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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카와 시즈카는 일본의 한문 및 한자학자이다.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여 [[설문해자]]의 오류를 [[갑골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특히 갑골문과 금문을 통해 초창기 | + | 시라카와 시즈카는 일본의 한문 및 한자학자이다.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여 [[설문해자]]의 오류를 [[갑골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특히 갑골문과 금문을 통해 초창기 한자 성립과정에서의 종교적 및 주술적 배경을 밝혀낸 업적이 지대하여, 그의 학문을 '시라카와 문자학'이라 지칭한다. |
==소개== | ==소개== | ||
− | 시라카와 시즈카는 1910년 | + | 시라카와 시즈카는 1910년 일본 후쿠야현에서 출생하였으며 리츠메이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교토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모교인 리츠메이칸대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1976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직을 역임하며, 집필과 학문 연구를 지속하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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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카와 시즈카는 일본과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화적 유형성을 가진다는 넓은 시야에 서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자료인 [[殷]]・[[周]]의[[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실시하고, 중국과 일본의 고대 문화에 대해 독창적인 연구를 쌓아 올렸다. 그 학설은 세상에 「시라카와 문자학」이라고 칭해져 학계의 내외로부터 높은 평가를 얻었다. 그는 수만 편의 갑골 자료를 모두 추적하는 어려운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그 배경이 되는 내용은 종교, 주술이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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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진의를 해명한 독자적인 학설은, 1900년의 오랫동안 문자 기원 연구의 법칙으로서 권위를 가진 후한의 [[허신]] [[설문해자]]의 잘못을 지적했다. 60년에 걸친 한자 연구의 성과를 기반으로 책 3부의 사전(『字統』, 『字訓』, 『字通』)으로 편찬해 한자 문화의 세계를 풍부하게 넓히고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이해시켜 향후 문자 표현이 있어야 할 길을 시사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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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카와의 연구는 원래 일본의 고대를 고찰하는 것에 끝을 내려고 했지만, 중국의 고대에까지 이르는 한자 문화권 전체에 걸친 장대한 연구가 되었다. 비교 연구에 필요성을 느껴 해외 연구자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대만의 굴만리, [[동작빈]] 등의 학자와 교류하였다. 1998년 11월, 문화 공로자로서 현창되고, 2004년 11월에 중국고대문화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문화훈장('19년도까지 총 413명만 수상한 권위 있는 훈장)을 수상하였다. 2006년 10월 9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
<ref>[https://www.ritsumei.ac.jp/features/shirakawashizuka10/ 리츠메이칸대학]</ref> | <ref>[https://www.ritsumei.ac.jp/features/shirakawashizuka10/ 리츠메이칸대학]</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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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몰두한 청춘시대<br> | ◉독서에 몰두한 청춘시대<br> | ||
시라카와 시즈카는 1910년 4월 9일 후쿠이현에서 태어났다. ‘눈이 나빠진다’라고 어머니로부터 주의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독서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13세가 되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오사카의 법률 사무소에서 거주지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또한 그 법률 사무소에는 한문 시집을 비롯한 많은 장서가 있었으며,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법률 사무소에서 하락해주어 시라카와 시즈카는 더욱더 독서에 몰입하였다. 이러한 책들에 열중하면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죽을 때까지 독서를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후에 리츠메이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교토대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시라카와 시즈카는 1910년 4월 9일 후쿠이현에서 태어났다. ‘눈이 나빠진다’라고 어머니로부터 주의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독서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13세가 되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오사카의 법률 사무소에서 거주지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또한 그 법률 사무소에는 한문 시집을 비롯한 많은 장서가 있었으며,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법률 사무소에서 하락해주어 시라카와 시즈카는 더욱더 독서에 몰입하였다. 이러한 책들에 열중하면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죽을 때까지 독서를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후에 리츠메이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교토대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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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サイ」의 발견 | + | ◉ 「サイ」의 발견<br> |
