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하지 않고도 그들을 서서히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장공주를 보낼 수 없어 종실이나 후궁의 딸을 선발하여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그도 눈치를 채고, 그녀를 귀하게 여겨 가까이 하지 않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사기]]> -[[사마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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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류경의 의도를 알게 된 [[여태후]]가 주야로 울며 ''''“소첩의 소생은 태자와 딸 하나뿐인데, 어찌 그 아이를 흉노에 내던지려 하십니까!”''''하면서 결사반대하여 장공주의 흉노 출가 계획은 무산되었다. 결국 유방은 장공주 대신 [[가인]](家人)을 간택하여 묵돌선우에게 시집보내고, 상당량의 혼수품을 전달한 뒤, 류경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화친을 체결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한과 흉노 간에 처음 맺어진 화친 정책의 시작이 되었다.<[[사기]]>-[[사마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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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은 [[한]]·[[흉노]] 모두 도움이 되는 정책으로 보인다. 우선 [[한]]나라는 [[흉노]]와 더 이상 전쟁을 할 필요가 없어 국력 강화에 힘쓸 수 있었다. 그리고 [[흉노]]는 화친정책을 통해 막대한 양의 재물을 얻고 한의 궁녀를 통해 들어오는 한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따라서 이 정책은 [[무제]] 때까지 한동안 지속되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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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무제]]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완비하자, 그는 이러한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에 불만을 갖는다. 따라서 그는 흉노와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을 벌여 흉노를 [[막북]](漠北)지역까지 몰아냈다. 이후 약 20년 간 한나라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유목 민족의 특성상 흉노는 다시 결집하여 다시 한나라를 괴롭혔다. | ||
− | === | + | 이후 왕위를 계승한 [[한 경제]](景帝) 시대에 흉노 안에 내란이 발생하여 5개의 선우가 병립하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흉노 간의 전쟁이 지속되었다. BC.54년, 흉노의 [[평한야선우]]는 그의 형 [[질지선우]](郅支單于) 에게 대패한 뒤, 친히 [[경제]]를 알연하였다. 이는 중원의 황제에게 선우가 처음으로 알현을 청한 것으로, 경제는 친히 나가 그를 영접하고 성대한 연회를 제공하였다. 성대한 환대에 고무된 평한야선우는 [[서한]] 정부와 우호적인 일가(一家)의 관계를 맺고 상호 공격을 중단할 것을 약조하였다. 또한 당시 흉노에 식량이 부족하여 원제가 삼만 사천석의 식량의 원조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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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이후 즉위한 [[원제]]는 흉노와의 전쟁을 되도록 꺼렸다. 그리고 [[흉노]]의 [[호한야선우]]또한 부족 간의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원제]]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과 흉노는 맹약을 체결한다. 후에 흉노의 내전을 극복하고 호한야 선우는 흉노의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한나라에 황실의 사위가 되기를 청하는데 이것이 많이 알려진 [[왕소군]] 고사이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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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월과의 외교정책=== | ||
+ | ===조선과의 외교정책=== | ||
==사회== | ==사회== | ||
+ | ===사대부의 등장=== | ||
+ | 사대부는 황제와 더불어 국가를 통치하는 동시에 문화를 창조하고 전파하며 실천하는 존재이다. 한대의 사대부들을 단순히 이전 시대의 [[법가]]혹은 [[유가]]로 분류할 수는 없다. [[염철회의]]에서 보여지듯 그들은 [[유가]]나 [[법가]]가 아닌 대부 혹은 문학으로 불려진다. <br> | ||
+ | 이들은 황제가 공신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기를 잡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려고 하는 야심속에서 그 수단으로서 등용되다 [[원제]]와 [[성제]] 시기를 거쳐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황제권력에 의한 일원적 지배를 거부하며 복수의 권력을 인정하는 유학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규정하려고 하였다.<br> | ||
+ | 이들은 초기에 [[공양학]]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와 지향하는 군신, 권력관계를 드러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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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족의 등장]]=== | ||
