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시대개관
위진남북조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삼국시대
위
촉
오
진
서진
동진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
남조
북조
사회와 경제
사회
위진남북조 시대는 문벌 귀족 사회의 기반을 형성한 시기였다.
화북지역은 선비족인 북위가 통일했기 때문에 선비족은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장악하여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의 특혜를 독점하며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유목민이었던 이들이 농경민족인 한족을 지배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한족의 일부를 정치적 협조자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북위에는 남쪽으로 도망가지 않은 한의 호족들이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북위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뒤 선비족들과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한편 강남지역은 서진이 흉노에게 몰락 한 뒤 남으로 피신하여 동진을 건국했다. 그런데 이때 왕족인 사마예가 함께 남하한 화북의 명문 가문의 군사력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건국 후 중앙의 요직은 명문 집안의 세력들에게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중앙의 요직을 차지한 명문 집안 세력들은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이용해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세금면제의 특혜를 받았다. 그런데 이것은 강남 지역의 토착 세력의 불만을 낳았고 그래서 이들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북에서 내려온 명문 가문 세력은 안전하게 강남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토착 세력의 협조가 필요했고 토착 세력 역시도 화북 명문 가문 세력이 보유한 군사력이 두려웠기 때문에 두 세력은 협조를 통해 동진, 즉 남조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남북조 시대의 이러한 지배 세력들은 몇 대에 걸쳐 관직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신분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게 토지를 지급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직을 얻는 것이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긴 것은 대토지 소유와 노예 또는 예속민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광대한 대토지 소유와 노예, 예속민을 지배함으써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막항 한 권력과 지위를 확보했고 왕조 교체후 에도 지배 계급으로 살아남아,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하는 세력들이 정치·사회·경제·문화적인 특권을 독점하게 되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문벌귀족이다. 문벌귀족들은 수·당대에도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존재는 국가 정부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귀족제의 실시
위진남북조, 특히 위진 · 남조 시대는 정치와 사회 체제로서 귀족제가 보편적이었다. 귀족은 당시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세력으로서 군주의 권력을 일정 정도 제약하여 서양 중세의 영주에 비견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서양의 영주처럼 장원 등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반드시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문인 귀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 귀족계층은 외척과 환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여 당쟁을 벌였던 후한 말 청류파에 그 사상적 원류를 두고 있다. 이들이 세습적인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의 시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사 씨로 대표되는 북방 교민 귀족들은 강남 토착 호족인 주·장·고·육 씨 등과 협력하여 동진에서 귀족제를 부활시켰다. 동진 건국과정에서 공훈을 세운 왕씨는 “와과 사마가 함께 천하를 다스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했다. 이 말은 귀족세력이 군주의 권력을 제약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국사에서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관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 이후 왕조에서는 낮은 가문 출신의 창업자가 계속 출현함에 따라 귀족과 군주는 별개로 움직였다. 귀족은 관직과 가문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쏟을 뿐 국사에는 무관심했다. 귀족의 실무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은 한문(寒門)·한인(寒人)들의 정치참여를 초래했고, 송·제·양·진은 한문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 가운데 양 무제는 한문·한인과 귀족층을 결합한 통일적 관료체제를 지향하는 소위 천감개혁을 실시하여 지배층의 분열을 봉합하려 했다. 그 결과 ‘50년간 강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태평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양 말에 일어난 후경의 난의 진압과정에서 남조 귀족의 무능함이 유감없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대량 살육됨으로써 귀족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9품중정제
'중정관'이라는 직책의 문신이 9개 품으로 나눠 관직을 임의로 정해주는 파격적인 인사 정책이다.
처음에는 잘지켜졋으나 후기에 관직을 사고파는 문제와 기득권의 귀족화로 결국 '문벌귀족사회'라는 암적인 존재를 낳는다.
