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
왕소군 王昭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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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왕장 王嬙 |
출생 |
약 BC 52년 |
국적 | 한나라 |
별칭 |
낙안 落雁 |
직업 | 흉노 왕비 |
배우자 |
호한야 선우→조도막고 선우[1] |
목차
개요
한나라 원제 때의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중국 4대 미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원제의 궁녀로 있다가 후에 흉노의 선우 였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 처가 된다.
이름은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이며, 훗날 태조 문황제인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불리기도 했다.
생애[2]
한 원제는 모연수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모집한다. 왕소군이 궁녀로 발탁되었으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내내 냉궁에 있다가 우연히 원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하라고 명한다. 모연수가 흉노에 투항하여 왕소군의 미인도를 선우에게 바치자 선우는 왕소군을 요구하며 화친을 제안한다. 원제는 전쟁을 불사하지만 신하들이 화친을 주장하여, 결국 왕소군은 흉노 땅에 보내진다. 원제와 이별한 왕소군은 원제를 위해 술을 뿌리고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호한야선우는 충절에 감동하여 장례를 치를 후 모연수를 한나라로 보내고, 원제가 끝내 그를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러한 왕소군의 생애는 대중적인 이야기일 뿐 사실과 거리가 있는데 이는 왕소군에 대한 역사와 왕소군에 대한 리텔링을 통해 알 수 있다.
낙안(落雁)
"浸魚落雁,閉月羞花"
침어낙안(浸魚落雁)은 폐월수화(閉月羞花)의 대구로 쓰는 고사성어이다.
침어는 서시를 지칭하는 말이며, 낙안은 왕소군을 지칭하는 말이다. 침어낙안의 의미는 미인을 보면 "물고기가 헤엄칠 생각을 잊고 가라앉아 버리고,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고 가라앉았다."라는 뜻이며, 그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3]
유적
청총(靑塚)
내몽고의 호화호특(呼和浩特)에 왕소군의 무덤과 조각상이 있다. 겨울이 되면 북방의 초목들이 시들지만, 왕소군의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유지한다고 해서 청총이라고 불린다.[4]
두보(杜甫)가 후일 "푸른 묘만 홀로 남아 황혼을 바라고 있네"(獨留靑塚向黃昏)라는 시구를 남겼다.
관련 작품
역사서에서의 왕소군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에서 ‘한서’라고 할 수 있다.
경녕(竟寧) 1년(33년) 선우는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물품]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비단,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하사하였다. 선우가 매우 기뻐하였다. (한서-「흉노전」)
앞서 말했듯이 정말 간결하다. 텍스트의 주체는 원제, 선우 두 명으로 왕소군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물론, 왕소군 그녀가 흉노로 감으로써 한과 흉노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이것은 그녀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뒤의 -『후한서』는 그 양상이 상이하다.
왕소군은 자가 장으로 남군사람이다 이전 원제의 치세(BC 43-33)에 양가자로 선발되어 액정으로 들여졌다 당시 호한야선우가 내조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궁녀 다섯 명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황제를 보지 못하여 슬픔과 원망에 싸여 이에 액정령(직책)에게 흉노로 가고 싶다고 청구하였다. 호한야선우가 큰 연회에 참석하여 연회를 마치고 떠날 즈음 황제는 다섯 여인을 불러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왕소군은 풍려한 외모에다가 단장을 하고, 치장을 하니 한궁에서도 빛나게 돋보였고 그녀가 뒤돌아볼 때는 옷이 치렁치렁하게 돌아가는 광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움직일 정도였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서크게 놀라서 속으로는 그녀를 궁중에 남겨두고 싶었으나 신뢰를 잃을까 걱정하여 마침내 그녀를 흉노에게 주었다. (後漢書-「南匈奴列傳」)
반면, 『후한서』에는 왕소군이 주체가 되며, 그녀의 의지로 흉노에 간 것으로 제시된다. 이는 ‘양가자(良家子,’라는 어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양가자’는 ‘청빈한 농민 집안의 자제’라는 뜻으로 왕소군이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역사서인 『후한서』는 평민이라는 지위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여성의 지위는 높아졌으나, 아직도 왕소군이라는 여성이 한과 흉노 사이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여성학적으로 높게 평가될 변화는 아니다. 그리고 따라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서』, 『후한서』 와 같은 문학 작품이 아닌 역사서들이 그 내용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한서』가 후한 시대에 쓰였고, 『후한서』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송(宋)에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혹은 사(史)관의 개인적 의견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라 볼 수 있는 『한서』와 왕소군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다른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소군에 대한 리텔링
다음은 문학작품에서의 ‘리텔링’이다.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
그리고 왕소군이 문학작품으로서 갖는 의의는 왕소군에 대한 문학이 『한서』, 『후한서』의 내용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위에 제시한 왕소군의 생애는 ‘한궁추’가 현재 세상에 알려진 왕소군의 이미지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텍스트이므로 ‘한궁추’에 그 바탕이 있다. 하지만 '한궁추'는 리텔링된 것이고 문학 작품이라는 점에서 허구성이 있다.)