+ | 전한 [[무제]] 이후 소농민들이 살아가던 향리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한 초 당시의 농민들의 생계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자연적인 재해와 세역의 부담이 여전했기 때문에, 토지나 가옥을 저당 잡히기도 하고 자식을 노비로 파는 경우마저 생겼다. 여기에 소제 이후 지방의 유력계층인 호족이 등장해 자립적인 소농민의 기반을 더욱 잠식했다. 특히 [[무제]]시기의 신재정정책으로 인해 상업활동이 침체되어 불황을 초래했고, 이 여파가 소농민의 생계를 위협했다. 결국 전통적인 향리사회는 붕괴되고 변질되었다. 향리의 부로는 덕망 있는 인사가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자산을 갖춘 호족 중에서 선발되었고, 이에 소농민의 대부분은 몰락했다. 소농민이 몰락해 간 반면 이들이 잃어버린 토지를 집적하는 대토지소유자가 등장했는데 이러한 대토지소유자를 일반적으로 호족이라고 한다. 이로써 [[진]], [[한]]을 지탱해주던 제민지배체제가 붕괴되고 호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체제의 길로 접어들었다. 호족의 등장으로 빈부의 격차는 심해져 갔고, 이들의 확대에 대한 대처가 전한정권의 중요한 과제였다. 따라서 애제 때에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이 입안된 바 있고, [[왕망]] 때에는 왕전제가 반포되었다. 그러나 호족의 지지를 얻은 [[후한]] 왕조가 재건되면서 이들에 의한 대토지소유는 더욱 심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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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 | ||
+ | 무제는 국경분쟁 등을 구실로 육·해 대군을 파견하여 기원전 108년에 위만이 건설한 한반도의 위만조선(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현도, 임둔, 진번 등 4군을 설치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중심적인 바닷길은 내해인 발해, 서해 해역이었다.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안의 항로와 하천이 연결되는 형태로 바다의 교역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제가 바닷길의 중계거점으로 낙랑을 지배하에 두면서 많은 한인 상인이 낙랑으로 이주하였고, 낙랑을 경유하여 한반도 남부의 한족 사회, 왜인들이 사는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렇게 하여 낙랑은 한에서 고조선, 그리고 왜에 이르는 통로로서 동아시아 바닷길의 중계지가 되어 교역과 중국문화 전파의 거점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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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문화== | ||
− | === | + | ===학문과 문학의 발달=== |
− | ==== | + | 전한 중기 이후 유학이 독존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유학의 경전과 전적에 대한 학문인 [[경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학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중국 정사의 기본 형식인 본기와 열전 위주의 [[기전체]] 사서가 등장했다. 특히 [[무제]] 때, [[사마천]]은 상고시대부터 한 무제시대까지 2천여년간의 역사를 기전체로 정리한 [[사기]]를 편찬했다. 문학 방면의 형식으로는 한대 부와 [[악부시]]가 있었다. 부란 장편의 운문시를 말하는데, 문제 때의 [[가의]], 매승, 사마상여, 양웅, [[반고]] 등이 대표적인 작가였다. 악부시란 무제 때에 각지의 가요와 악장을 수집케 해, 시를 짓고 음률을 넣어 만든 것이다. 부가 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노래한 반면, 악부시는 소박한 실생활에서 소재를 찾았다. |
− | + | ===백성들의 생활상=== | |
− | + | ||
− | + | ==세부 역사== | |
− | + | 1.[[한 고조]] [[유방]] ([[여태후]])([[육가]])<br> | |
− | + | 2.[[한 혜제]] [[유영]]<br> | |
+ | 3.[[한 소제]] [[유공]]<br> | ||
+ | 4.[[한 소제]] [[유홍]]<br> | ||
+ | 5.[[한 문제]] [[유항]] ([[가의]])<br> | ||
+ | 6.[[한 경제]] [[유계]] ([[동중서]])([[조조]])<br> | ||
+ | 7.[[한 무제]] [[유철]] ([[사마천]])([[상홍양]])([[공손홍]])([[곽거병]]) <br> | ||
+ | 8.[[한 소제]] [[유불릉]] ([[곽광]])<br> | ||
+ | 9.[[한 선제]] ([[왕길]])<br> | ||
+ | 10.[[한 원제]] [[유석]] ([[왕소군]])<br> | ||
+ | 11.[[한 성제]]<br> | ||
+ | 12.[[한 애제]]<br> | ||
+ | 13.[[한 평제]]<br> | ||
+ | |||
+ | ==참고자료== | ||
+ | * 이춘식,『중국고대사의 전개』, 1986 | ||
+ | * 왕천유,『중국고대관제』, 2006 | ||
+ | * 존 킹 페어뱅크,『신중국사』,2011 | ||
+ | * 레이 황,홍광훈 역,『중국, 그 거대한 행보』,경당,2002 | ||
+ | * 신승하,『중국사』,대한교과서,2005 | ||
+ | *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 ||
+ | *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중앙M&B, 2001 | ||
+ | * 증선지, 『십팔사략』 , 동서문화사 | ||
+ | *유태규, 「西漢의 和親 역사와 王昭君 흉노 출가의 背景」, 『중국문화연구』, 중국문화연구학회, 2014.8<br> | ||
− | + | [[분류:한나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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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7일 (월) 15:29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통치체제
통치사상
秦의 실패
법가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지닌다. [인구가 증가해 거대 사회의 출현하고 이 때문에 사회를 관리할 公적 질서의 필요성이 증가한다. 이는 군주와 관료의 출현을 가져오고 公적 질서는 군주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법의 지배 아래 살아감으로써 유지된다.] 하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 公을 君權으로 보아 군주 개인이 입법권을 행사함으로써 군주가 법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군주가 대단히 뛰어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주가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결국 법은 군주 개인을 위한 것이 된다. 결국 법위에 선 권력자들의 仁義없는 권력욕과 물욕이 秦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秦의 멸망 원인에 대한 인식은 漢나라에서 새로운 통치방법에 대한 필요성을 불러 일으켰다.