경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전 시대에 비해 남북과 서쪽으로 중국의 영토가 확장, 개발되던 시기였다. 이것은 수많은 국가가 생성 소멸을 반복하던 혼란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특히 강남 지역을 개발이 두드러졌다. 삼국 시대 오나라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 지역은 동신시대에 들어서면 더 큰 발전을 하게 된다. 북방 유목 민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배척하고 철저한 한화 정책을 추진했다. 북위의 경우 선비족 고유의 복식제도, 언어, 이름의 사용을 금지까지 하며 중국식 교육 및 한족과의 결혼을 장려했다. 물론 한족 입장에서 보면 위협 세력이 스스로 사라지니 즐거운 일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문화는 다양한 북방 민족의 문화를 포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가게 되었다.
계속된 전란으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었고 지방의 호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위의 둔전제에 이어 서진에서는 일반 농민의 소유지를 제한하는 점전제를 실시하는 한편, 이전의 둔전을 둔전민에게 주는 과전제를 실시하여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였다. 북위 효문제는 토지 국유를 전제조건으로 균전제를 실시하였다. 균전제는 경자유전으로 상전과 노전으로 구분된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려는 제도로, 국가 15세 이상의 정남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조세와 역을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사용된 세법이 조·용·조 제도 였고, 농민의 토지를 확보하고 호족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려는 제도였다. 군역제도는 부병제였는데 이 3가지 제도는 당대 후반까지 함께 유지 되었다. 그러나 남조의 경우에는 토지 소유에 규제를 가하지 않아 대토지 소유가 성행하고 장원이 나타났다. 아울러 화북인의 남방 이주로 강남 지방의 농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벼농사가 본격화되고 2모작도 시행되었다.
이러한 제도들에 의해서 국가는 토지 국유 개념을 세울 수 있었고 또 문벌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농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나날이 높아만 갔기 때문에, 토지 소유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으로는 막을 수 있었지만 영구히 막을 수 없었다.
강남지역
강남지방의 경제적 개발 촉진: 한족들의 강남이주, 벼농사 널리보급
화북지역
종교
유교 사상은 국교로서 한 대를 풍미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일한 권위가 될 수 없었다. 노자 · 장 계보를 이은 도가 사상과 개인 구제를 기구하는 신앙이 합쳐져 도교가 확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한 초기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방에서 유입한 불교 사상과 신앙이 비로소 중국인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유 · 불 · 도 삼교가 병립하여 인간 정신의 진폭을 크게 넓히자 이런 사상적 다양성 아래서 새롭고 더욱 확실한 가치가 모색되고 있었다.
도교와 불교
배경
위진남북조 시대의 민중들은 북방 유목민의 남침과 그치지 않는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정신적 위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황폐한 민중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안정시켜 줄 사상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현실의 배경으로 불교, 조로아스터교가 서역을 통해 도입되었고, 도교가 교단을 구축하며 종교로서 위상을 확립했다. 특히 불교와 도교는 민중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아 곳곳에 사원이 건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상과 신상들이 조각되었고 종교화가 그러져 예술 활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민중들에게만 위협을 준 것은 아니었으며 이민족과 소수 문벌 귀족 들이 관직을 독점하면서 지식인 계층은 관직을 얻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지식인 계층에서 종래 입신양면의 인생관을 버리고 ‘더러운 속세’를 초탈하여 은둔 생활을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들은 술과 시, 노래를 벗 삼았고 기이하고 충동적 행동을 일삼으며 현실 세계를 조롱하였다. 그들의 허무·염세주의적인 경향은 현실에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려 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노장 사상과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은둔 생활을 주장하는 불교의 선종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들은 허무와 무위자연의 노장 사상을 기본으로 삼아 일체의 현실적 욕망을 털어 버리고 도덕을 경시하며 현실에 초월하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청담 사상이다. 이런 청담 사상은 당시 사회에서 선진적 사고로 인식되어 관리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는데 그 결과 관리들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청담 사상을 일면 사회· 정치의 기강을 흐려 놓기도 한 셈이다.