서경잡기에서의 리텔링
왕소군에 대한 초기의 문학은 『서경잡기([西京雜記])』로 추정된다.
왕소군은 16세의 나이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원제 때인 BC38년에 전국의 미녀를 선발하여 후궁으로 보충토록 명을 내렸기 때문에 아마 왕소군도 이 시기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궁녀가 많아 황제는 화공의 그림을 통해 궁녀들의 외모를 평가했다. 하지만 왕소군은 가난한 출신으로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고, 그녀의 얼굴은 못나게 그려져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후에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여 한나라의 미녀를 구해 그 비로 삼겠노라고 요구했고, 원제는 그림(그림을 그린 화공은 모연수라는 설이 있다.)에 의거하여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소군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원제는 그녀의 미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며, 행동거지 또한 한아함을 알게 되었다. 원제는 후회스러웠지만 흉노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터라 다른 궁녀로 바꿀 수 없었다. 이에 그 일을 철저히 따져 화공들 모두 기시(죄인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형벌)에 처하고 화공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재산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그녀가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떨어지고,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호한야 선우의 처로서 살았다고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왕소군에 대한 역사에 제시된 한서, 후한서의 내용과 다른 점은 화공이라는 관료층이 등장하고, 왕소군(평민층)이 보다 주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나라 사회의 계층 간 장벽이 두껍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료층인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평민)은 평민층에게 희열의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유학자인 유흠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직 종이의 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저자인 유흠이 대중성을 위해 『서경잡기([西京雜記])』를 지었다고 추측할 수 없다.
반대로 이는 당시의 지식인·지배층을 위한 문학으로 보이는데, 흉노에 대한 한의 거부 이데올로기라 볼 수 있다.(이민족은 한나라 이전의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부터 거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왕소군이라는 평민 출신의 여성은 흉노에 대한 거부감을 은연중에 내포하기 위해 나약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또한 유교 프레임에 맞게 뇌물을 받은 관료를 ‘악’으로 지정하며, 그에 대한 명군(원제) 의 처벌을 정당화한다.
한궁추에서의 리텔링
“왕소군에 대한 대표적인 인식은『한궁추』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궁추』는 영향력이 있는 문학 작품이다.(위에 제시한 왕소군의 생애도 『한궁추』가 대중적이기에 『한궁추』를 요약하여 제시하였다.)
漢 원제는 毛延寿(모연수)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모집한다. 王昭君이 궁녀로 발탁되었으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내내 냉궁에 있다가 우연히 원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하라고 명한다. 모연수가 흉노에 투항하여 왕소군의 미인도를 선우에게 바치자 선우는 왕소군을 요구하며 화친을 제안한다. 원제는 전쟁을 불사하지만 신하들이 화친을 주장하여, 결국 왕소군은 흉노 땅에 보내진다. 원제와 이별한 왕소군은 黑水(흑수)에서 漢王(한왕)을 위해 술을 뿌리고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呼韩邪單于(호한야선우)는 충절에 감동하여 장례를 치른 후 모연수를 한 나라로 보내고, 원제가 끝내 그를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중략)
선우: 나는 호한야선우요. 어제는 사신을 한나라로 보내어 공주를 내게 시집보내라고 했는데, 한나라 임금은 공주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거절해 와서 내 마음이 얺짢소! 한나라 궁중에는 수많은 궁녀가 있다니, 그 중에서 한 사람쯤 내게 준대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오. 그런데도 사신을 곧장 쫓아 들여보내다니! 군대를 동원하여 남침을 하자니 몇 년 동안의 평화를 잃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 형편 돌아가는 것을 보아 달리 도리를 강구하도록 해야겠소.