− | 트레이싱 페이퍼를 사용해 약 3000년 전의 중국의 고대 문자를 찍었다. 수만 장이나 찍으면서 문자의 성립과 연결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45세 때 '口'가 '입'이 아니라 | + | 트레이싱 페이퍼를 사용해 약 3000년 전의 중국의 고대 문자를 찍었다. 수만 장이나 찍으면서 문자의 성립과 연결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45세 때 '[[口]]'가 '입'이 아니라 신에게 보내는 축문을 넣는 그릇 'サイ'임을 발견하여 한자의 성립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인해 시라카와 시즈카는 약 2000년간 옳다고 여겨져 온 한자 해설서인 ‘[[설문해자]]’와는 다른 학설을 구축하게 되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발견이었기 때문에 반대 주장하는 학자도 많았다. 외로운 연구였지만, 자신만의 학문의 길을 외롭게 느끼지 않고 좋아하여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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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발표하는 장소로서 「甲骨金文学論叢」을 발행 | ◉ 스스로 발표하는 장소로서 「甲骨金文学論叢」을 발행 | ||
− | + | [[갑골문]]이나 [[금문]]에는 활자가 없는 글자가 매우 많아 일반학술지에 기고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스스로 도장 새기는 작은 칼을 잡고 등사기 인쇄라는 발표의 형태를 취한다. 그것이 이 『甲骨金文学論叢』이다. ‘역사’ 일자의 성립을 언급한 「釈史」나, 마찬가지로 「文」의 성립을 언급한 「釈文」 등의 논문을 이 자리에서 발표했다. 이것을 통해서 풍부한 한자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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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73세'''<br> | '''60 ~ 73세'''<br> | ||
− | ◉ 넓은 한자의 매력을 전파를 위한 | + | ◉ 넓은 한자의 매력을 전파를 위한 『字』를 출판<br> |
− | 6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100권을 넘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 + | 6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100권을 넘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 당시까지만해도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문은 대부분 연구자를 위해 작성된 어려운 것뿐이었다. 그는 학문의 성과는 보통의 사람에게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처음으로 일반인들을 위한 책 「漢字」(岩波新書)를 썼는데, 그 책을 통해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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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 『詩経』과 『万葉集』을 새로 | + |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 『詩経』과 『万葉集』을 새로 집필하였다.<br> |
− | 고대 동양의 가집(가곡을 모아 편집한 책)인 『詩経』과 『万葉集』에 대한 일반서도 새로 집필하였다. 어린 시절의 『詩経』과 『万葉集』을 읽고 비교하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万葉』에 대한 考説을 시도하는 것은 나의 소원의 하나이다. 처음에 중국의 고대문학에 뜻한 것도,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初期万葉論』 「あとがき」에 따라) | + | 고대 동양의 가집(가곡을 모아 편집한 책)인 『詩経』과 『万葉集』에 대한 일반서도 새로 집필하였다. 어린 시절의 『詩経』과 『万葉集』을 읽고 비교하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万葉』에 대한 考説을 시도하는 것은 나의 소원의 하나이다. 처음에 중국의 고대문학에 뜻한 것도,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初期万葉論』 「あとがき」에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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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br> | ◉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br> | ||
시라카와 시즈카의 연구는 원래 일본의 고대를 고찰하는 것에 끝을 내고 있지만, 비교 연구의 필요성으로부터 중국의 고대에 퍼져, 한자 문화권 전체에 걸치는 장대한 연구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또, 이 무렵부터 시라카와 시즈카의 저작이 대만에서 번역되어 출판하였다. | 시라카와 시즈카의 연구는 원래 일본의 고대를 고찰하는 것에 끝을 내고 있지만, 비교 연구의 필요성으로부터 중국의 고대에 퍼져, 한자 문화권 전체에 걸치는 장대한 연구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또, 이 무렵부터 시라카와 시즈카의 저작이 대만에서 번역되어 출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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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96세'''<br> | '''73 ~ 96세'''<br> | ||
◉역사적 위업이 되는 자서 3부작을 간행 | ◉역사적 위업이 되는 자서 3부작을 간행 | ||