도교
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쟁과 왕권 찬탈이 이루어지는 혼란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지식인들은 세속적인 현실을 떠나 자연속에 은거해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도가 사상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죽림7현의 청담사상이 있는데, 이들은 유가들이 격식있게 옷을 차려입거나 깨끗하게 머리와 수염을 깎는 것을 비웃으며, 남루한 옷을 입거나 수염을 깎지 않고 손님을 맞이할 때는 알몸으로 나서는 등의 자기해탈을 추구했다. 또한 깊은 산 속에 은거하며 당시 권력자들과 한 통속이 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과 절개를 지키고자 했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정치에서 벗어난 자연속의 자유로움을추구한 자들을 은사라고 한다. 도가사상이 도교라는 종교로 일체감을 갖게 된 것은, 후한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와 삼장(三張)의 오두미도에서 나름의 교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이 조직된 후 동진 말과 남북조 초가 되어서이다. 이렇게 도가사상은 남북조 시대에 들어 도교라는 하나의 종교로서 통합되어 간다. 도교는 충실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여 달성하고자 한다. 초기 도교 신도의 핵심 구성원은 유망 농민이거나 파산 또는 궁핍한 농민이었다. 도교는 한중 지역에서 종교왕국을 건설한 사천의 성한(成漢)정권에서 세력을 확대한 바 있고, 북위 시대 구겸지의 활약으로 불교 대신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으며, 남조 도교에서 보듯이 어용 · 관방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왕조적 · 민중적 성격의 종교였다.
불교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역과 관련이 깊은 유목민들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시대부터였다. 불교는 호조군주들에게 화이론적 차별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초자연적인 힘으로 재난을 물리치고 전쟁에서도 예견 능력을 발휘하는 신이승(神異僧)은 그 시대 상황과 부합하여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불도징이 후조 왕조에 영입되었고, 그의 제자 동안은 전진 왕조에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부견은 구마라습을 데려오고자 여광에게 7만의 병사를 주어 쿠차를 정복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돈황에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구마라습은 후진 왕조에게 국사가 되어 3000명의 제자를 모아 불경 번역에 힘썼고, 그 결과 8년 동안 74부 384권을 번역하여 불교 교리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운강 및 용문 등지의 대석굴 조영이 모두 이민족 왕조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불교와 호족정권의 밀접성을 말해준다.
오호 · 북조 시대의 불교는 민중의 종교라기보다 황제의 종교였다. 운강석굴 가운데 '담요오굴(曇曜五窟)'로 알려진 대불들이 황제의 모습을 띤 것이라든지 북위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시기 양차에 걸쳐 폐불이 단행된 것도 불교가 국가에 종속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황제는 당금의 여래”라고 인정한 북조 불교는 “사문은 왕자(王者)에게 경례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남조 불교와는 달랐다. 특히 네 번에 걸쳐 삼보의 종이라 칭하며 사원에 자신의 몸을 위탁하였고 그때마다 신하들이 수억 전을 사원에 지불하고 황제를 다시 찾아와야 했던 양무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불교가 이 시대에 이르러서 성행하게 된 것은 난세의 지속과 민중의 아픔이라는 시대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도교와 비교할 때 역시 불교는 국가 또는 황제의 종교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아육왕상
아육왕상은 일반적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인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왕인(재위 약 기원전 268-232년) 아쇼카왕, 즉 아육왕이 만든 석가모니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인도에서 불상은 1세기가 되어서야 출현했으므로, 아육왕상의 존재는 후대 불교도들이 만들어낸 전승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아육왕상은 많은 고사를 생산하며 서상(瑞像)으로서 널리 숭배되었다.
