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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사마천에게 닥친 가혹한 시련도 사기를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사마천은 이릉(李陵)을 옹호하다가 궁형(宮刑)을 선고 받았다.([[이릉의 화]]) 당시 궁형을 선고 받으면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 자존심을 택하여 자결하였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가 받은 치욕을 <<사기>> 저술의 역사적·시대적 동기로 승화시켰다. 사마천이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보임안서]](報任安書)>를 본다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인간에겐 울적한 생각을 풀 수 없을 때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미래에 희망을 건 명저가 태어난다.”<ref>사마천, 이주훈·유소림, <<사마천의 사기3>>, 사사연, 2007, 5p.g.</ref> 실명했지만 <<국어(國語)>>를 저술한 좌구명(左丘明), 다리를 절단 당했지만 병법책을 엮은 손빈(孫臏), 진에 억류당하여 <<설난(說難)>>, <<고분(孤憤)>>을 역작한 한비(韓非) 등을 언급하며 역사적인 인물들과 자신을 결부시키며 사기 집필의 이유를 제시했다.
 
<br>사마천에게 닥친 가혹한 시련도 사기를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사마천은 이릉(李陵)을 옹호하다가 궁형(宮刑)을 선고 받았다.([[이릉의 화]]) 당시 궁형을 선고 받으면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 자존심을 택하여 자결하였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가 받은 치욕을 <<사기>> 저술의 역사적·시대적 동기로 승화시켰다. 사마천이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보임안서]](報任安書)>를 본다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인간에겐 울적한 생각을 풀 수 없을 때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미래에 희망을 건 명저가 태어난다.”<ref>사마천, 이주훈·유소림, <<사마천의 사기3>>, 사사연, 2007, 5p.g.</ref> 실명했지만 <<국어(國語)>>를 저술한 좌구명(左丘明), 다리를 절단 당했지만 병법책을 엮은 손빈(孫臏), 진에 억류당하여 <<설난(說難)>>, <<고분(孤憤)>>을 역작한 한비(韓非) 등을 언급하며 역사적인 인물들과 자신을 결부시키며 사기 집필의 이유를 제시했다.
 
<br>이러한 사마천의 사기 집필 동기는 <보안임서>에 보다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마천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지언]](一家之言)을 이루리라”<ref>김영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창해, 2006, 453p.g.</ref>고 선언했다. 일가지언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뜻을 세상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을 공자와, 그리고 <<사기>>를 당시 [[공자]]가 지었다고 알려진 <<[[춘추]]>>와 대등한 위치에 놓고 바라보았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사기의 <태사공자서>편에 잘 수록되어 있다. 그는 주공이 죽고 난 뒤 500년 뒤에 공자가 태어났고 공자가 죽은 뒤 지금 500년이 되었다며 <<춘추>>를 잇고 시, 예, 악의 근본을 탐구할 사람이 나타나야 된다고 하였다. 자신의 아버지 뜻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뜻을 사마천이 이어받았으므로 사마천이 주공과 공자의 뜻을 잇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공자와 <<춘추>>가 추앙받는 것처럼 사마천은 <<사기>>가 훗날 인정받아 사람들이 사기의 가치와 사마천 본인의 능력을 알아줄 것을 기대하였다.
 