황노사상
진의 멸망 이후 초한대전을 거쳐 한나라의 건국에 이르는 과정 동안 전국의 사회와 경제가 피폐해졌다. 따라서 통일 후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히 요구되었다. 한대의 많은 이들이 진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지나친 형벌, 법의 강조를 들고있다. 이 때문에 한대에는 법에 의한 통치에 대해 전 사회적인 반감이 존재했으며 따라서 법가와 많은 부분에서 반대되는 황노사상이 한 경제에 이르기까지 통치사상으로 유행하였다.
국가유교
청정무위를 강조한 황노사상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한 무제에게는 맞지 않았다. 무제는 유가의 공양학에 담긴 대일통(大一統)의 의미에 주목하고 이 공양학을 토대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유교는 본래의 유교와 달리 황제의 중앙집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써, 법에 의한 통치를 교묘히 포장하는 도구로써 이용되었다. 이에 기존의 유교와 구별하여 국가유교라 칭한다.
통치구조
군국제
한 고조는 건국 초기 수도인 장안과 그 근기 지방에 대해서는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관동 지역에는 제후를 분봉하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혼합 형태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제후들은 통치 지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리하였으며 한의 율령에도 예속되지 않았다. 초기 한 왕실이 직접 장악한 군은 서부지역의 15개 군이었고, 관동 지역에 10개의 세습 왕국이 존재하였다. 이후 한 고조에 의해 이성제후 제거가 이루어졌고 무제 때 동성제후의 권력을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한의 군국제는 군현제와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
중앙의 정치제도
한 고조는 통일 후 제후를 관동의 봉국에 분봉하였으나, 수도와 근기지역을 중심으로는 군현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수립하였다. 중앙정부의 조직과 구조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으로 되어있었다.
지방의 정치제도
지방제도는 제후국(諸侯國)과 열후국(列侯國)을 제외하고는 군현(郡縣)제도를 실시하였다. 한 대에는 100여 개의 군이 있었으며 1개 군은 10~18개 정도의 현을 포함하였다.
군에는 군수(郡守), 승(丞), 도위(都尉)가 있는데 모두 황제가 파견하였다. 이들의 역할은 중앙의 태위(太尉), 승상(丞相) 그리고 어사대부(御史大夫)의 그것과 유사하다. 군수(郡守)는 군의 최고행정수반으로 군 행정을 총괄한다. 승(丞)은 군수아래 등급으로 군수를 도와 군정을 처리하였다. 도위(都尉)는 군의 병무를 장악, 군사의 훈련을 담당하였고, 군내의 사회질서와 치안을 유지하였다.
군사제도
수도 장안을 수비하는 중앙군과 변군(邊軍) 및 국경을 수비했던 지방군으로 나눌 수 있다.