아육왕상은 아육왕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4세기부터 아육왕상에 대한 전승이 성립되어 6세기까지 아육왕상 숭배가 매우 유행했다. 아육왕상의 최고조기는 위진남북조시대이다. 최근에는 사천성 성도에서 아육왕상 명문을 가진 남북조시대의 상들이 발견됨으로써 기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문화
-북조:북방적 성격잔존 (강건, 소박), 유교적 권위존속, 불교 발달, 황제 독재 정치 -남조:우아하고 화려한 귀족문화, 노장사상의 유행, 현실도피적 색채 (청담사상, 죽림 7현)
배경
귀족문화
-귀족문화의 개화
귀족의 문화가 활짝 꽃핀 곳은 강남이었지만 꽃망울을 터뜨린 것은 서진 시대였다. 이 시대 귀족 문화는 가치관의 다양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후한 시대의 국교였던 유교 도덕을 계승하기도 하였지만 그 가치에 얽매이지 않았고, 유교의 형식적인 예교주의에 속박되었던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 본연의 진정성을 찾으려 했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떠나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논하는 청담(淸談)이 유행했다. 이 것이 후에 현학(玄學)으로 확립된다. 이런 사조는 죽림칠현(竹林七賢)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폭음과 마약 복용 등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또 서진 귀족들은 사치와 물욕에 몸을 맡겼다. 사치 풍조 속에 “돈은 신이다”라고 풍자한 『전신론(錢神論)』이 나온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강남 문화의 주역은 서진의 종실 사마예가 건강을 중심으로 동진을 세우면서 북에서 이주해온 명문 귀족들이었다. 청담의 풍조는 동진 · 남조에서 여전히 유행하였다. 귀족들은 유교를 명분만을 중시하는 ‘명교(名敎)’라 비판하였다. 속세를 등지고 자연과 합일하려는 탈속적인 사상은 문확과 예술 등과 결합하여 화려한 문화로 꽃피었다.
이 시대 문화는 시(時) · 서(書) · 화(畵)로 대표된다.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던 난세와 산수가 수려한 강남이라는 자연환경은 「등지상루(登地上樓)」와 「초거군(草去郡)」을 지은 산수 시인 사령운, 「도화원기(桃花源記)」와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전원시인 도연명 등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당시에 확립된 문장(산문)의 스타일인 4·6병려체는 대구를 구사하여 4구6구가 말이 함께 달리는 듯 균정과 화려함의 결정체였다. 이것은 고전에 대한 깊은 교양과 중국어 음조에 대한 예리한 감각이 합쳐져야만 나올 수 있는 문학사 상 가장 세련된 문체였다.
해서 · 행서 그리고 초서를 완벽한 예술로 완성시키고 「난정서(蘭亭序)」를 쓴 것으로 유명한 서성(書聖) 왕희지는 이 시대가 배출한 걸출한 예술가였다 .또 “형태의 신을 그려냈다‘고 일컬어지는 뛰어난 인물화 <여사잠도(女史箴圖)>를 그린 화성(畵聖) 고개지도 이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다.
이 시대는 문학과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서 자각되고 확립된 시기였다. 글씨와 그림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이것이 예술로서 자각되고, 또 비평하기 위해 문론과 서론 · 화론이 행해져 하나의 장르로 독립된 것은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장의 작법과 비평의 기준을 제시한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한·위 시대 이래 시인의 작품을 상중하 3품으로 품평한 종영의 시품, 아름다운 문장을 가려 수록한 소통의 『문선(文選)』 등이 바로 이 시대에 나온 책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론인 사혁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 보이듯이 예술 비평의 일환으로서 회화론과 회화사가 처음 본격적으로 저술되었던 시대였다. 회화는 이제 고대적인 세계관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서 독립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조충지는 당시 수학의 수준으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원주율을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이처럼 문학과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의 자유라는 풍토 위에 여러 개성을 가진 교양인이 활동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현(玄) · 유(儒) · 문(文) · 사(史)를 겸수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넷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결코 치우치지 않았다.