<br>이러한 사마천의 사기 집필 동기는 <보안임서>에 보다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마천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지언]](一家之言)을 이루리라”<ref>김영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창해, 2006, 453p.g.</ref>고 선언했다. 일가지언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뜻을 세상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을 공자와, 그리고 <<사기>>를 당시 [[공자]]가 지었다고 알려진 <<[[춘추]]>>와 대등한 위치에 놓고 바라보았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사기의 <태사공자서>편에 잘 수록되어 있다. 그는 주공이 죽고 난 뒤 500년 뒤에 공자가 태어났고 공자가 죽은 뒤 지금 500년이 되었다며 <<춘추>>를 잇고 시, 예, 악의 근본을 탐구할 사람이 나타나야 된다고 하였다. 자신의 아버지 뜻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뜻을 사마천이 이어받았으므로 사마천이 주공과 공자의 뜻을 잇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공자와 <<춘추>>가 추앙받는 것처럼 사마천은 <<사기>>가 훗날 인정받아 사람들이 사기의 가치와 사마천 본인의 능력을 알아줄 것을 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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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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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는 24사 정사의 첫 번째 역사서이자, 총 130편으로 본기·표·서·세가·열전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다섯 체제가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완전체를 이룬다. [[기전체]](紀傳體)적 서술방식이 사용되었으며, 왕조 중심의 역사가 아닌 사회 전반에 걸친 보고서이다. 사기에 나타난 참고서는 6경 및 그 주석서, 제자백가서, 고금 역사서, 황실 기록, 문학서 등 총 102종에 이르고, 이 외에도 사마담이 축적해온 자료와 사마천이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모은 기록이 사용되었다.
  
 
== 사기의 사상 ==
 
== 사기의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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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사마천의 경제사상은 많은 유학자들에게 비판받았다. 유가에서의 경제 관념과 크게 위배되기 때문이다. 유가에서는 상업을 억제하고 중농주의 정책을 펼쳐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한다. 그들에게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은 부도덕한 것이며 불경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들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획득되어지는 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진보적인 경제사상을 보여주며 당시 유가의 위선적인 도덕관을 비판하고 경제논리에 있어서 유가의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br>사마천의 경제사상은 많은 유학자들에게 비판받았다. 유가에서의 경제 관념과 크게 위배되기 때문이다. 유가에서는 상업을 억제하고 중농주의 정책을 펼쳐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한다. 그들에게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은 부도덕한 것이며 불경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들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획득되어지는 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진보적인 경제사상을 보여주며 당시 유가의 위선적인 도덕관을 비판하고 경제논리에 있어서 유가의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사기의 구성==
 
  
<<사기>>는 24사 정사의 첫 번째 역사서이자, 총 130편으로 본기·표·서·세가·열전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다섯 체제가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완전체를 이룬다. [[기전체]](紀傳體)적 서술방식이 사용되었으며, 왕조 중심의 역사가 아닌 사회 전반에 걸친 보고서이다. 사기에 나타난 참고서는 6경 및 그 주석서, 제자백가서, 고금 역사서, 황실 기록, 문학서 등 총 102종에 이르고, 이 외에도 사마담이 축적해온 자료와 사마천이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모은 기록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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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가치==
  
==사기의 가치==
 
 
===호견법의 첫 등장===
 
===호견법의 첫 등장===
 
<<사기>>는 단순히 인물을 기록만한 것이 아니다. 그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듯 포만감 있게 형상을 묘사하였다. 세목의 묘사를 통하여 주제도 드러내고 그 인물을 완벽하게 재현해내었다. 사기 속 인물이 이렇게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생동감 있게 표현된 것은 바로‘[[호견법]](互見法)’때문이다. 즉, 사기 전체를 읽지 않는다면 그 인물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마천이 처음으로 제시한 [[호견법]]이 등장한 이후 모든 책은 [[호견법]]을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호견법]]은 중국 역사서의 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기>>는 단순히 인물을 기록만한 것이 아니다. 그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듯 포만감 있게 형상을 묘사하였다. 세목의 묘사를 통하여 주제도 드러내고 그 인물을 완벽하게 재현해내었다. 사기 속 인물이 이렇게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생동감 있게 표현된 것은 바로‘[[호견법]](互見法)’때문이다. 즉, 사기 전체를 읽지 않는다면 그 인물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마천이 처음으로 제시한 [[호견법]]이 등장한 이후 모든 책은 [[호견법]]을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호견법]]은 중국 역사서의 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16년 5월 12일 (목) 22: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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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는 전설시대인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는 3천여 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는 총 130편으로 모두 52만 6,500자로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죽간에 글을 썼으며 이것이 베껴지는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전파되지 못했다. 책이 완성되고 얼마 되지 않아 저소손(褚少孫)이 그 내용을 보완했다. 이 이후에도 결손되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는 후대에 보완되었다. 현재 통용되는 사기에는 55만 5,660자로 기존의 사기보다 사용된 글자 수가 늘었다.
사기의 원래 명칭은 <<태사공서>>이다.‘태사공’이란 사마천이 아버지‘사마담’을 높여 부른 호칭이기도 하였고, 본인의 호칭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사기는 반고가 지은 <<한서>> <예문지>에서 <<태사공>>, <<태사공서>>, <<태사공기>> 등으로 불렸다. 사기(史記)라는 단어는 본래 역사책의 통칭으로 사용되었지만 위진 시대에 이르러 사마천의 <<사기>>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사마천의 사기 집필 이유