− | “한 걸음씩 옮기면 산에서도 옮길 수 있다”. 73세 때, 지금까지의 연구의 정리로서, 글자 작성에 임하기 | + | “한 걸음씩 옮기면 산에서도 옮길 수 있다”. 73세 때, 지금까지의 연구의 정리로서, 글자 작성에 임하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같은 페이스로 계속 써, 5만 장을 넘는 원고를 혼자 써 13년 반에 걸쳐 3권의 글을 완성하였다. 총 페이지 수가 3,000페이지를 초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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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훈장 수장 | ◉문화훈장 수장 | ||
− | 2004년, 94세로, 시라카와 | + | 2004년, 94세로, 시라카와 시즈카는 문화 훈장을 수장하였다. 장기간의 한자 연구,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비교 연구에 대한 성과가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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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시라카와 시즈키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 개설 | |
− | 2005년, 시라카와 시즈카 자신의 연구 성과의 보급과 동양 문자 문화의 연구 교류의 발전을 목적으로, | + | 2005년, 시라카와 시즈카 자신의 연구 성과의 보급과 동양 문자 문화의 연구 교류의 발전을 목적으로,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가 개설되었다. |
<ref>[https://www.ritsumei.ac.jp/research/shirakawa/about/introduce/#intro01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요시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ref> | <ref>[https://www.ritsumei.ac.jp/research/shirakawa/about/introduce/#intro01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요시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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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론은 넷으로 요약된다. | 그의 이론은 넷으로 요약된다. | ||
− | ① 한자의 초형(初形)을 통해서 그 초훈(初訓)을 구명한다.<br> ② 한자의 기원과 효용을 제례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br> ③ 한자는 상징이며, 상징을 넘어 사유와 철학의 세계를 낳았다고 본다.<br> ④ 한자의 구조는 본래 체계적이므로 한자를 연구하려면 체계적인 | + | ① 한자의 초형(初形)을 통해서 그 초훈(初訓)을 구명한다.<br> ② 한자의 기원과 효용을 제례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br> ③ 한자는 상징이며, 상징을 넘어 사유와 철학의 세계를 낳았다고 본다.<br> ④ 한자의 구조는 본래 체계적이므로 한자를 연구하려면 체계적인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 <br> |
− |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 예시를 들어 설명하자면, [[東]]은 설문해자에서는 해가 '부상'이라는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된다. 이는 [[소전]]을 기준으로 중국인의 가치관에 부합한다. | + |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 예시를 들어 설명하자면, [[東]]은 설문해자에서는 해가 '부상'이라는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된다. 이는 [[소전]]을 기준으로 중국인의 가치관에 부합한다. 하지만 1900년대에 갑골문과 금문 연구가 진행되며 설문해자의 오류가 발견된다. 갑골문에서는 東이 주머니 탁(囊)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자가 동쪽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은 단순히 '동쪽'과 '주머니'를 뜻하는 어휘의 발음이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는 이렇게 갑골문과 금문에 의거하여 설문해자의 오류를 사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br> |
− | 특히 한자는 회화나 모사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징에서 기원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갑골문의 주술적 및 종교적 의미를 밝혀내었다. 이는 다음 한자들의 예시를 통해 에서 보다 상세히 | + | 특히 한자는 회화나 모사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징에서 기원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갑골문의 주술적 및 종교적 의미를 밝혀내었다. 이는 다음 한자들의 예시를 통해 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婦]]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여자'라는 기존의 [[설문해자]]의 해석을 뒤엎고 이를 신전을 정화하는 무녀(媚)라고 해석하였으며, 여러 해석이 난무하였던 [[告]]를 단순히 [[牛]]와 [[口]]의 형성자가 아닌, 신에 대한 축고를 걸어 놓은 그릇 위에 나뭇가지가 꽂혀 있는 모습(나무에 매달린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眉]]는 그저 눈썹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가 아니라, 주술을 실행하는 무녀가 눈화장을 한 모습을 뜻한다고 주술적 의미에 입각하여 설명하였으며, 기원에 다양한 의견이 있는 [[帝]] 또한 꽂받침을 형상화하였다고 정의하며 샤머니즘에 입각하여 설명하였다.<br> |
− | <Br> 이는 한자가 상징이라는 단순한 문자의 특징을 넘어, 사유와 철학의 세계에 있다는 | + | <Br> 이는 한자가 상징이라는 단순한 문자의 특징을 넘어, 사유와 철학의 세계에 있다는 가치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한자는 본래는 표음문자가 아니며, 표음의 기능은 [[가차]]나 형성에서 나타났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자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갑골을 논하지 않고 후대의 변형된 자형으로만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