- 중앙군
- 수도 장안을 수비했던 군대는 南軍과 北軍으로 나눌 수 있다. 북군은 주로 삼보지역(三輔地域)에 주둔하며 도성을 수비, 남군은 궁성과 일반관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사 확장을 꾀한 한 무제 때 이르러 군제가 상당 부분 변화하였다. 관중지방의 군비증강을 위해 경보도위, 좌보도위, 우보도위의 삼보도위를 창설하였다. 또 기원전 91년 여태자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성문교위를 설치하였다. 무제는 칠교위(七校尉)를 창설하였는데, 이들은 장기복무하는 우수한 부대로 수도 장안 부근에 배치되어 감군(監軍)의 역할을 맡았다.
- 지방군
- 지방군은 각 군(郡)에 소속되어 있다. 각 군의 도위(都尉)가 병사(兵事)를 담당하였다. 도위는 태수의 규제를 받았는데, 병력을 동원할 때에는 중앙에서 동호부(銅虎符)를 가진 사자를 파견하여 이 동호부가 태수가 가지고 있는 좌반부(左半部)와 합치되면 태수는 도위에게 병력동원의 명령을 내렸다. 기원전 121년 흉노 곤사왕(昆邪王)이 부족 4만을 이끌고 투항하여 왔을 때에 이들을 통솔하기 위해 오속국도위(五屬國都尉)를 두었다.
- 군사의 징집
- 한의 군사제도는 농민 대상의 징병제가 그 기본이다. 징병연령은 20세부터이고, 56세에 면역(免役)되었다. 복무기간은 2년으로 1년은 둔졸(屯卒)로, 1년은 정졸(正卒)로 근무하였다. 이렇게 징병제를 통해 이루어진 사병들이 한의 주력부대를 형성하였다.
사회제도
전한 사회구조
한 대의 사회는 크게 귀족계층과 사민계층 그리고 천민계층으로 구분된다. 귀족계층에는 종친과 외척, 공신이 있으며 사민계층은 士,農,工,商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천민계층은 사회의 최하위계급으로 노비로 구성되었다.
조세정책
국가의 재정은 크게 제실재정과 국가재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국가재정의 주요한 세원(稅源)으로는 전조세(田租稅)와 인두세(人頭稅)가 있다. 전조세는 수확의 1/15 혹은 1/30이었으며, 인두세는 연간 1인당 120전이었다. 이것들로 관리의 봉록을 충당하였다.
제실재정의 주요한 세원(稅源)으로는 산림의 벌채, 불하의 수입, 광산 제철 제염의 세금, 시장의 상업세, 이궁(離宮)이나 황실 원유(苑囿)의 산물매상, 공전의 소작료, 연간 1인당 20전의 인두세가 있다. [1] (제철과 제염의 세금은 무제시기 국가재정으로 넘겨졌다. 곽광이 정권을 장악한 후 국가재정과 제실재정의 구분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
전한 시기 한 제국의 주변에는 흉노와 남월국, 조선 등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한 제국은 이들 세력과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한 제국은 이들 세력과 外臣, 外藩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평화적으로 공존하기도 하고 주변 세력이 약해질 때에는 적극적인 군사정책으로 이들을 한 제국의 체제 내로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흉노와의 외교정책
한대에 특히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은 흉노였다. 진의 시황제 때 음산의 북방으로 쫓겨난 흉노는 진과 한과의 교체기를 틈타 다시 세력을 만회했다. 유방이 장성의 이남에서 초를 물리치고 한제국을 건설하자 한과 흉노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B.C 201년에 유방의 군대는 산서성 대동에서 흉노의 대군에 포위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치욕을 당했다. 이후 한의 고조 유방은 흉노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화친 정책을 추진했다. 무제가 즉위하고 나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자, 경제력 회복과 발전으로 인한 풍부한 재정을 기반으로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강경책으로 전환하고 대흉노작전을 펼쳤다. 한이 대흉노작전을 통해 10년 이상의 전투에 승리하면서 흉노가 장성 내로 침공해오는 일은 없었지만 오랜 전투로 한의 재정도 현저하게 악화되었다. 원제 때에는 호한사 선우가 한에 화친을 요구하였고, 한에서는 궁녀 왕소군이 자원해 그녀를 호한사에게 출가시켰다. 이로 인해 전한 말까지 한과 흉노의 관계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왕망 때 흉노의 재침을 받았다. 왕망정권 때에 이민족에 대한 처우를 강등했기 때문에 흉노는 격분해 이반했고, 이후 우호관계는 단절되고 중국을 다시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한 초인 48년 흉노에서 다시 내부분열이 발생해 일축왕비가 자립해 호한야선우라 칭하고 여러 부족을 이끌고 한에 항복했다. 후한에서는 이들 남흉노를 장성의 이남에 거주토록 하고 그들의 북흉노 공격을 지원했다. 븍흉노는 선비족과 정령에게 쫓기다가 91년에 오르콘강의 서쪽 본거지를 버리고 이리지방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남흉노는 한에 귀부하고, 북흉노만이 한의 변방을 괴롭혔는데, 화제 영원 원년에 두헌이 흉노를 쫓아내었다. 그 후 북흉노는 유럽으로 이동하였고 남흉노는 훗날 5호난화의 화근이 되었다.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