사마천의 <<사기>> 집필 이유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우선, 그의 집안 내력을 들 수 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사관이었고 그는 사관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사마담은 역사서의 편찬을 목표했지만 이를 다하지 못하고 사마천에게 역사서의 완성을 유언으로 위임했다.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사관으로서의 교육을 받아 그 역량이 충분하였고,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들여 사기에 대한 저술 의지를 갖게 되었다.
사마천에게 닥친 가혹한 시련도 사기를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사마천은 이릉(李陵)을 옹호하다가 궁형(宮刑)을 선고 받았다.(이릉의 화) 당시 궁형을 선고 받으면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 자존심을 택하여 자결하였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가 받은 치욕을 <<사기>> 저술의 역사적·시대적 동기로 승화시켰다. 사마천이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보임안서(報任安書)>를 본다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인간에겐 울적한 생각을 풀 수 없을 때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미래에 희망을 건 명저가 태어난다.”[1] 실명했지만 <<국어(國語)>>를 저술한 좌구명(左丘明), 다리를 절단 당했지만 병법책을 엮은 손빈(孫臏), 진에 억류당하여 <<설난(說難)>>, <<고분(孤憤)>>을 역작한 한비(韓非) 등을 언급하며 역사적인 인물들과 자신을 결부시키며 사기 집필의 이유를 제시했다.
이러한 사마천의 사기 집필 동기는 <보안임서>에 보다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마천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지언(一家之言)을 이루리라”[2]고 선언했다. 일가지언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뜻을 세상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을 공자와, 그리고 <<사기>>를 당시 공자가 지었다고 알려진 <<춘추>>와 대등한 위치에 놓고 바라보았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사기의 <태사공자서>편에 잘 수록되어 있다. 그는 주공이 죽고 난 뒤 500년 뒤에 공자가 태어났고 공자가 죽은 뒤 지금 500년이 되었다며 <<춘추>>를 잇고 시, 예, 악의 근본을 탐구할 사람이 나타나야 된다고 하였다. 자신의 아버지 뜻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뜻을 사마천이 이어받았으므로 사마천이 주공과 공자의 뜻을 잇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공자와 <<춘추>>가 추앙받는 것처럼 사마천은 <<사기>>가 훗날 인정받아 사람들이 사기의 가치와 사마천 본인의 능력을 알아줄 것을 기대하였다.

사기의 구성

<<사기>>는 24사 정사의 첫 번째 역사서이자, 총 130편으로 본기·표·서·세가·열전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본기(本紀) 12편, (表) 10편, (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다섯 체제가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완전체를 이룬다. 기전체(紀傳體)적 서술방식이 사용되었으며, 왕조 중심의 역사가 아닌 사회 전반에 걸친 보고서이다. 사기에 나타난 참고서는 6경 및 그 주석서, 제자백가서, 고금 역사서, 황실 기록, 문학서 등 총 102종에 이르고, 이 외에도 사마담이 축적해온 자료와 사마천이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모은 기록이 사용되었다.

