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진(秦) Q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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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전국시대 전국 칠웅 중의 한 국가.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중국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하였다. 현재 중국의 영어 이름인 China의 어원이 되었다. 중국어의 발음은 Qin. 국가의 색은 검은색으로 황제의 의복과 관리들의 복장, 군복, 국기 등이 검은색이었다.
중원의 서부에 위치해 있어서 중원 사람들에게 야만인의 취급을 당했으나 기마민족들의 기마전술과 철기를 다루는 법을 일찍이 받아들여 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진시황의 사후, 2세 황제에 이르러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고 다음의 왕인 진왕 자영에 이르러 항우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통일 이후의 진나라의 정책
진나라는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다. 진시황은 중국에 한민족을 주체로 한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처음으로 성립시킨 셈이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황제(皇帝)라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서 사용하였고, 왕이 죽은 뒤에 칭하는 시호를 폐지하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로 하여 그 뒤는 이세, 삼세 황제로 부르게 하였다.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는 1인칭 단어인 짐(朕)이라는 단어도 만들어 내었다.
중앙 집권 제도의 확립
진나라는 연,조,제,위,한,초 6개의 국가를 통일한 이후, 어떻게 통일된 전국을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당시 승상이었던 왕관 등은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유로 주나라의 모습을 따라 봉건제를 주장하며 제나라와 초나라 땅에 왕을 두기를 청했다. 하지만 이사는 봉건제도로 전국을 통치하면 주나라 때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니 모든 지방을 군과 현으로 편재하여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군현제를 주장했다. 이에 진시황은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눴다. 나눠진 군은 몇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군의 장관은 군수(郡守), 현의 장관은 현령(縣令)이었으며 이들은 황제가 임명하였다. 이러한 관료제의 확립으로 인해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내었다. 하지만 당시 군수나 현령으로 임명받은 사람들은 전쟁 때 공을 세운 군인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민정에 익숙하지 못했고 법치에 따라 강압적으로 민중들을 통제했는데, 이는 이후 진나라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1]
문자의 통일
춘추전국시대 당시 전국의 국가들은 각기 다른 문자를 쓰고 있었다. 지방마다 다른 글자의 통일은 통일국가에서 중앙집권적인 관료정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2] 진시황은 다른 글자를 소전(小篆)과 예서(禮書)로 통일하였다. 소전은 비교적 복잡해서 돌에 새기는 비문이나 공식적인 묘비에서 사용되었고, 예서는 소전에 비해 단순한 형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다. 진시황으로 인한 문자의 통일이 없었다면 중국의 문자는 다양한 모습의 한자가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무기의 몰수
진시황은 통일 이후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몰수했다. 그리고는 이를 녹여 청동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함양궁의 안에 두었다. 이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교통망의 정비
당시 중국 국가들의 도로에는 마차의 바퀴자국이 나 있었는데, 다른 국가들의 마차가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나라별로 도로의 바퀴자국의 간격이 달랐다. 통일 이후 진시황은 마차의 간격을 6척으로 통일시켜 전국에 걸쳐 도로망을 정비했다. 그리고 전국에 걸쳐 치도를 건설하였다. 치도의 폭은 약 50보 정도로 이는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연燕지역과 제齊지역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오吳지역과 초楚지역까지 이러었다.[3] 진나라는 단순히 육로뿐만 아니라 수로도 정비하였다. 강남지방에 수로를 건설하고 베트남의 정복을 위하여 운하를 만들어 군사들의 식량을 운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로망의 정비는 교통과 상업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상통일
분서갱유. 사상의 통일. 법가 . 유가의 사람들은 이전의 제도를 근거로 비난을 하였는데. 의약, 점, 농업 이외의 책은 제외하고 모두 몰수해 태움.
진나라의 멸망
평가
가의의 평가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해 매우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다. 사기의 진시황 본기 편의 마지막 부분에는 전한시기 문학가의 가의의 평가를 통째로 인용하는 파격적인 서술을 보인다.