백등지위사건 이후,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하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 흉노의 침입이 잦아지자 유방은 책사 류경을 불러 해결책을 요구한다. 류경은 유방의 딸인 장공주를 출가시킬 것을 건의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폐하께서 만일 진실로 장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후한 예물을 하사한다면 , (중략) 선우는 비록 오랑케이나 공주를 흠모하여 연지로 삼고, 만일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대를 계승할 것입니다. (중략) 묵돌이 살아서는 폐하의 사위가 되고, 죽으면 폐하의 외손이 선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하지 않고도 그들을 서서히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장공주를 보낼 수 없어 종실이나 후궁의 딸을 선발하여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그도 눈치를 채고, 그녀를 귀하게 여겨 가까이 하지 않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사기> -사마천-
결국 류경의 의도를 알게 된 여태후가 주야로 울며 '“소첩의 소생은 태자와 딸 하나뿐인데, 어찌 그 아이를 흉노에 내던지려 하십니까!”'하면서 결사반대하여 장공주의 흉노 출가 계획은 무산되었다. 결국 유방은 장공주 대신 가인(家人)을 간택하여 묵돌선우에게 시집보내고, 상당량의 혼수품을 전달한 뒤, 류경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화친을 체결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한과 흉노 간에 처음 맺어진 화친 정책의 시작이 되었다.<사기>-사마천-
이러한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은 한·흉노 모두 도움이 되는 정책으로 보인다. 우선 한나라는 흉노와 더 이상 전쟁을 할 필요가 없어 국력 강화에 힘쓸 수 있었다. 그리고 흉노는 화친정책을 통해 막대한 양의 재물을 얻고 한의 궁녀를 통해 들어오는 한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따라서 이 정책은 무제 때까지 한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무제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완비하자, 그는 이러한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에 불만을 갖는다. 따라서 그는 흉노와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을 벌여 흉노를 막북(漠北)지역까지 몰아냈다. 이후 약 20년 간 한나라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유목 민족의 특성상 흉노는 다시 결집하여 다시 한나라를 괴롭혔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한 경제(景帝) 시대에 흉노 안에 내란이 발생하여 5개의 선우가 병립하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흉노 간의 전쟁이 지속되었다. BC.54년, 흉노의 평한야선우는 그의 형 질지선우(郅支單于) 에게 대패한 뒤, 친히 경제를 알연하였다. 이는 중원의 황제에게 선우가 처음으로 알현을 청한 것으로, 경제는 친히 나가 그를 영접하고 성대한 연회를 제공하였다. 성대한 환대에 고무된 평한야선우는 서한 정부와 우호적인 일가(一家)의 관계를 맺고 상호 공격을 중단할 것을 약조하였다. 또한 당시 흉노에 식량이 부족하여 원제가 삼만 사천석의 식량의 원조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경제 이후 즉위한 원제는 흉노와의 전쟁을 되도록 꺼렸다. 그리고 흉노의 호한야선우또한 부족 간의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원제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과 흉노는 맹약을 체결한다. 후에 흉노의 내전을 극복하고 호한야 선우는 흉노의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한나라에 황실의 사위가 되기를 청하는데 이것이 많이 알려진 왕소군 고사이다.
남월과의 외교정책
조선과의 외교정책
사회
사대부의 등장
사대부는 황제와 더불어 국가를 통치하는 동시에 문화를 창조하고 전파하며 실천하는 존재이다. 한대의 사대부들을 단순히 이전 시대의 법가혹은 유가로 분류할 수는 없다. 염철회의에서 보여지듯 그들은 유가나 법가가 아닌 대부 혹은 문학으로 불려진다.
