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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인류에 등장한 것은 4천 만 년 전이며, 중국에서는 서안, 반파유적지와 절강성 [[하모도문화]] 유적지를 비롯한 전국지역에서 발굴된 돼지뼈 등을 통해 야생되지가 가축화 된 것을 6천년에서 1만 년 사이로 보고 있다. 실제로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가축의 뼈 중 돼지가 1/3을 차지할 정도로 육축(六畜) 중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주시기에도 돼지사육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중국 한 대(漢代)시기의 전국 유적지에서 돼지우리 실제 모형이 발굴되었는데(한대 논농사를 중심으로 황하강 유역과 양자강 유역에서 많은 돼지 관련 유물이 출토됨.), 이를 통해 돼지 사육이 가축으로 자리매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돼지가 인류에 등장한 것은 4천 만 년 전이며, 중국에서는 서안, 반파유적지와 절강성 [[하모도문화]] 유적지를 비롯한 전국지역에서 발굴된 돼지뼈 등을 통해 야생되지가 가축화 된 것을 6천년에서 1만 년 사이로 보고 있다. 실제로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가축의 뼈 중 돼지가 1/3을 차지할 정도로 육축(六畜) 중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주시기에도 돼지사육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중국 한 대(漢代)시기의 전국 유적지에서 돼지우리 실제 모형이 발굴되었는데(한대 논농사를 중심으로 황하강 유역과 양자강 유역에서 많은 돼지 관련 유물이 출토됨.), 이를 통해 돼지 사육이 가축으로 자리매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
2017년 12월 22일 (금) 15:22 판
목차
고대의 목축[1]
목축의 시작
목축이 시작되기 전, 고대인들은 사냥을 통해 고기를 얻었다. 하지만 야생동물은 한정된 시기와 한정된 지역에서만 살기 때문에 사냥만을 통해서는 고정된 고기의 공급을 얻지 못하였고, 공동체의 고기 수요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사냥에 따르는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최초의 목축은 사냥으로 얻어진 고기가 충분하지 않을 때, 최소한의 고기공급을 보장받기 위한 하나의 임시수단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서는 양(羊)이 대략 1만 1천 년쯤 전에 최초로 사육된 동물이라고 한다. 양은 비교적 보호시설이 필요없고, 길들이기 쉬우며, 사육을 위한 목초지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에 최초로 사육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목축은 대체로 신석기시대 말기에 형성되었다. 육축(말, 소, 양, 돼지, 닭, 개)은 당시에 황하 유역과 장강 유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육되던 것이었으며 후세의 것에 근접한, 상당히 안정된 우량 품종을 사육해 냈다. 환경의 영향으로 북방에서는 돼지, 양, 개를, 남방에서는 돼지, 개, 물소를 길렀다.[2]
(중국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데,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소와 양이 돼지나 개보다 늦게 사육된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전설에 의하면, 복희씨가 거미가 그물 치는 것을 보고 그물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고기잡이와 목축을 가르쳤다고 한다.
목축과 농경
목축이 시작되고 나서, 이후에야 농경이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사냥을 할 때에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목축을 통해 그것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고, 절약된 자원을 농경을 연구하고 실제로 실행하는 데 쓰게 되었을 것이다. 목축과 농경은 서로 보완적인 측면과 대립되는 측면 모두 존재한다. 먼저 보완적인 측면을 살펴보자면, 농경은 목축을 위한 사료를 생산할 수 있고, 동물은 인력을 대신하여 일을 할 뿐만 아니라 퇴비를 생산하여 농경에 보탬을 줄 수 있다. 대립적인 측면에서보자면 소 또는 양을 사육하는 것은 농경에 사용할 수 있는 목초지를 침식시킨다.
목축의 대상
牧자의 갑골문을 살펴보면 손에 막대기를 잡고 1)소를 몰고가는 행위 2)양을 몰고가는 행위를 나타내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이를 통해 갑골문이 형성될 시기에는 소와 양이 중요한 가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와 양은 몸집이 크기에 고기의 좋은 공급원이었고, 이들의 가죽과 뼈, 뿔도 유용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소와 말은 중국 북쪽 지방의 반건조한 지역에서 대규모로 사육되었다. 소의 경우 마차를 끄는 동물이자 농경 시작 후에는 농업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동물로 사육된 반면, 양은 농업에 이용가치가 별로 없었으며 오히려 밭으로 사용될 수 있는 목초지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춘추시대 이후에는 거의 사육되지 않았다. 고대 목축의 대상에는 소와 양 이외에도 말, 돼지, 개 등이 있으며 아래에서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양(羊)
중국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의 배리강 유적지에서 흙으로 빚은 양과, 양의 유해가 발견되지만, 기원전 4000년 혹은 그보다 어 이른 농경지역의 유적지에서는 돼지와 개의 뼈가 더 많이 발견된다. 그보다 더 이른 농경지역의 유적지에서는 돼지와 개의 뼈가 더 많이 발견된다. 용산문화시대(신석기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교적 많은 소와 양의 뼈가 발견된다. 중원 서쪽, 북쪽의 반건조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 이후부터 줄곧 돼지나 개보다 소와 양이 더 많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중원에서 행해진 양의 사육은 아마 북서쪽에서 온 유목민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중원뿐만 아니라 중국 남방에서도 소와 양은 돼지나 개보다 늦게 사육되었다. 사육된 양은 고대인들에게 먹을 거리(고기,우유)와 입을 거리(양모와 양피)를 공급해준 유용한 자원이었다.