==サイ (漢字学)== | ==サイ (漢字学)== | ||
+ | '口'이 붙는 한자는 일본에서 가장 큰 한화 사전인 '대한화사전'의 '[[口]]' 부에 1447자가 있다. 그러나 이 중에는 '입'이라는 의미만으로는 글자의 성립을 설명할 수 없거나 모순이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
+ | <br><br> | ||
+ | 예를 들어 교과서나 한화 사전을 바탕으로 해 온 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에 생긴 허신의 설문해자에서는 ‘[[告]]’는 소가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호소하기 위해 입을 비빈다고 하고, [[名]]은 저녁이 되면 어두워서 입으로 이름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소는 입으로 사람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으며,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저녁뿐만 아니라 밝은 낮에도 입으로 이름을 말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들은 올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 없었다. | ||
+ | <br><br> | ||
+ | 이 문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시라카와 시즈카에 의한 「サイ」의 발견이었다. 그동안 단순히 ‘입’으로 해석해 온 것의 대부분은 사실 '축사(사람이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쓴 글)를 담는 그릇의 형태'임을 밝혀낸 것이다. | ||
+ | <br><br> | ||
+ | 이 발견으로 의문을 제기했던 많은 한자의 성립과 새로운 문자의 계열이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한자를 낳는 배경이 된 3000년 전 중국 고대인들의 생활, 습속, 문화까지도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ref>「白川文字学に学ぶ『漢字学習講座』資料より」(宇佐美公有作 2005)</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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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카와 시즈카에 대한 비판== | ||
+ | 리친메이칸 대학의 고대 중국 학자 落合淳思(오츠아이 아츠사)는 시라카와의 갑골문 해석은 “전제 없이 주술과 관련해 해석했기 때문에 牽強付会(사실이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사정이 좋도록 무리하게 박는 것)의 설도 적지 않다”라고 비판하였다. | ||
+ | <br><br> | ||
+ | 呉哲男은 시라카와의 [[갑골문]] 해석의 특징을 '[[口]]'이라는 자형의 대부분을 '하느님의 기도의 글인 축사를 넣는 그릇'이라고 주장하고만 있으며 그렇게 해석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또한 ‘성스러운 그릇’의 유물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
+ | <br><br> | ||
+ | 시라카와는, [[갑골문]]자 나 [[금문]] 등 초창기의 한자의 성립에는 종교적, 주술적인 것이 배경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증이 어려운 이러한 요소를 그대로 학설으로 하는 것에 불가한 것이라고 요시카와 코지로 , 도도 아키호를 필두로 하는 당시의 주류 중국 고대 학자들이 비판하였다. 그것을 계승하고 있는 아츠지 테츠지도 비판적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일본 고대 가요의 주술적 배경에 관한 고찰한 흔적이 있지만 전문가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 ||
+ | <br><br> | ||
+ | 중국 고대 학자로 도쿄 대학 명예 교수인 카토 죠켄(1894-1978)은 강의에서 "시라카와는 '한자'를 매도했다."라고 이야기했다.<ref>[https://ja.wikipedia.org/wiki/%E7%99%BD%E5%B7%9D%E9%9D%99 일본 위키피디아 白川静]</ref> | ||
==저서== | ==저서== | ||
− | 『중국의 신화』<br>『중국의 고대문학』<br> 『갑골문의 세계/금문의 세계』<br>『만엽집』<br> 『갑골 금문학논총』<br>『공자전』<br>『한자백화』등 | + | * 『중국의 신화』<br> |
− | + | * 『중국의 고대문학』<br> | |
− | + | * 『갑골문의 세계/금문의 세계』<br> | |
+ | * 『만엽집』<br> | ||
+ | * 『갑골 금문학논총』<br> | ||
+ | * 『공자전』<br> | ||
+ | * 『한자백화』등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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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의 세계』, 고인덕 역, 솔출판사, 2008.<br> | 1.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의 세계』, 고인덕 역, 솔출판사, 2008.<br> | ||
2.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 기원과 그 배경』, 심경호 역, AK, 2017.<br> | 2.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 기원과 그 배경』, 심경호 역, AK, 2017.<br> |
2022년 12월 26일 (월) 15:20 기준 최신판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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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0년 4월 9일, 일본 후쿠야현 |
사망 |
2006년 11월 30일 |
학력 | 교토대학 문학 박사 |
경력 |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
상훈 | 일본 문화훈장(중국고대문화 연구) |
개요
시라카와 시즈카는 일본의 한문 및 한자학자이다.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여 설문해자의 오류를 갑골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특히 갑골문과 금문을 통해 초창기 한자 성립과정에서의 종교적 및 주술적 배경을 밝혀낸 업적이 지대하여, 그의 학문을 '시라카와 문자학'이라 지칭한다.