사기의 사상

유가사상(儒家思想)과 황노사상(黃老思想)

사실 사마천의 <<사기>>에 어떠한 사상이 담겨져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보았을 때 유가, 도가 외에도 여러 가지 사상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과 <<사기>>에 담긴 사상을 ‘유가사상’으로 보는 견해와 ‘황노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유가사상’으로 보는 견해는 사마천 자신이 ‘주공’과 ‘공자’의 계보를 잇는 사람이라고 선언한 점, 또한 <공자세가>가 ‘열전’이 아닌 ‘세가’에 수록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황노사상’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은 <육가요지(六家要旨)>의 내용과 <<사기>> 전체에 깔려있는 ‘황노사상’을 근거로 제시한다.
사마천은 어린 시절 동중서(董仲舒)에게 유학 사상을 배웠고 사마천이 살던 시대의 주류 사상이 공양학이었다. 사마천은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에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자신을 불효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몸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을 불효라 여기는 것은 유가의 효 사상이다. <<사기>>에 보이는 그의 ‘대일통사상(大一統思想)’도 유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사기>>의 ‘세가’는 <공자열전>과 <진섭세가>를 제외하고 춘추전국 이래로 제후와 귀족의 역사를 적어놓았다. ‘열전’에는 그 외의 관리, 학자, 자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서술되어있는데 노자와 한비자의 이야기도 열전에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공자열전>도 성격상 열전에 포함되는 것이 맞는데 세가에 올렸다는 것은 <<사기>>가 유가사상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공자와 관련된 내용을 <공자세가>, <중니제자열전>, <사림열전>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등 <<사기>>는 공자와 유가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사마천은 <공자세전>에서 천하에 군왕과 현인이 많았지만 공자만 으뜸으로 여겨져 지금까지 전해지며 공자의 말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며 공자를 지성(至聖)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사기>>의 유가사상이 반대로 사기가 황노사상임을 보여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사기>>에 비록 유가에 대해 여러 지면을 활용해 서술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모두 유가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유림열전>이란 사마천 당대의 유가에 대한 열전인데, 사마천은 여기서 동중서를 비롯한 공손홍과 같은 유학자를 비판하였다. <공자세가>에서도 노자와 공자의 만남 장면에서 노자의 입을 빌려 공자를 비판한다. <육가요지>와 <태사공자서>에는 유가, 묵가, 도가 등의 내용과 장단점을 서술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 글에는 도가를 유가보다 칭찬하는 경향이 드러나며, <<사기>> 곳곳에서 노자의 말을 인용한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당대의 분위기와 요구에 따라 공자를 세가에 기록하지만, <<사기>> 전체에서 황노사상을 우위에 두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사마천 자신이 스스로를 공자와 비견했고, 후대에 공자와 같은 위치에 설 자신을 위해 <공자세전>을 세가로 격상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사상