주요 예술
(1) 번영기에 진입한 중국회화
위진남북조 시기가 되면 한말 이래 지속되던 유학 예교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사상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리고 명사들의 출현, 청담의 성행, 현학의 흥기, 사회생활에 미친 불교의 영향 등등 각종 사상적, 문화적 배경 아래 예술은 다방면에서 모두 찬란한 성과를 거두었다. 문학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회화 역시 점차적으로 중국 고유의 화풍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다수의 회화 대가와 대량의 모사본이 유통되는 명화 및 그림을 의논하는 대량의 저작이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하여 중국 회화는 번영에 들어선다.
위진남북조 시기는 또한 산수화의 맹아이기도 하다. 산수화의 발전은 강남의 수려한 산수가 사람들에게 선사한 자연미를 향유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당시 현학 사상의 성행 및 현학가들이 표방한 은둔과도 관련이 있다. 위진남북조 시기 남북 각지에서 활약한 화단의 대가들 중에는 혜강, 사령운 등의 명사뿐 아니라 진 명제 사마소, 양 원제 소역 등 제왕까지 있었으며 회화에 심취한 이들로 인하여 회화는 전면적인 번영 양상을 보였고 더 나아가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업적을 이루어 냈다.
(2) 금동 불상의 전성기 돌입
북위 초기 흉노족 혁련씨는 불학의 중심인 장안으로 쳐들어가 불상을 없애고 승려를 죽였지만 고승 구마라습의 제자 백각선사는 평성에 도착하여 위 무제의 예우를 받았다. 북위는 북량을 멸한(439) 후 수준 높은 기예를 갖추고 있는 양주 장인들을 평성으로 잡아오는 동시에 수많은 승려들을 포로로 잡아 왔기 때문에 평성은 북방의 정치, 문화 및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로부터 금동 불상이 대량 제작되었다. 남방의 경우 동진은 이미 제왕들의 사치경쟁이 시작되었고 이런 시대적 풍조는 뛰어난 명사급 장인들의 경쟁 심리와 실력을 겨루게 만드는 외적 추동력이 되었다. 대규, 대옹 부자는 대표적으로 유명한 불상 제작 장인이다. 양식 면에서 남조 금동 불상은 여유 있는 넉넉한 천의(天衣)의 옷자락 속으로 날아갈 듯 준수한 자태가 돋보이게 하는 기법을 숭상하였다. 이는 남조에서 유행한 속되지 않게 아름다우며 청아한 수골청상(秀骨淸像) 인물의 전형이 불상 제작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남조의 불상 제작은 전반적으로 형체의 윤곽에서 전체적 통일성과 매우 풍부한 장식적 특징을 드러내며 이는 당시 경쟁적으로 사치와 낭비를 숭상했던 풍조에 부응한다. 남조와 북조를 불문하고 금동 조상의 규모는 모두 매우 웅대하고 예술적 기교 역시 날로 완벽해졌으며 이로부터 금동 조상은 완전히 중국화되었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3) 불교 사찰 벽화 예술의 최고봉
불교가 동쪽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후, 통치자의 주도하에 불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진 100여 년간 건축된 사원이 1700여 곳이고 양나라가 들어선 후 사원은 2800여 곳으로 늘어나며 남조 불교는 전성기에 진입했다. 북위의 경우 정권이 수립된 후 불교는 비록 태무제 탁발도의 '불교탄압'을 한 차례 겪었으나 문성제 즉위 후 중흥하여 사찰을 짓고 석굴을 파 불상을 조각하고 벽화를 그리는 등 일시에 더할 수 없이 성행했다.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 전국의 사찰은 3만여 곳에 이르러 전무후무하게 유행했던 불교와 서로 호응했다. 불교 에술, 특히 사찰과 석굴의 벽화 예술은 북조의 불교 석굴이 나날이 발전하고 남조 사찰이 점점 더 정밀하고 아름다워짐에 따라 더욱 심도있게 발전하여 최고봉에 이르게 되었다.