모연수: 어제는 성도(成都) 자귀현(秭歸縣)에 가서 한 사람을 뽑았는데, … 외모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서 진실로 천하의 절색이라 할 만합니다. … 나는 그들에게 돈 백 냥만 내놓으면 첫째로 뽑아 올려주겠다고 했는데도, 살림이 가난한데다가 자신의 용모가 출중한 것을 믿고 전혀 말을 듣지 않더군요.
(중략)
원제: 내 이제껏 군사를 길러온 것은 유사시에 쓰기 위함이다! 공연히 조정엔 문무백관이 잔뜩 있단 말이오? 누가 나를 위해 오랑캐 군사를 물리쳐 주겠소? 모두들 칼과 화살이 무서워 이렇게 맥을 못추고 있는 거요? 어찌 명비를 내주고 오랑캐와 화친을 한단 말이오?
(중략)
원제: 명비가 연약하고 착하다 하여 업신여기는 모양인데, 만약 옛날 여태후가 계시던 시절이라면, 누가 감히 한마디 명령인들 거역하였겠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왕소군이 한 번 더 리텔링 되어 내용이 전과 상이하다는 것이다. 우선 『서경잡기』에서 뇌물을 받은 화가인지 아닌지 모호했던 모연수는 뇌물을 받은 악덕 화공의 모습으로 변하고 흉노로 도망가는 비열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고급관료가 아니었던 작가 마치원이 어느 정도 계급·신분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원나라 시대의 한족이었는데, 따라서 그는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왕소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킨다. 또한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세력이 비교적 약했던 흉노를 ‘흉노가 원하는 여인을 한나라에서 취할 정도로’ 강하게 묘사한 것은 흉노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키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원제의 “옛날 여태후가 계시던 시절이라면, 누가 감히 한마디 명령인들 거역하였겠나?”라는 말은 당시에 여태후가 흉노에게 타협적인 정책을 펼친 사실과 모순된다. 이는 흉노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했다고 본다.
현대에 리텔링된 왕소군
'현대에 리텔링된 왕소군'의 대표적인 예로 조우의 『왕소군』을 들 수 있다. 조우의 역사극 ‘왕소군’은 1978년에 발표되었지만, 작품 구상은 주은래 총리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조우에게 임무(리텔링)를 맡겼다. 조우가 고백하길 이 연극은 경애하는 주총리가 생전에 나에게 맡긴 임무였다 그것은 1960년대 이전의 일로, 주총리는 우리에게 대한족주의를 가지지 말고, 함부로 잘난 체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말은 몽고족과 한족간의 혼인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총리는 한족 여성들이 소수민족들에게 시집을 가도록 제창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왕소군을 거론하면서 주총리는 .... 나에게 왕소군 극본 창작을 권유하였다.
이는 모택동의 여섯 가지 표준 중에서 첫 번째 조항인 ‘민족 단결에 유리하고, 민족적 분열을 조장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과 어울린다. 또한 그는 내몽골에 가서 왕소군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몽골 사람들은 왕소군을 온화한 여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무덤에 가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고, 아이를 갖지 못한 부부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미신까지 생긴 것이다. 즉, 그녀는 몽고족 여인들이 좋아하는 한족 여성이었고, 이는 주총리의 소수 민족을 존중하는 사상과 연관되기 충분했다. 즉 당대의 이데올로기 혹은 당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가 '왕소군'에 개입되어 리텔링된 것이다.
정리하면, ‘왕소군’이라는 역사서에 나온 인물은 각 시대마다 그 시대, 혹은 작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변화한 양상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柳江夏, 「틈새를 메우는 문학적 상상력 ‘리텔링’- ‘王昭君 故事’의 리텔링을 例로」, 『중국문학논집』, 중국어문학연구회, 2010.8
서영,『중국역사가 기억하는 비범한 여성들』,책벗,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