사마천 이전의 역사서에 대한 생각은 과거의 일에 대한 선조의 기록이라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과거의 사고에서 벗어나 역사를 관찰하여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역사서술은 단편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중국 역사 전반을 통찰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단순한 사건 기록에서 벗어나 중국의 역사, 문화, 경제, 사회를 모두 다루는 <<사기>>를 만들어 냈다. 사마천은 다양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검증을 통해 공정함을 유지하였다. 상층인물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리지 않고 기록하였다. 당대의 한나라의 왕이었던 한무제의 과실 역시 꾸밈없이 사마천에 의해 기록되었다.
<<사기>>의 역사사상은 크게‘역사변역사상(歷史變易思想)’과‘대일통사상(大一統思想)’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 번째로,‘역사변역사상’이란 천지자연과 인간사회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통관한다’라는‘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이라는 말에서 그의 <<사기>> 편찬 목적을 제시한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연구하여 역사 발전의 법칙을 알아내고자 하였다. 그는 사물은 다양한 요소들의 작용으로 인해 변화하며 발전하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변화를 관통하는 시선을 갖추어야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데, 사마천은 관통하는 방법으로 비판, 융합, 그리고 혁신을 사용하였다. 과거의 것을 현실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현실의 것과 종합적으로 융합시키는 것이다. 이는 혁신을 불러올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은 역사변역에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것의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 사마천은 역대 정권의 흥망성쇠를 연구하고 역사 법칙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물 안에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가 모두 존재하며 어느 것이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물이 변화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개인이나 역대 정권, 더 나아가 역사 전반을 고찰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변증법적 사상을 내포한다. 그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연구하며 역사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지속적이고 순환적이며 발전하는 모습을 띠는 것이다. 또한 사마천은 역사라는 것이 스스로 가진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세’라고 표현하였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방향은 주변의 모든 상황이 어우러져 그 결과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천명사상(天命思想)’과 같이 하늘의 뜻이라 여기는 미신적인 것과 다른 것이다. 그는‘천명사상’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법칙과는 연결 지어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마천은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작용하여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그는 ‘유물주의사상(唯物主義思想)’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사마천의 민족과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에서 그의‘대일통사상’을 확인 할 수 있다. 사마천은 황제(黃帝)를 중화민족의 공동조상으로 설정하여 중국 내에 살고 있는 모든 변방민족들도 하나의 정체성을 갖게 만들고자 하였다. <하본기>를 통해 중국의 최초 왕조 국가가 9주의 강역을 갖고 있었음을 강조하며 주변국가와의 관계도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통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秦)나라와 한(漢)나라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마천의 대일통 사상은 주변 민족에 대한 포용 사상까지 발전하여, <<사기>>에는 주변 국가에 대한 기록까지 찾아볼 수 있다.

인본주의사상

사마천은 하늘의 뜻이라고 치부하는 기존의 천명론에 입각한 사상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인간에게 집중하였다. 그는 역사를 연구하며 인간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였다.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역사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그의 생각은 <<사기>>의 구성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는 기존의 왕조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열전’을 만들었다. 열전에는 귀족부터 학자, 상인, 자객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또한 중국 민족 이 외에도 <흉노열전>, <조선열전>등 주변 민족의 역사까지 서술하고 있다. 사기에 나타난 기전체(紀傳體)는 인간 중심의 서술 형태를 보여준다.
정치와 통치자에 있어서 사마천의 태도는 그의 인본주의적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부분이다. 사마천은 포악한 정치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가하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행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한 국가 멸망의 원인을 폭군의 출현으로 그 이유를 밝히며 민중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다. 그가 생각하는 올바른 통치자는 항상 민중을 생각하여 백성들의 행복하고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경제사상

사마천의 경제사상은 <<사기>>의 <화식열전>과 <평준서>에서 드러난다. <화기열전>과 <평준서>에는 각각 한나라 초기와 무제 시기의 경제 상황을 대조시키는데 이를 통해서 사마천의 경제사상을 알아볼 수 있다. 특히 <화식열전>은 30명의 상인들의 전기로 그들을 긍정하고 부의 축적을 장려한다.
사마천은 두 편의 책을 통해서 세리(勢利)를 숭상하였다. 그는 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으로 바라보았고 인간의 행위가 부로부터 영향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화식열전>을 보면 부는 인간의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모두들 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되어있다. 인의와 예절 등 유가에서 주장하는 것은 부가 뒷받침되면 나오는 것이다. <<사기>>는 부를 통해 권력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앞선 역사의 상인 출신들이 권세를 얻는 장면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사기>>에 나온 대표적 인물로는 오씨현의 나(倮) 씨와, 파의 청(淸)이라는 과부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미천한 출신이지만 그들의 부로 인하여 진나라의 시황제에게 제후의 대우를 받았다. 또한 사마천은 공자도 재력이 충분하였던 제자 자로(子路)가 있었기에 그의 덕을 설파한 것이라고 바라보았다. 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수단에 대해서 사마천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지녔다. 농업을 통한 부의 획득을 가장 최상의 것으로 보았고, 장사로 득을 보는 것이 두 번째이며, 간악한 수단으로 부를 얻는 것은 최하책이다.
또한 경제의 발전은 농업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 있어서의 고른 발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가 나서서 어느 한쪽으로 유도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 전역을 경제 구역으로 나눈 뒤 그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밖으로부터 얻어야 되는 것을 파악했다. 여기에는 각 지역의 환경과 주민들의 특성까지 고려되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물품의 유통을 맡는 상인들을 그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상인들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사마천은 유통에 관한 의견을 피력한다. 유통에서는 물건을 언제 사고 팔아야 하는지 그 시기가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물품의 특성을 파악하여야 한다. 자금은 끊임없이 유통하여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사기>>에는 유통경제 외에도 소봉(素封)을 예로 들면서 재산을 통한 이익 창출 모습도 보여준다. 그는 그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부를 축적한다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경제생활 모습으로 소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마천의 경제사상은 많은 유학자들에게 비판받았다. 유가에서의 경제 관념과 크게 위배되기 때문이다. 유가에서는 상업을 억제하고 중농주의 정책을 펼쳐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한다. 그들에게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은 부도덕한 것이며 불경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들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획득되어지는 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진보적인 경제사상을 보여주며 당시 유가의 위선적인 도덕관을 비판하고 경제논리에 있어서 유가의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사기의 가치

