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28번째 줄: | 28번째 줄: | ||
<div id="mp_goodArticle" class="mp_contentsbox" style="border:1px solid #a7d7f9; margin: 0.5em 0.5em 0 0; vertical-align:top; padding: 1em; overflow: auto; -moz-border-radius: 0.8em; -webkit-border-radius: 0.8em; border-radius: 0.8em;"> | <div id="mp_goodArticle" class="mp_contentsbox" style="border:1px solid #a7d7f9; margin: 0.5em 0.5em 0 0; vertical-align:top; padding: 1em; overflow: auto; -moz-border-radius: 0.8em; -webkit-border-radius: 0.8em; border-radius: 0.8em;"> | ||
<div class="mp_contentsboxtitle" style="background-color: #bbddff; margin-bottom: 0.7em; padding: 0.2em 0.5em; font-size: 1.2em; line-height: 1.2em; overflow: visible; font-weight: bold; -moz-border-radius: 0.5em; -webkit-border-radius: 0.5em; border-radius: 0.5em;"><div style="float: left; margin: -8px 8px -8px 0px;"></div>[[오늘의 알찬 글]]</div><div id="mp-itn"></div> | <div class="mp_contentsboxtitle" style="background-color: #bbddff; margin-bottom: 0.7em; padding: 0.2em 0.5em; font-size: 1.2em; line-height: 1.2em; overflow: visible; font-weight: bold; -moz-border-radius: 0.5em; -webkit-border-radius: 0.5em; border-radius: 0.5em;"><div style="float: left; margin: -8px 8px -8px 0px;"></div>[[오늘의 알찬 글]]</div><div id="mp-itn"></div> | ||
− | [[파일: | + | [[파일:낭서각석.jpg|100픽셀|왼쪽|링크=각석]] |
− | [[ | + | 진각석(秦刻石)은 [[진시황]]을 위한 공덕시를 새긴 비문(碑文)이다. [[진시황]]은 서기 221년 육국을 통일한 후, 수차례 각지로 순시를 나갔는데 군신들이 그를 칭송하며 그 공덕을 기렸고 그것을 돌에 새겨 후대에 남겼다. 진각석은 모두 일곱개가 있는데 이를 진칠각석(秦七刻石)이라 했다. 진각석은 모두 [[진]]의 [[이사]](李斯)가 육국을 통일한 후 보편적으로 유통한 진의 문자인 전서로 쓰여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전서는 대부분 진각석의 것들이다. 또한 진각석은 후대의 문학작품과 비지문 碑志文에 모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
<br> | <br> | ||
− | '''[[ | + | '''[[각석|자세히 읽기...]]''' |
</div> | </div> | ||
38번째 줄: | 38번째 줄: | ||
<div id="mp_goodArticle" class="mp_contentsbox" style="border:1px solid #a7d7f9; margin: 0.5em 0.5em 0 0; vertical-align:top; padding: 1em; overflow: auto; -moz-border-radius: 0.8em; -webkit-border-radius: 0.8em; border-radius: 0.8em;"> | <div id="mp_goodArticle" class="mp_contentsbox" style="border:1px solid #a7d7f9; margin: 0.5em 0.5em 0 0; vertical-align:top; padding: 1em; overflow: auto; -moz-border-radius: 0.8em; -webkit-border-radius: 0.8em; border-radius: 0.8em;"> | ||
<div class="mp_contentsboxtitle" style="background-color: #bbddff; margin-bottom: 0.7em; padding: 0.2em 0.5em; font-size: 1.2em; line-height: 1.2em; overflow: visible; font-weight: bold; -moz-border-radius: 0.5em; -webkit-border-radius: 0.5em; border-radius: 0.5em;"><div style="float: left; margin: -8px 8px -8px 0px;"></div>[[한자어원문화사전|오늘의 한자]]</div><div id="mp-itn"></div> | <div class="mp_contentsboxtitle" style="background-color: #bbddff; margin-bottom: 0.7em; padding: 0.2em 0.5em; font-size: 1.2em; line-height: 1.2em; overflow: visible; font-weight: bold; -moz-border-radius: 0.5em; -webkit-border-radius: 0.5em; border-radius: 0.5em;"><div style="float: left; margin: -8px 8px -8px 0px;"></div>[[한자어원문화사전|오늘의 한자]]</div><div id="mp-itn"></div> | ||
− | [[파일: | + | [[파일:가운데 중.png|400픽셀|왼쪽|링크=中]] |
− | + | 고대 중국에서 깃발은 '유(斿)'로 알려진 여러 개의 띠로 구성되었다. 띠가 많은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었는데, 왕의 깃발은 무려 12개나 되는 띠로 구성되었다. 갑골문과 금문에 나타난 ‘중(中)’자는 여러 띠를 지닌 깃발처럼 보이고, 한 개의 나무 조각이 장대의 중간에 묶여져서 장대를 튼튼하게 했는데 이 나무 조각을 ‘중(中)’이라고 했다. 장대 가운데 위치하여 상유와 하유를 가운데서 분리하여, ‘중(中)’은 ‘가운데’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다시 ‘안에’,‘속에’라는 뜻으로도 파생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의 처세의 태도 가운데, 어느 극단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한다. 중행(中行), 중용(中庸) 등이 그 예이다. | |
− | '''[[ | + | <br /> |
+ | |||
+ | '''[[中|자세히 읽기...]]''' | ||
</div> | </div> | ||
2017년 2월 27일 (월) 15:24 판
서울시립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 위키백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중국언어문화 전문 위키백과로서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고 편집할 수 있습니다. |
진각석(秦刻石)은 진시황을 위한 공덕시를 새긴 비문(碑文)이다. 진시황은 서기 221년 육국을 통일한 후, 수차례 각지로 순시를 나갔는데 군신들이 그를 칭송하며 그 공덕을 기렸고 그것을 돌에 새겨 후대에 남겼다. 진각석은 모두 일곱개가 있는데 이를 진칠각석(秦七刻石)이라 했다. 진각석은 모두 진의 이사(李斯)가 육국을 통일한 후 보편적으로 유통한 진의 문자인 전서로 쓰여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전서는 대부분 진각석의 것들이다. 또한 진각석은 후대의 문학작품과 비지문 碑志文에 모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자세히 읽기...
