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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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간
죽간의 의미
대나무를 서사용으로 다듬어 먹으로 글시를 쓴 것을 죽간이라고 하고, 나무의 경우는 목간이라고 하며, 양자를 아울러 간독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단의 경우는 백서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에서는 파피루스를 유럽에서는 양피지를, 바빌로니아에서는 점토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간독과 비단을 보편적인 서사재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후한시대 허신의 설문해자에 따르면 간簡은 뜻을 나타내는 죽竹과 소리를 나타내는 間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미는 첩牒(글자를 적는 나무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첩은 다시 패를 의미하는 찰(札)이라고 풀이되어 있는데, 찰의 해석을 찾아보았을 때, 다시 첩으로 나와서 설문해자로 이들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는 간은 대죽머리가 뜻을 나타내는 부분이므로 기본적으로는 죽간을 가리키고, 찰은 나무목변이 뜻을 나타내는 부분이므로 목찰을 가리키지만, 후자의 경우는 목찰보다 목간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간이나 찰은 세로로 한 줄 정도 쓸 수 있게 만든 폭이 좁은 것을 기본으로 한다.
대나무의 특징
나무와 대나무는 갑골이나 금석에 비해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내구성이 강하며, 가공하기 쉽고 부피가 작다. 또, 짧은 문장은 물론 긴 문장을 작성하는 데도 편리하고, 휴대 및 보관이 비교적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다. 비단이 훨씬 휴대와 보관, 가공이 편리한 장점이 있지만, 가격이 비싸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다.
죽간의 제작 방법과 용도 및 기능
중국에서 대나무는 북쪽의 추운 지역이나 서북쪽의 메마른 사막 지역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생하거나 재배되고 있었다. <논형> 양지편에 의하면, 대나무는 먼저 결의 반대 방향으로 자른다. 그러면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원통 모양의 죽통이 생긴다. 그것을 다시 일정한 간격으로 세로로 자르게 되는데, 이와 같은 초기 과정에서 죽간의 길이와 폭이 결정되게 된다. 그것은 곧 죽간 하나에 기입할 수 있는 글자의 수가 결정됨을 의미한다. 선진시대에는 특별히 정해진 규격은 없었다. 또 죽간의 매수는 문서나 서적의 분량에 비례하여 결정되게 된다. 대나무 겉은 표피로 둘러사여 있기 때문에 거기에 직접 먹글시를 쓰면 쉽게 지워진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표피를 벗겨내고 칼로 안쪽을 다듬은 다음 안쪽 면에 내용을 쓴다. 표피를 벗겨내고 다듬은 다음 살청(殺靑)</ref> 처리를 한다. 막 잘라낸 대나무는 푸른빛을 띠고 있는데, 그것을 불에 쐬어 기름을 빼면 푸른 빛갈이 없어지게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청(汗靑) 또는 한간(汗簡0이라고 한다. 이처럼 살상처리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부식이나 충해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청 처리가 끝나면 죽간의 상하 양단의 모양을 다듬고, 편철할 부분에 삼각형의 홈을 파 놓는다. 현재 출토되어 있는 죽간을 보면 상하 양단의 모양에는 사각형, 원형, 마름모형이 있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모양을 통해 문헌을 차별화했다. 또한 청자대서용을 통해 간독의 서사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이 대서용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서적을 서사하는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이때 한 사람은 두루마리 형태의 펴널된 서적을 들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오른손에는 붓, 원손에는 간독을 들고 쓸 준비를 하고 있다. 서사하는 쪽이 들고 있는 간독은 아직 편철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죽간을 편철하기 전에 간 하나하나에 내용을 서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을 쓰다가 오자, 탈자, 연자가 생겼을 경우에는 삭도를 썼다. 대나무의 성질을 이용해 잘못된 부분을 칼로 깎아 내고 그 위에 글자를 다시 썼다.