북조가 만든 대랑의 석굴 중 감숙의 돈황, 맥적산, 병령사와 신강의 약강배성, 쿠처 등의 석굴 사찰의 회화는 이 시기 불교 회화의 눈부신 업적이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하며 대표성이 가장 뚜렷한 돈황 막고굴은 북조의 석굴로서 위로는 북량, 아래로는 북주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의 시간을 거쳤고 현존하는 석굴은 36개다. 굴 안의 벽화는 기본적으로 보존이 잘 된 상태이고 그림의 소재는 주로 부처 설법도, 부처 전기, 부처 본생 및 여러 종류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와 공양인 상이다. 막고굴의 북조 벽화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중국 전통문화와 융합되는 역사정 과정을 전면적,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발전 과정은 병령사, 맥적산 등 북조 석굴화 유적에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
이 시대의 화공은 불교 도본에 따라 벽면을 그림으로 꾸미는 동시에 개인의 이해와 상상을 부단히 첨가하여 한 시대의 생활과 심미적 취향이 벽화 속으로 침투되게 했고, 이로써 외래 불교 예술은 점진적으로 중국화되며 결국 중원 문화와 모체로 결집되어 전통 문화의 연속이자 그 보충 역할을 했다.
비천은 불교 예술에서 향음(香音)의 신이라 불리며 악기를 연주할 수 있고 날아다니며 춤출 수 있는 온몸에 향이 나는 보살이다. 비천은 돈황 벽화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 그림은 제285굴의 북위 시기 감실 벽 위의 한 쌍의 비천이다.
(4) 고습의 유행
북위는 호나라 복장의 영향을 받아 일반 여성들이 소매가 좁고 몸에 붙는 짧은 저고리를 즐겨 입어 복장은 '위는 끼고 아래는 풍성한' 스타일이었다. 남북조라는 두 종류의 풍조가 서로 영향을 주고 융합되어 고습(袴褶)복장이 유행했다. 고습은 호복의 일종으로 한대 중원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동한 말년이 되면 바지는 이미 몸에 딱 붙고 좁은 긴 바지에서 바지통이 매우 넓은 '통이 큰 바지'로 바뀌어 상류사회에서 유행했다. 남북조 시기 폭이 넓은 바지와 같이 맞추어 입는 상의를 '습褶'이라고 부르고 이 두 종류의 의상을 '고습'이라 했다.
일반적인 고습을 기초로 관원들의 조복은 바지의 아랫단 폴을 넓게 하고 저고리의 소매통을 넓게 하여 당시 유행하던 넓은 소매에 넉넉한 저고리와 비슷해졌다. 북조는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오른쪽 여밈을 왼쪽 여밈으로 바꾸었다. 고습을 입은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모두 허리에 가죽 허리띠 매기를 좋아했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금은을 조각하고 주옥을 박아 장식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고습의 특징은 품이 넉넉하고 편안하면서도 또한 반드시 띠로 묶기 때문에 헐렁하고 끌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며 입으면 몸이 호리호리하면서 풍채가 뛰어나 보였다. 또 남녀가 같이 입을 수 있어 광범위하게 유행되었으며 당시의 심미적 취향을 일정 정도 반영한다.
- 남조
(1) 남조 석각을 대표하는 <예학명>
남조 양무제 천감 13년(514), 화양진일(華陽眞逸)이 기르던 학의 죽음을 애도하는 <예학명瘗鶴銘>을 짓고 상황산초가 글을 썼는데 이것이 남조에서 가장 유명한 비각의 하나다. 새겨진 시기와 작가의 설명에 대하여 역대로 정설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화양은거(華陽隱居)' 도홍경(陶弘景)의 작품으로 보고있다.
<예학명>은 마애 각석으로 원래 초산(지금의 강소 진강) 서쪽 기슭의 석벽에 있었는데 후에 번개를 맞고 갈라져 양자강으로 떨어졌다 청대 강희 때 비로소 발굴되어 초산의 정혜사로 옮겨졌다. <예학명>의 필체는 웅장하고 힘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날아올라 사라질 듯 하고 자체(字體)는 중후하고 고상하며 예스럽다. 비록 해서지만 행서와 예서의 필법의 맛과 정취를 지닌 참으로 뛰어난 석각 예술 작품이다.