- 진나라가 우세했던 이유는 그동안의 왕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다.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의 국토는 산을 등지고 황하를 두르고 있어 견고하니 사방이 요새인 나라였다. 목공 이래로 진나라 왕(시황제)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왕이 늘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것이 어찌 대대로 현명한 군주 때문이겠는가? 진나라의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이다.[4]"
진나라는 비옥한 땅이 있는 관중지방에 위치해 있었고 함곡관이라는 요새로 인해 공격하기와 수비하기가 용이했다. 효공이 죽고 혜왕과 문왕의 시절,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들이 합종책을 맺고 백만의 군사들을 가지고 진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으나, 함곡관이라는 요새를 넘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진나라가 위치했던 나라의 장소가 어떤 군주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간에 통일을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는 것이 가의의 지적이다. 이러한 가의의 평가는 역사적 서술 방식 중에서 정치나 전쟁사 보다는 지형을 중시하는 아날학파의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 통일 이후의 왕들은 어리석었다.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 시황제는 자신에게 만족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잘못하고도 끝내 변하지 않았다. 이세황제는 그것을 이어받았으므로 이를 고치지 않고 포악하여 화를 가중시켰다. 자영은 외톨이로 가까운 피붙이도 없었으며 위태롭고 약했으나 보좌하는 신하가 없었다. 세 군주는 미혹되었으면서도 죽는 날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패망 또한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5]"
진시황은 늘 오만했고 자신이 늘 옳다는 생각에 신하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진시황에게 지혜로운 신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진시황의 포악한 성격탓에 그 신하들은 소신있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개진할 수가 없었다. 실례로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의 경우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진시황의 정책에 간언하니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파견하여 몽염을 감시하게 만들었다. 이후의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맏아들의 간언도 받아들이지 않은데 다른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진시황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인 호해가 이세황제가 되었을 때는 간신 조고에 의해 나라가 흔들렸으며 지혜로운 선비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자영이 왕이 되었을 때는 그의 곁에는 지혜로운 신하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는 멸망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 통일 이전과 통일 이후의 정책이 달라야 하는데 이를 바꾸질 못했다.
가의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진나라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 다음 글로 운을 떼고 있다.
“무릇 진나라의 천하는 작거나 약해지지 않았고 옹주의 땅도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예전과 같았다. 진섭의 지위는 제나라,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송나라 위衛나라, 중산나라의 군주들 보다 존귀하지 않았다.··. 한 사내가 난을 일으켜 칠묘가 무너지고 천자의 몸이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의를 베풀지 않았고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가 달랐기 때문이다.··.진나라 왕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을 품고는 이기적인 지모를 행하고 공신들을 믿지 않고 선비들과 백성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왕도를 없애고 사사로운 권위를 세워 문서를 금하고 형법을 가혹하게 했으며 기만과 폭력을 앞세우고 인의를 뒤로하여 포학함을 천하 통치의 시작으로 삼았다. 대체로 천하를 하나로 합친 자는 기만과 무력을 높이 여기며 천하를 안정시킨 자는 권력 변화에 순응하는 것으 귀하게 여기니, 이것은 얻는 것과 지키는 것은 법도가 다름을 말해준다.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거쳐 천하에 왕 노릇 하면서도 그 도는 바꾸지 않고 그 정치도 개혁하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를 얻고 천하를 지키는 것에 차이가 없었던 까닭이다.[6]”
진시황이 죽은 뒤에도, 진나라는 약해지지 않았었다. 진나라를 지켜주었던 관문인 함곡관도 여전히 건재했었다. 하지만 진섭(진승)이라는 농민의 반란 하나로 인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가의가 다음 그에서 언급하는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란 통일 이전의 정책과 통일 이후의 정책이 달라야 함을 시사한다. 통일을 하지 않았을 상황에는 전쟁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엄격한 법이 강조가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천하가 통일이 된 이후에는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가혹하게 고통받았을 백성들에게 좀 더 인의를 베풀었어야 한다. 하지만 진시황은 그것을 몰랐다. 만리장성과 같은 토목공사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고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