소개
시라카와 시즈카는 1910년 일본 후쿠야현에서 출생하였으며 리츠메이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교토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모교인 리츠메이칸대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1976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직을 역임하며, 집필과 학문 연구를 지속하였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일본과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화적 유형성을 가진다는 넓은 시야에 서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자료인 殷・周의甲骨文과 金文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실시하고, 중국과 일본의 고대 문화에 대해 독창적인 연구를 쌓아 올렸다. 그 학설은 세상에 「시라카와 문자학」이라고 칭해져 학계의 내외로부터 높은 평가를 얻었다. 그는 수만 편의 갑골 자료를 모두 추적하는 어려운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그 배경이 되는 내용은 종교, 주술이었다.
그 진의를 해명한 독자적인 학설은, 1900년의 오랫동안 문자 기원 연구의 법칙으로서 권위를 가진 후한의 허신 설문해자의 잘못을 지적했다. 60년에 걸친 한자 연구의 성과를 기반으로 책 3부의 사전(『字統』, 『字訓』, 『字通』)으로 편찬해 한자 문화의 세계를 풍부하게 넓히고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이해시켜 향후 문자 표현이 있어야 할 길을 시사했다.
시라카와의 연구는 원래 일본의 고대를 고찰하는 것에 끝을 내려고 했지만, 중국의 고대에까지 이르는 한자 문화권 전체에 걸친 장대한 연구가 되었다. 비교 연구에 필요성을 느껴 해외 연구자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대만의 굴만리, 동작빈 등의 학자와 교류하였다. 1998년 11월, 문화 공로자로서 현창되고, 2004년 11월에 중국고대문화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문화훈장('19년도까지 총 413명만 수상한 권위 있는 훈장)을 수상하였다. 2006년 10월 9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
생애
0 ~ 35세
◉독서에 몰두한 청춘시대
시라카와 시즈카는 1910년 4월 9일 후쿠이현에서 태어났다. ‘눈이 나빠진다’라고 어머니로부터 주의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독서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13세가 되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오사카의 법률 사무소에서 거주지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또한 그 법률 사무소에는 한문 시집을 비롯한 많은 장서가 있었으며,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법률 사무소에서 하락해주어 시라카와 시즈카는 더욱더 독서에 몰입하였다. 이러한 책들에 열중하면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죽을 때까지 독서를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후에 리츠메이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교토대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문자 연구의 세계로
독서를 진행하는 동안 점점 '동양'이라는 말에 마음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집(가곡을 모아 편집한 책) '만엽집'과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시경'을 비교하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의 고대 문자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 교원을 목표로 하게 된 것이다.