이 비각은 아름다움과 질박함을 모두 갖춘 뛰어난 작품으로 역대 서예가들의 추앙을 받았다. 황정견은 "대자(大字) 중 <예학명>을 넘어서는 것이 없구나"라고 찬탄하였다. 미불, 육유 등의 명사도 비석 옆에 제목을 달고 기록을 남겼는데, 모두 <예학명>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2) 소역의 직공도
양 원제 소역(508~554)이 형주자사로 임관했을 때인 대동 6년 전후에 그린 <직공도職貢圖>는 당시 중원 이외 지역의 부족 및 국가의 인물 형상과 풍속 및 인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예술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그림은 또 <번객입조도番客入朝圖>라고도 부르는데, 원래 25명의 사신이 있었으나 지금 전해지는 북송 모사본은 이미 파손되어 12명만 있다. 이들은 활국, 페르시아, 백제, 쿠처, 왜국, 낭아수, 등지, 주고가, 가발단, 호밀단, 백제, 말국의 사절이다. 각각의 사신 상 뒤에 있는 간단한 제목에는 이들 국가와 지역의 개황과 역대 교류해온 역사적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그림의 인물 형태 묘사는 상당히 정확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서로 다른 지역의 인물들의 각각 상이한 복식과 몸차림, 얼굴 피부색, 행동거지를 통하여 서로 상이한 인물의 기질, 성격과 표정 및 태도를 표현했다. 예를 들면 활국 사신은 서북 민족의 특징을 나타내고 낭아수의 사신은 열대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왜국의 사신은 몸에서 섬나라 풍격을 드러낸다.
이 그림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인물의 얼굴 생김새에 제각기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사신들 중에 어떤 이는 침착하고, 재기가 뛰어나면서도 약해 보이는 자도 있고, 어떤 이는 질박하고 호쾌하고 시원시원하다. 각자 두드러진 성격과 지역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인물은 모두 사신으로서의 기쁨과 공경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 작가의 예술 기법상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표현한다.
- 북조
(1) 북조 민가의 대표작 <목란시>
<목란시>는 북조의 장편 서사 민가로 악부(樂府)시집 '양고각횡취곡'에 수록되어 있는 최고 걸작이다. <목란시>는 목란이 남장을 하고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목란은 늙으신 아버지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아버지를 대신해 출정이라는 고된 임무를 의연히 맡는 자기희생 정신을 표현하였다. 목란은 10년에 걸쳐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성공적으로 사명을 완수하여 꿋꿋함과 용감함을 보여준 반면, 개선하여 귀향하는 길에 관작을 받지 않고 오직 보통 여성으로 생활할 수 있기만을 원하는 순박하고 고결한 속내를 드러내었다.
<목란시>는 민간 서사시로 민간 색채가 농후하며 풍격 역시 비교적 굳세고 힘차면서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민가의 예술 특징을 표현했다. 반복법과 대구법을 연속 운용한 시구의 운율은 아름다움과 음악성을 만들어 냈으며 문답법을 이용한 심리 상태 묘사는 이를 데 없이 섬세하다. 또 유사한 구조와 음을 반복하는 대우구(對偶句)는 간결하고 세련되며 정제되어 풍부한 함의를 내포하며 정련된 언어는 서사 분위기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목란시>는 북조 악부 민가의 걸출한 업적을 대표한다.
<목란시>의 예술적 특색과 사상 내용은 후세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두보는 <목란시> 중 전 가족이 목란을 환영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사용한 표현법을 <초당시草堂詩>에서 의도적으로 모방하였다. 목란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대와 은막에서 여성 영웅의 이미지로 창조되고 있다.