목간의 발견과 목간의 의의
목간의 출현은 1901년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타림 분지 남쪽의 니야 유적에서 3~4세기 중국 진대의 목간 50매를 발견한 것을 효시로 한다. 그리고 한 달 뒤 스웨덴의 탐험가 헤딘이 환상의 호수 롭 노르의 위치를 찾아나선 조사 과정에서, 바싹 마른 롭 노르 호수바락의 서쪽 끝에서 누란 왕국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폐허를 발견하고 거기에 진대의 목간 120여 매를 발굴해낸 성과가 있다. 1975년 호북성 운몽 수호지 진묘에서 묘주를 매장한 관 속에서 유체와 함께 수납된 1000여매의 법률 관계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진 시황제 시대의 법률, 즉 진률의 조문과 그 의미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 1983년 12우러에서 1984년 1월까지 호북성 강릉 장가산 지역에서 전한 초기의 묮아이 발견되었다. 한대의 율인 <이년율령>과 재판 관계 문서<주얼서>가 700매 정도 발견되었따. 이 가운데 247호묘에서 출토된 1236매의 죽간은 진간 이후 죽간 발굴 사상 최대의 성과로 평가 받을 만큼 중국 고대사 연구의 주요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간독, 특히 서북 변경에서 출토된 목간에 관한 연구는 왕국유를 거쳐, 거연한간 연구에 집중한 노간에 이르러 큰 결실을 맺었다. 호남성 용산현의 진한 시대 성곽 유적에서 진대의 공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2만여 매이다. "이번에 발굴된 죽간으로 진대의 역사를 새로이 다시 기술할 가능성도 있다고 중국 전문가는 지적한다."고 말할 만큼 죽간의 발굴은 중국 역사의 발자취를 이전보다 정확히 조명할 수 있게 한다.
목간 연구의 역사
맹아기
1단계는 돈황한간을 발굴하고 연구하던 시기로, 한간 연구의 맹아기에 해당한다. 완전히 새로운 자료의 출현이고 미지의 영역이었지만, 에두아르 샤반과 왕국유가 연구를 선도하여 죽간 연구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 둘은 각자의 성과를 교환하면서 연구를 심화했다.
노간의 거연한간 연구
2차 세계대저너 전후에 노간이 진행한 거연한간 연구로 서북과학고사단이 발견된 한간은 1931년 북경대학교, 중앙연구원, 고궁박물고나에서 석독이 시작되었는데, 중일전쟁 때문에 작업이 중단되었고, 그 후 사천성 남계로 옮긴 중앙연구원에서 노간 한 사람에 의해 석문과 고증이 진행되었다. 이후 녹나은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연구가 지체되었다.
일본의 공동연구
1951년 일본에서 노간의 <거연한간고석>을 입수했다. 이를 계기로 쿄토 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모리 시카죠를 중심으로 한 거연한간 공동연구반이 조직되어 일본의 목간 연구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목간에 대한 연구가 정체해 있던 동안 일본에서 간독 연구가 꽃피웠다. 석문이 아닌 실물을 직은 도판으로 간독을 연구하고, 출토 유적과 밀접한 관계 위에 간을 파악하는 것, 간의 서식을 기초로 분류하고 고문서학적 고증을 진행함으로써 간독 연구는 이제까지의 수준을 한 단계 향상시켰다.
최근의 간독연국
1980년 이후 오늘날까지 간독의 수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내용이 다양화됨에 따라 연구도 다방면에 걸쳐 특수성과 전문성을 가주고 진행되었다. 이때까지 도판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목간과 죽간을 실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도판으로는 느끼지 못했던 점가지 해명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최근 10년 동안에는 컴퓨터를 활용한 화상, 문자 데이터베이스가 구추고디고 검색 시스템을 사용해서 간문의 의미와 거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의를 귀납적으로 해명하여, 더 정확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최신의 전자기기인 적외선투시장치를 이용하여 선명히 읽을 수 없었던 간면의 불투명한 부분까지 판독하여, 기사 내용에만 주목했던 연구방법을 넘어 서사의 방법과 간의 형상, 재질의 과학적 분석 등의 측면에서 고찰이 행해졌다.
각주
유향의 경우 대나무가 시들기 전에 죽간을 만들어 서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고,이현의 경우 대나무의 기름을 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며, 요복의 경우는 대나무의 푸른 껍질을 벗겨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고 있어 3자의 설이 모두 다르다.
출처
도미야 이타루, 『목간과 죽간으로 본 중국 고대 문화사』, 사계절, 2005 이승률, 『죽간.목간.백서 중국 고대 간백자료의 세계1』, 예문서원,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