35 ~ 65세
◉ 「サイ」의 발견
트레이싱 페이퍼를 사용해 약 3000년 전의 중국의 고대 문자를 찍었다. 수만 장이나 찍으면서 문자의 성립과 연결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45세 때 '口'가 '입'이 아니라 신에게 보내는 축문을 넣는 그릇 'サイ'임을 발견하여 한자의 성립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인해 시라카와 시즈카는 약 2000년간 옳다고 여겨져 온 한자 해설서인 ‘설문해자’와는 다른 학설을 구축하게 되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발견이었기 때문에 반대 주장하는 학자도 많았다. 외로운 연구였지만, 자신만의 학문의 길을 외롭게 느끼지 않고 좋아하여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 스스로 발표하는 장소로서 「甲骨金文学論叢」을 발행
갑골문이나 금문에는 활자가 없는 글자가 매우 많아 일반학술지에 기고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스스로 도장 새기는 작은 칼을 잡고 등사기 인쇄라는 발표의 형태를 취한다. 그것이 이 『甲骨金文学論叢』이다. ‘역사’ 일자의 성립을 언급한 「釈史」나, 마찬가지로 「文」의 성립을 언급한 「釈文」 등의 논문을 이 자리에서 발표했다. 이것을 통해서 풍부한 한자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60 ~ 73세
◉ 넓은 한자의 매력을 전파를 위한 『字』를 출판
6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100권을 넘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 당시까지만해도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문은 대부분 연구자를 위해 작성된 어려운 것뿐이었다. 그는 학문의 성과는 보통의 사람에게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처음으로 일반인들을 위한 책 「漢字」(岩波新書)를 썼는데, 그 책을 통해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 『詩経』과 『万葉集』을 새로 집필하였다.
고대 동양의 가집(가곡을 모아 편집한 책)인 『詩経』과 『万葉集』에 대한 일반서도 새로 집필하였다. 어린 시절의 『詩経』과 『万葉集』을 읽고 비교하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万葉』에 대한 考説을 시도하는 것은 나의 소원의 하나이다. 처음에 중국의 고대문학에 뜻한 것도,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初期万葉論』 「あとがき」에 따라)
◉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
시라카와 시즈카의 연구는 원래 일본의 고대를 고찰하는 것에 끝을 내고 있지만, 비교 연구의 필요성으로부터 중국의 고대에 퍼져, 한자 문화권 전체에 걸치는 장대한 연구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해외 연구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또, 이 무렵부터 시라카와 시즈카의 저작이 대만에서 번역되어 출판하였다.
73 ~ 96세
◉역사적 위업이 되는 자서 3부작을 간행
“한 걸음씩 옮기면 산에서도 옮길 수 있다”. 73세 때, 지금까지의 연구의 정리로서, 글자 작성에 임하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같은 페이스로 계속 써, 5만 장을 넘는 원고를 혼자 써 13년 반에 걸쳐 3권의 글을 완성하였다. 총 페이지 수가 3,000페이지를 초과하였다.
◉문화훈장 수장
2004년, 94세로, 시라카와 시즈카는 문화 훈장을 수장하였다. 장기간의 한자 연구,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비교 연구에 대한 성과가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시라카와 시즈키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 개설
2005년, 시라카와 시즈카 자신의 연구 성과의 보급과 동양 문자 문화의 연구 교류의 발전을 목적으로,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 문자 문화 연구소가 개설되었다.
[2]
학문관
그의 이론은 넷으로 요약된다.
① 한자의 초형(初形)을 통해서 그 초훈(初訓)을 구명한다.
② 한자의 기원과 효용을 제례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③ 한자는 상징이며, 상징을 넘어 사유와 철학의 세계를 낳았다고 본다.