이들은 황제가 공신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기를 잡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려고 하는 야심속에서 그 수단으로서 등용되다 원제와 성제 시기를 거쳐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황제권력에 의한 일원적 지배를 거부하며 복수의 권력을 인정하는 유학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규정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초기에 공양학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와 지향하는 군신, 권력관계를 드러내었다.
호족의 등장
전한 무제 이후 소농민들이 살아가던 향리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한 초 당시의 농민들의 생계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자연적인 재해와 세역의 부담이 여전했기 때문에, 토지나 가옥을 저당 잡히기도 하고 자식을 노비로 파는 경우마저 생겼다. 여기에 소제 이후 지방의 유력계층인 호족이 등장해 자립적인 소농민의 기반을 더욱 잠식했다. 특히 무제시기의 신재정정책으로 인해 상업활동이 침체되어 불황을 초래했고, 이 여파가 소농민의 생계를 위협했다. 결국 전통적인 향리사회는 붕괴되고 변질되었다. 향리의 부로는 덕망 있는 인사가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자산을 갖춘 호족 중에서 선발되었고, 이에 소농민의 대부분은 몰락했다. 소농민이 몰락해 간 반면 이들이 잃어버린 토지를 집적하는 대토지소유자가 등장했는데 이러한 대토지소유자를 일반적으로 호족이라고 한다. 이로써 진, 한을 지탱해주던 제민지배체제가 붕괴되고 호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체제의 길로 접어들었다. 호족의 등장으로 빈부의 격차는 심해져 갔고, 이들의 확대에 대한 대처가 전한정권의 중요한 과제였다. 따라서 애제 때에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이 입안된 바 있고, 왕망 때에는 왕전제가 반포되었다. 그러나 호족의 지지를 얻은 후한 왕조가 재건되면서 이들에 의한 대토지소유는 더욱 심해졌다.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
무제는 국경분쟁 등을 구실로 육·해 대군을 파견하여 기원전 108년에 위만이 건설한 한반도의 위만조선(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현도, 임둔, 진번 등 4군을 설치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중심적인 바닷길은 내해인 발해, 서해 해역이었다.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안의 항로와 하천이 연결되는 형태로 바다의 교역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제가 바닷길의 중계거점으로 낙랑을 지배하에 두면서 많은 한인 상인이 낙랑으로 이주하였고, 낙랑을 경유하여 한반도 남부의 한족 사회, 왜인들이 사는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렇게 하여 낙랑은 한에서 고조선, 그리고 왜에 이르는 통로로서 동아시아 바닷길의 중계지가 되어 교역과 중국문화 전파의 거점이 되었다.
문화
학문과 문학의 발달
전한 중기 이후 유학이 독존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유학의 경전과 전적에 대한 학문인 경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학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중국 정사의 기본 형식인 본기와 열전 위주의 기전체 사서가 등장했다. 특히 무제 때, 사마천은 상고시대부터 한 무제시대까지 2천여년간의 역사를 기전체로 정리한 사기를 편찬했다. 문학 방면의 형식으로는 한대 부와 악부시가 있었다. 부란 장편의 운문시를 말하는데, 문제 때의 가의, 매승, 사마상여, 양웅, 반고 등이 대표적인 작가였다. 악부시란 무제 때에 각지의 가요와 악장을 수집케 해, 시를 짓고 음률을 넣어 만든 것이다. 부가 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노래한 반면, 악부시는 소박한 실생활에서 소재를 찾았다.
백성들의 생활상
세부 역사
1.한 고조 유방 (여태후)(육가)
2.한 혜제 유영
3.한 소제 유공
4.한 소제 유홍
5.한 문제 유항 (가의)
6.한 경제 유계 (동중서)(조조)
7.한 무제 유철 (사마천)(상홍양)(공손홍)(곽거병)
8.한 소제 유불릉 (곽광)
9.한 선제 (왕길)
10.한 원제 유석 (왕소군)
11.한 성제
12.한 애제
13.한 평제
참고자료
- 이춘식,『중국고대사의 전개』, 1986
- 왕천유,『중국고대관제』, 2006
- 존 킹 페어뱅크,『신중국사』,2011
- 레이 황,홍광훈 역,『중국, 그 거대한 행보』,경당,2002
- 신승하,『중국사』,대한교과서,2005
-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중앙M&B, 2001
- 증선지, 『십팔사략』 , 동서문화사
- 유태규, 「西漢의 和親 역사와 王昭君 흉노 출가의 背景」, 『중국문화연구』, 중국문화연구학회, 20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