소(牛)
소는 거대한 몸체 때문에 양이나 개 등 다른 동물들보다 늦게 사육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000년경의 유적지에서 소의 뼈가 발견되지만 이 시기의 소가 사육된 소인지 야생 소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 다만 기원전 3000년경에는 이미 사육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사육된 소의 고기는 식용으로, 뿔은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고대에 소는 가장 귀한 제물이자 양, 돼지, 개 등의 가축들과 더불어 중요한 고기의 공급원임을 알 수 있다. (상나라 때의 사람들은 종종 한꺼번에 몇 십 마리의 소를 제물로 사용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소는 농경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나라시기까지는 인구가 많지 않았기에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깊이 쟁기질 할 필요가 없었고, 또 철 쟁기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쟁기를 끄는 데 소를 이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후 후대에 사람들이 소를 이용한 쟁기의 유용성을 알게 되자, 동주시대에는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소를 제물로 사용하였고, 불교가 성행했던 동한시대에는 쇠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소는 농경뿐만 아니라 군사용으로도 사용된 유일한 가축이다. 소의 고기는 식용으로, 뿔은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전시에는 군수품을 수송하며 평시에는 밭고랑을 가는 데 사용되었다. 수레를 끄는 데 소가 사용된 것은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한 때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이는
돼지(豕)
돼지가 인류에 등장한 것은 4천 만 년 전이며, 중국에서는 서안, 반파유적지와 절강성 하모도문화 유적지를 비롯한 전국지역에서 발굴된 돼지뼈 등을 통해 야생되지가 가축화 된 것을 6천년에서 1만 년 사이로 보고 있다. 실제로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가축의 뼈 중 돼지가 1/3을 차지할 정도로 육축(六畜) 중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주시기에도 돼지사육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중국 한 대(漢代)시기의 전국 유적지에서 돼지우리 실제 모형이 발굴되었는데(한대 논농사를 중심으로 황하강 유역과 양자강 유역에서 많은 돼지 관련 유물이 출토됨.), 이를 통해 돼지 사육이 가축으로 자리매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돼지는 거세하여 키웠다. 거세를 하면 돼지의 성격이 유순해지고 살도 더 잘 찌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주역>>에서는 “거세된 수태지의 이빨은 상서롭다”라고 하였다. )
말(馬)
말은 가장 늦게 길들여진 사육동물로, 매우 늦은 신석기 유적지에서도 말의 뼈는 다른 돼지, 양, 소, 개 등의 가축의 뼈에 비해 훨씬 적게 보인다. 산동성 성자애(城子崖)에 있는 용산문화 유적지(기원 전 3000년경-기원 전 2000년경)에서 말이 사육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2200년경의 전설상의 우임금 시대에 이르러 수레를 끌던 소의 역할을 말이 대신 맡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말은 상나라 이후 주로 마차를 끌거나 타는데 이용되었다. 갑골문에서도 말과 관련해서는 제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사냥이나 전쟁과 관계된 것만 주로 보인다.
개(犬)
개의 사육은 일부 학자들의 경우 후기 구석기시대, 혹은 최소한 기원전 8000년에서 700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며 주장한다. 이후 중국에서 개고기를 먹게 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였다. 개는 신석기 시대 때부터 가장 잘 훈련된 가축이었다. 당시 중국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개가 사육되었다. 따라서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광범위하게 개의 유골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하북성 서수현(徐水縣) 남장두(南庄頭)에서 발견된 개의 유골로 거의 만 년 전이고, 하남성의 배리강문화(裵李崗) 유적지에서 발견된 개의 유골은 8000여 년 전의 것이다.
이처럼 이른 시기에 사육된 데에는 개가 빠르고 민첩할 뿐만 아니라 민감한 후각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는 집을 지키는 임무가 있었기에, 집의 기초를 놓을 때 종종 제물로 바쳐졌다. 또 상나라 시대 무덤의 시체 아래에 있는 오목한 웅덩이에서 개가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가장 좋아했던 동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애견의 의미와는 다소 다르더라도 당시 개는 인간의 충실하고 믿음직한 동반자로 사람들은 애정을 가지고 개를 길렀으며, 따라서 한나라 이후로는 개고기를 먹는 습성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시대별 목축업
고대의 육식 문화
고대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숲이 점차 개간되어가고,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줄어들게 되었다. 자연히 번식이 감소되었으며, 사육할 수 있는 가축의 수량도 증가되지 못하여, 육류는 점점 사치스러운 음식이 되어갔다. 이러한 육식의 가치변화는 여러 문헌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맹자>>의 <양혜왕>편 : “五畝之宅, 樹之以桑, 五十者可以衣帛矣. 鷄豚狗彘之畜, 無失其時, 七十者可以食肉矣. 百畝之田, 勿奪其時, 數口之家, 可以無飢矣”
오묘의 집에 뽕나무를 심으면 오십 세 된 사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닭, 작은 돼지, 개, 큰 돼지를 기름에 그때를 놓치지 않으면, 칠십 세 된 사람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백묘 크기의 밭에 농사철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몇 식구의 한 가족이 굶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기>> <왕제>편 : “諸侯無故不殺牛,大夫無故不殺羊,士無故不殺犬豕,庶人無故不食珍”
제후는 까닭 없이 소를 죽이지 아니하고, 대부는 까닭 없이 양을 죽이지 않으며, 선비는 까닭 없이 개나 돼지를 죽이지 않고, 일반 백성은 까닭 없이 진미를 먹지 않는다.
육축[3]
고대 집에서 기르는 대표적인 여섯 가지 가축(육축)에는 소, 말, 양, 돼지, 닭, 개가 포함된다. 이중에 말은 일하는 동물, 닭은 새벽을 알리는 명금(鳴禽)이어서 일반적으로 식용을 피하고, 나머지 4종이 주요 육식 원료로 이용되었다. 여기서 소는 농업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고 제사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 동물이었으므로 특별한 일이 없이 소를 죽이면 벌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가장 보편적인 육식은 양과 돼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