④ 한자의 구조는 본래 체계적이므로 한자를 연구하려면 체계적인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 예시를 들어 설명하자면, 東은 설문해자에서는 해가 '부상'이라는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된다. 이는 소전을 기준으로 중국인의 가치관에 부합한다. 하지만 1900년대에 갑골문과 금문 연구가 진행되며 설문해자의 오류가 발견된다. 갑골문에서는 東이 주머니 탁(囊)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자가 동쪽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은 단순히 '동쪽'과 '주머니'를 뜻하는 어휘의 발음이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는 이렇게 갑골문과 금문에 의거하여 설문해자의 오류를 사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한자는 회화나 모사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징에서 기원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갑골문의 주술적 및 종교적 의미를 밝혀내었다. 이는 다음 한자들의 예시를 통해 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婦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여자'라는 기존의 설문해자의 해석을 뒤엎고 이를 신전을 정화하는 무녀(媚)라고 해석하였으며, 여러 해석이 난무하였던 告를 단순히 牛와 口의 형성자가 아닌, 신에 대한 축고를 걸어 놓은 그릇 위에 나뭇가지가 꽂혀 있는 모습(나무에 매달린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眉는 그저 눈썹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가 아니라, 주술을 실행하는 무녀가 눈화장을 한 모습을 뜻한다고 주술적 의미에 입각하여 설명하였으며, 기원에 다양한 의견이 있는 帝 또한 꽂받침을 형상화하였다고 정의하며 샤머니즘에 입각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한자가 상징이라는 단순한 문자의 특징을 넘어, 사유와 철학의 세계에 있다는 가치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한자는 본래는 표음문자가 아니며, 표음의 기능은 가차나 형성에서 나타났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자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갑골을 논하지 않고 후대의 변형된 자형으로만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サイ (漢字学)
'口'이 붙는 한자는 일본에서 가장 큰 한화 사전인 '대한화사전'의 '口' 부에 1447자가 있다. 그러나 이 중에는 '입'이라는 의미만으로는 글자의 성립을 설명할 수 없거나 모순이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교과서나 한화 사전을 바탕으로 해 온 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에 생긴 허신의 설문해자에서는 ‘告’는 소가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호소하기 위해 입을 비빈다고 하고, 名은 저녁이 되면 어두워서 입으로 이름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소는 입으로 사람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으며,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저녁뿐만 아니라 밝은 낮에도 입으로 이름을 말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들은 올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시라카와 시즈카에 의한 「サイ」의 발견이었다. 그동안 단순히 ‘입’으로 해석해 온 것의 대부분은 사실 '축사(사람이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쓴 글)를 담는 그릇의 형태'임을 밝혀낸 것이다.
이 발견으로 의문을 제기했던 많은 한자의 성립과 새로운 문자의 계열이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한자를 낳는 배경이 된 3000년 전 중국 고대인들의 생활, 습속, 문화까지도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3]
시라카와 시즈카에 대한 비판
리친메이칸 대학의 고대 중국 학자 落合淳思(오츠아이 아츠사)는 시라카와의 갑골문 해석은 “전제 없이 주술과 관련해 해석했기 때문에 牽強付会(사실이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사정이 좋도록 무리하게 박는 것)의 설도 적지 않다”라고 비판하였다.
呉哲男은 시라카와의 갑골문 해석의 특징을 '口'이라는 자형의 대부분을 '하느님의 기도의 글인 축사를 넣는 그릇'이라고 주장하고만 있으며 그렇게 해석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또한 ‘성스러운 그릇’의 유물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시라카와는, 갑골문자 나 금문 등 초창기의 한자의 성립에는 종교적, 주술적인 것이 배경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증이 어려운 이러한 요소를 그대로 학설으로 하는 것에 불가한 것이라고 요시카와 코지로 , 도도 아키호를 필두로 하는 당시의 주류 중국 고대 학자들이 비판하였다. 그것을 계승하고 있는 아츠지 테츠지도 비판적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일본 고대 가요의 주술적 배경에 관한 고찰한 흔적이 있지만 전문가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중국 고대 학자로 도쿄 대학 명예 교수인 카토 죠켄(1894-1978)은 강의에서 "시라카와는 '한자'를 매도했다."라고 이야기했다.[4]
저서
- 『중국의 신화』
- 『중국의 고대문학』
- 『갑골문의 세계/금문의 세계』
- 『만엽집』
- 『갑골 금문학논총』
- 『공자전』
- 『한자백화』등
참고자료
1.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의 세계』, 고인덕 역, 솔출판사, 2008.
2.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 기원과 그 배경』, 심경호 역, AK, 2017.
3. 沈慶昊(Sim Kyung-ho).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의 문자학 세계." 동아한학연구 -.1 (2005): 89-108.
4. 시라카와 시즈카, 『漢字 백 가지 이야기』, 심경호 역, 황소자리, 2005.
5. 전창재,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학의 배경과 특징: 한자학의 배경과 언어학적, 한자의 형태 분석적 특성을 바탕으로", 인문예술학회, (2021): 223 - 251.
외부링크
각주
- ↑ 리츠메이칸대학
- ↑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요시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
- ↑ 「白川文字学に学ぶ『漢字学習講座』資料より」(宇佐美公有作 2005)
- ↑ 일본 위키피디아 白川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