호견법의 첫 등장

<<사기>>는 단순히 인물을 기록만한 것이 아니다. 그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듯 포만감 있게 형상을 묘사하였다. 세목의 묘사를 통하여 주제도 드러내고 그 인물을 완벽하게 재현해내었다. 사기 속 인물이 이렇게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생동감 있게 표현된 것은 바로‘호견법(互見法)’때문이다. 즉, 사기 전체를 읽지 않는다면 그 인물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마천이 처음으로 제시한 호견법이 등장한 이후 모든 책은 호견법을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호견법은 중국 역사서의 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마천의 언어예술

사마천은 바로 사학의 대가이자 문학계의 거장이었다. 인물 표현에 있어 생생하고 풍부한 언어 구사력뿐만 아니라 서술 사이에 사마천 자신의 의견을 치밀하게 끼워 넣거나, 속담을 적절히 인용하였다. 문장을 이루는 언어가 적절하고 정확하여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다. 사기에서 서술 언어의 두드러진 특징은 정련됨과 생동감, 정확함, 풍부함인데, 전쟁 장면의 묘사에서는 정련된 언어가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인물의 성격 및 특징을 서술할 때는 선명한 언어로 서술하여 인물의 형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다.
<<사기>>에서는 특히 경전, 가요와 속담 등을 인용한 부분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작품의 문채를 증가시키고 표현력을 더욱더 높이었다. 사마천이 모은 자료는 오랜 세월 동안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것들을 모두 쉽게 이해되도록 직접 번역하여 운용하였다. (夏), (商), (周) 시대의 역사적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고대문서인<<상서>>는 그 당시의 문자체로 쓰여 있지만 사기에는 비교적 이해 가능한 문자로 해설 및 번역이 되어있다. 사마천은 적절한 편집과 번역을 통하여 문장과 인용문을 하나의 어우러진 문체로 융합하여 사기를 위대한 고적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중화민족문화를 펼쳐내다

<<사기>>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학의 범주를 뛰어넘는 중화민족문화의 백과전서라고 할 수 있다. <<사기>>는 상고 시대로부터 <<사기>> 이전 단계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사관문화 정신을 수용하였다. <<사기>>는 기존의 사관문화 전통을 결산하면서 단순한 중복이나 모방이 아닌 당대의 현실적 요구에 근거해서 사관문화 전통을 취사선택하였다. 민족문화의 발생기는 상고 삼대이고, 민족문화의 창조기는 전국시대이며, 전국후기부터 진한 교체기까지는 과거의 문화성과를 취사선택하여 정형화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과거 몇 천년의 사관문화에 대한 종합을 시도하였고, 이로써 기존 문화학술에 대한 체계적이고 대대적인 정합을 이루어냈다. 민족문화의 정형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기>>는 중화민족문화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역사의 공백을 메우다

진시황(始皇帝)은 분서갱유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법가(法家)와 농가(農家) 외의 책은 불태워졌고 유학자들은 생매장 되었다. 고대사 최대의 사상 탄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기>>가 쓰인 덕분에 유실되고 소실되었던 수많은 기록과 사상에 대한 실마리가 보존되었다. 잃어버린 고대사의 연결고리를 찾아준 것이 바로 <<사기>>인 것이다.

