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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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위제국의 형성 == | == 북위제국의 형성 == | ||
− | + | ===선비 탁발부의 건국 === | |
− | === | + | [[선비족]] 가운데 [[모용부]]가 일찍부터 중국문명을 받아들여 동방의 요하 유역에 연국을 형성하고 나아가 화북 중원으로까지 진출한 데 비해, [[탁발부]](拓跋部)의 국가형성 및 중국문명과의 접촉은 그보다 훨씬 늦다. 그들은 고지인 대흥안령 동쪽 기슭의 시라무렌 유역에서 다년간에 걸친 민족이동 후 장성지대로 나왔다. 그리고 3세기 중엽 역미(力微)라고 하는 추장(酋長) 아래 탁발부를 중핵으로 하는 부족엽합국가가 형성되어 성락(내몽고 자치구의 부근)에 본거지를 정했다. 그는 북위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었으나 이 국가는 아직 취약한 상태여서 그의 사후, 부족연합은 붕괴되었다. |
− | 선비족 가운데 [[모용부]]가 일찍부터 중국문명을 받아들여 동방의 요하 유역에 | ||
<br>그 후 4세기 초 역미의 손자인 의로(猗盧)가 또 다시 여러 부족을 통합하였다. 그는 중원의 대혼란 속에서 산서성 중부에 고립된 진(晉)의 지방장관 유곤을 원조하여 그 공으로 대왕(代王)의 작위를 받고, 산서성의 구주산 이북지역에 대한 관할을 인정받았다. 이것은 탁발국가가 화북으로 진출한 일보로, 이 대국(代國)에는 이미 일부 한인 지식인들도 참여하여 왕권강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부족장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국가는 와해되었다. | <br>그 후 4세기 초 역미의 손자인 의로(猗盧)가 또 다시 여러 부족을 통합하였다. 그는 중원의 대혼란 속에서 산서성 중부에 고립된 진(晉)의 지방장관 유곤을 원조하여 그 공으로 대왕(代王)의 작위를 받고, 산서성의 구주산 이북지역에 대한 관할을 인정받았다. 이것은 탁발국가가 화북으로 진출한 일보로, 이 대국(代國)에는 이미 일부 한인 지식인들도 참여하여 왕권강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부족장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국가는 와해되었다. | ||
− | <br>와해된 탁발부의 여러 부족은 대부분 화북을 제패한 [[후조]]에 복속되었다. 그런데 수도 업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십익건이 338년 형이 죽은 후 귀국을 허락받아 대왕(代王)의 지위를 이으면서 탁발국가의 새로운 형성이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업에 머물면서 중국문명의 영향을 받은 십익건은 한인을 이용하여 중국식으로 관료제도와 법률을 정비하고, 한편으로는 부족장들의 자제를 | + | <br>와해된 탁발부의 여러 부족은 대부분 화북을 제패한 [[후조]]에 복속되었다. 그런데 수도 업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십익건이 338년 형이 죽은 후 귀국을 허락받아 대왕(代王)의 지위를 이으면서 탁발국가의 새로운 형성이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업에 머물면서 중국문명의 영향을 받은 십익건은 한인을 이용하여 중국식으로 관료제도와 법률을 정비하고, 한편으로는 부족장들의 자제를 시종직에 임명하여 여러 부족세력을 왕권과 연결시키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이처럼 애써 만들어 놓은 국가도 화북을 통일한 [[전진]] 황제 부견의 공격으로 376년에 무참하게 무너졌다. 십익건이 혼란 속에 죽음을 맞은 후, 부견은 그 나라를 하동과 하서 두 부분으로 분할하였다. |
<br>십익건의 손자인 탁발규는 이 어려운 시기에 하동부를 주재한 인척 유고인 및 그 부족인 흉노족 독고부의 두터운 보호를 받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윽고 383년 [[비수의 패전]]으로 시작된 전진국의 해체라는 큰 물결이 독고부와 하란부 등 탁발규를 둘러싼 여러 부족간에 다소의 혼란을 야기하였으나, 386년 그는 여러 부족의 추대를 받아 대왕(代王)에 올랐다. 그 해에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고 대왕(代王)을 위왕(魏王)이라고 개칭하여 위(魏)왕국을 성립시켰다. 이를 3세기 초 한제국이 붕괴된 후 조조가 세운 삼국시대의 위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위(後魏) 또는 북위(北魏)라고 부른다. | <br>십익건의 손자인 탁발규는 이 어려운 시기에 하동부를 주재한 인척 유고인 및 그 부족인 흉노족 독고부의 두터운 보호를 받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윽고 383년 [[비수의 패전]]으로 시작된 전진국의 해체라는 큰 물결이 독고부와 하란부 등 탁발규를 둘러싼 여러 부족간에 다소의 혼란을 야기하였으나, 386년 그는 여러 부족의 추대를 받아 대왕(代王)에 올랐다. 그 해에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고 대왕(代王)을 위왕(魏王)이라고 개칭하여 위(魏)왕국을 성립시켰다. 이를 3세기 초 한제국이 붕괴된 후 조조가 세운 삼국시대의 위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위(後魏) 또는 북위(北魏)라고 부른다. | ||
<br>이후 탁발규는 여러 종족과 흉노계 부족을 평정하여 국력을 충실히 다지고 중원진출의 기회를 노렸다. 396년 [[후연]]의 [[모용수]]가 죽고 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북위의 40만 대군이 일제히 중원으로 밀어닥쳐 다음 해인 397년 북위가 황하 이북의 화북평원을 대부분 정복하였다. | <br>이후 탁발규는 여러 종족과 흉노계 부족을 평정하여 국력을 충실히 다지고 중원진출의 기회를 노렸다. 396년 [[후연]]의 [[모용수]]가 죽고 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북위의 40만 대군이 일제히 중원으로 밀어닥쳐 다음 해인 397년 북위가 황하 이북의 화북평원을 대부분 정복하였다. | ||