고대 중국에서 깃발은 '유(斿)'로 알려진 여러 개의 띠로 구성되었다. 띠가 많은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었는데, 왕의 깃발은 무려 12개나 되는 띠로 구성되었다. 갑골문과 금문에 나타난 ‘중(中)’자는 여러 띠를 지닌 깃발처럼 보이고, 한 개의 나무 조각이 장대의 중간에 묶여져서 장대를 튼튼하게 했는데 이 나무 조각을 ‘중(中)’이라고 했다. 장대 가운데 위치하여 상유와 하유를 가운데서 분리하여, ‘중(中)’은 ‘가운데’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다시 ‘안에’,‘속에’라는 뜻으로도 파생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의 처세의 태도 가운데, 어느 극단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한다. 중행(中行), 중용(中庸) 등이 그 예이다.
노신은 그의 문학세계가 갖는 시대적 특성과 동시대인에게서 볼 수 없는 예술적 독창성으로 인해 그의 일생 어느 시기를 떼어놓고 보아도 그 문학적 의미가 각별하고 풍부하다. 시, 소설, 잡문, 평론, 서한, 일기, 번역 등 노신이 남긴 문자업적 가운데서 《야초野草》는 산문시라는 장르적 특성과 그 안에서 운용하고 있는 문체의 다양성, 그 다양성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시대정신과 결합한 작가의식의 불변성,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그것과 표현해내고 있는 모던한 예술기법과의 탁월한 통일로 노신문학의 집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야초》는 노신정신사에서 가장 큰 폭의 방황과 시련을 겪은 시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왕성한 창작을 한 시기이기도 한 1924년에서 1926년 사이에 저술되었다. 《야초》는 세상에 나오면서 세인들의 관심과 평가를 계속하여 받아왔는데 이에 대한 연구의 역사와 그 성격을 살피는 일은 노신연구의 역사와 그 성격의 변화를 살피는 일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자세히 읽기...
1893년 12월 26일 호남성의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368일간의 대장정을 겪고 그 이후 중국 공산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건국 이후 초기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중국 나름의 토지개혁 등을 시행하였고, 1953년부터는 아예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추수하여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1956~1958년 무렵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를 두고 벌어진 노선 대립 및 당시의 국제적 관계 상의 이유(중소 분쟁)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약 3년간은 소련식 모델이 아니라 중국 독자적으로 대약진운동을 일으켰고, 1966년 문화대혁명의 촉발 시기에는 대중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열기를 부추기고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다.
자세히 읽기...
한자어원문화사전은 중국어문화학과 3학년 문화로읽는중국문자 수업을 통해 만들어진 한자의 어원과 문화에 대한 종합사전이다.
중국의 역사는 중국어문화학과 중국문화사1과 중국문화사2 수업을 통해 만들어진 중국의 역사 관련 종합 지식백과사전이다.
위키가 처음이신가요? 우리 중국어문화학과 위키백과는 위키피디아에서 제공하는 위키엔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위키피디아의 사용법과 거의 유사합니다.
위키백과에 참여하고 싶지만 사용법에 대해 잘 모르겠다면 우선 한국 위키피디아에서 제공하는 위키피디아 길라잡이에 들어가 보세요. 위키의 기본적인 개념에서부터 사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위키백과 길라잡이:위키피디아에서 제공하는 위키백과 편집 가이드
위키 문법 배우기: 위키 초보자를 위한 자세한 위키문법 안내
위키 틀 목록: 위키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틀 목록 및 사용법
2017년 1학기 수업자료실
2016년 2학기 수업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