(2) 남조 도자기를 능가하는 북조 도자기
중국 북방 황하 유역은 삼국 양진 시기에 도자기 수공업이 매우 쇠퇴했다. 후에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고 위 정권을 수립한 후 이로소 도자기 제조업이 차차 흥기했다. 부단히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남방 도자기 제조업의 경험을 흡수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갖는 북방 도자기를 구워내 남방이 아름다움을 전유하던 국면을 타개했다. 북방 청자는 대략 북위 시기에 발명되었고 북제를 전후하여 청자 굽는 방식이 비교적 보편화되었다.
북방은 청자 외에 다시 백자를 창조하고 연유(鉛釉)도자기를 발전시켰는데, 이는 중국 고대 도자기 기술의 또 하나의 중요 업적이자 후대 각종 채색 도자기 출현의 기초를 닦은 것이며 도자기 응용을 위해 더욱 넓은 길을 개척한 것이다. 저온 연유 도자기는 북조에서 부흥했다. 북위의 연유 도자기는 유약의 색과 조형 모두가 빼어나게 아름답다. 북조 도자기는 극도로 쇠퇴한 상황하에서 발전했기에 그 빠른 속도와 높은 성취는 중시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북조의 자기는 남방 한족 문화의 영향을 받아 조형과 장식 면에서 남조 자기와 공통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술 양식 및 의관과 복식 면에서는 북방민족 본래의 특생을 농후하게 표현하여 남북 문화 교류 추세를 반영하는 동시에 민족대융합의 위대한 업적을 드러내고 있다.
(3) 북방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한 금은기 공예
삼국, 양진, 남북조 시기, 북방 소수민족의 금은기(金銀器) 공예의 발전은 주목할 만하다. 이미 출토된 많은 공예품은 소수민족 문화 및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아 짙은 이국적 특색을 띠고 있으며 고대 변경 지역의 민족 문명과 중외 문화의 융합을 연구하는 중요한 실물 자료다. 내몽고 달이한 무명안 연합기(旗는 내몽고 자치구의 행정구획 단위)에서는 일찍이 선비족의 금룡, 소머리 녹각 금장식, 말머리 녹각 금장식이 발견되었는데 조형이 매우 생동적이며 정밀하고 아름답게 제작되었다. 요녕 북표 서관영자 북연 풍소불 묘에서 '범양공장(范陽公章)'이라는 거북 모양 꼭지가 달린 금도장, 금관장식, 사람 무늬의 산 모양 금장식, 투각(透刻)한 산 모양의 금장식 편, 금비녀, 은동곳 등의 금은기가 출토되었다.
여기에 반영된 문화의 내적 요소로 중원문화의 전통, 현지 소수민족의 문화적 요소 그리고 불교의 영향까지 있어 당시 각종 문화가 교류하며 융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진 선비 부족이 남긴 대량의 금은기에는 동물 모양의 금장식 패, 보석을 상감한 금 도장, 금반지, 금귀고리 등이 있다. 동물 모양의 금장식 패 뒷면에 새겨진 '의금'이라는 글자는 의부족의 유물임을 말해준다. 이 패에는 동물 네 마리가 상하 두 층으로 나누어져 서로 엉덩이를 맞대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예술적 특징은 흉노족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흉노족과는 차이가 있으며, 선비족 금은기의 대표적 공예작품이다. 산서성 대동에서 발견된 5세기 페르시아에서 제조된 도금한 은쟁반은 북위 왕조와 서아시아 간의 경제교역과 문화 교류를 반영한다.
->말머리 녹각 금장식
도연명의 시
왕희지의 서체
고개지의 그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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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 사마광
- <<정사 삼국지>>, 김원중
- <<삼국지 쉽게 읽기>>, 도키 아키코
- <<위진남북조사>>, 카와카쓰 요시오
- <<중국통사2>>, 중국사학회, 범우, 2008
- <<한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안정애, 가람기획, 1993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동양편)》, 우경운, 도서출판 두리미디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