사기가 끼친 영향

문학의 발전

<<사기>>가 후세의 문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는 특히 소설과 산문 방면에서 잘 드러난다. 사마천은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전형적인 인물’을 발견한 사람이다. 사기에는 인물의 형상이 빚어지면서 동시에 성격에 대한 표현, 성공적인 세목에 대한 묘사 등에 모두 전형성을 잘 갖추고 있다. 또한 마치 그려낸 듯한 생생한 장면과, 생동감이 넘치는 언어, 인물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수법 등은 그 당시 어느 문학작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唐)의 수많은 전기 작가들의 작품은 물론 후대 소설가의 창작 계발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당나라 한유((韓愈))와 송나라 구양수(歐陽脩) 등 산문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도 모두 <<사기>>를 가치로 삼은 사람들이다. 서사(叙事)에 있어 웅건함과 전아함은 <<사기>>를 따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기>>의 문채(文彩)는 중국문학발전사에서 전대를 계승하고 후대를 열어주는 작용을 하였다.

역사학의 발전

사마천은 중국 3000년 역사를 한 편에 집중시켜 역사학의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사마천의 <<사기>>는 <<춘추>>를 계승하여 지은 것이다. 하지만 <<사기>>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그 내용의 광범위성과 복잡성, 조직의 계통성과 완전성은 <<춘추>>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춘추>>는 각국의 역사적 사실을 섭렵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사 중심이다. <<사기>>의 식견은 탁월하고 포괄한 것이 넓어서 이후의 2000년 동안 정사의 모범이 되어 이 법도를 준수하게 하였다. 이것을 따라 황제시대에서 시작하여 청말에 이르기까지 중화민족의 전사(全史)를 이루게 한 것이다. 위대한 역사학자 사마천은 <<사기>>라는 이 휘황찬란을 대작으로써 옛 역사라는 기초 위에 새로운 비약을 가져왔다.

문화의 발전

중국문화를 연구할 때 고사성어만큼 풍부한 소재를 제공해주는 것은 없다. <<사기>>에는 3000년의 시간과 그 시간 속 주인공들이 빚어낸 지혜와 통찰력의 성어, 명언 등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다. 최소 100여 개의 성어가 중국의 문화의 보고를 극도로 풍부하게 하여 중국의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 참고 중국 역사 고사성어 사전

참고자료

김영수, <<난세에 답하다-사마천의 인간탐구>>, 알마, 2008, ISBN 978-89-92525-41-1
천퉁성, <<사기의 탄생 그 3천년의 역사>>, 장성철 역, 청계, 2004, ISBN 978-89-88473-61-0
양치엔쿤, <<사마천과 사기>>, 장세후 역, 연암서가, 2015, ISBN 978-89-94054-76-6 03990
사마천, <<사마천의 사기3>>, 이주훈, 유소림 역, 사사연, 2007 ISBN 978-89-85153-80-5
김영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창해, 2006 ISBN 89-7919-738-1 04910
김춘희·김선희, <『사기(史記)』와 사마천(司馬遷)의 평가(評價),사상(思想)에 대한 일고(一攷)>, 한국한문고전학회(구 성신한문학회), <한문고전연구> 17권0호, 2008, 225-250p.g.
방호범, <사마천(司馬遷)의 역사인식(歷史認識)과 철학사상(哲學思想)>, 人文論叢 23권0호, 2009, 55-79p.g.

주석

  1. 사마천, 이주훈·유소림, <<사마천의 사기3>>, 사사연, 2007, 5p.g.
  2. 김영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창해, 2006, 453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