− | <br>탁발규는 수도를 평성(平城: 산서성 대동시)으로 옮기고 황궁을 조영하여 황제에 올랐다. 이 탁발규가 도무제(道武帝)라고 불리는 북위의 초대 황제이고, 이렇게 하여 북위제국은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 + | <br>탁발규는 수도를 평성(平城: 산서성 대동시)으로 옮기고 황궁을 조영하여 황제에 올랐다. 이 탁발규가 도무제(道武帝)라고 불리는 북위의 초대 황제이고, 이렇게 하여 북위제국은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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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북위의 화북통일 === |
다음 5세기 백 년 간은 4세기가 끝날 무렵 성립한 북위제국이 잔존한 군소 제국을 평정하여 화북 전역을 통일하고, 강남의 송.제 왕조와 대치하면서 서쪽으로는 멀리 서역지방에까지 진출하는 시대였다. 또한 호족과 한족을 통합한 보편적인 국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전진의 황제 부견처럼 성급한 방법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보다 착실하게 나아간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북위제국의 화북통일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 다음 5세기 백 년 간은 4세기가 끝날 무렵 성립한 북위제국이 잔존한 군소 제국을 평정하여 화북 전역을 통일하고, 강남의 송.제 왕조와 대치하면서 서쪽으로는 멀리 서역지방에까지 진출하는 시대였다. 또한 호족과 한족을 통합한 보편적인 국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전진의 황제 부견처럼 성급한 방법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보다 착실하게 나아간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북위제국의 화북통일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 ||
<br>409년 도무제가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하자 국내는 일시 동요했으나 북위제국의 창업 공신들은 후사로 지정되어 있던 여덟 살 난 탁발사(拓跋嗣)를 옹립하고 그를 보좌하여 위기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이 어린 황제가 명원제(明元帝:재위 409~423)이다. 그는 성장한 후 유능한 한인 관료 [[최호]](崔浩)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시 장성 밖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연]]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수도 주변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충실히 하는 데 노력했다. | <br>409년 도무제가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하자 국내는 일시 동요했으나 북위제국의 창업 공신들은 후사로 지정되어 있던 여덟 살 난 탁발사(拓跋嗣)를 옹립하고 그를 보좌하여 위기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이 어린 황제가 명원제(明元帝:재위 409~423)이다. 그는 성장한 후 유능한 한인 관료 [[최호]](崔浩)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시 장성 밖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연]]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수도 주변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충실히 하는 데 노력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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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그런데 도무제 이래 3대에 걸쳐 이렇듯 착실하고 순조롭게, 게다가 급속히 발전을 이룬 북위제국의 모습은 앞서 살펴보았던 5호 제국과 비교해 볼 때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의 여러 나라에서는 대부분 제국을 창건한 군주가 사망하고 나면 군대를 소유한 종실간에 다툼이 일어나 그 나라가 와해되거나, 아니면 방계의 유능한 종실이 실력으로 군주가 되든가 둘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도무제 사후, 겨우 여덟 살 난 유약한 후계자가 옹립되어 북위제국의 와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경우라고 할 것이다. | <br>그런데 도무제 이래 3대에 걸쳐 이렇듯 착실하고 순조롭게, 게다가 급속히 발전을 이룬 북위제국의 모습은 앞서 살펴보았던 5호 제국과 비교해 볼 때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의 여러 나라에서는 대부분 제국을 창건한 군주가 사망하고 나면 군대를 소유한 종실간에 다툼이 일어나 그 나라가 와해되거나, 아니면 방계의 유능한 종실이 실력으로 군주가 되든가 둘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도무제 사후, 겨우 여덟 살 난 유약한 후계자가 옹립되어 북위제국의 와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경우라고 할 것이다. | ||
<br>이와 같은 북위제국의 안정, 요컨대 황제권의 확립은 도무제가 후연을 중원에서 몰아내고 제국을 창건한 398년 무렵 휘하의 여러 부락을 해산시킨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 때까지 부락을 통솔하고 있던 '대인(大人)'은 부락에서 분리되어 통솔권을 빼앗기고 여러 부락은 일정한 지구에 정주하여 유목민족적인 이동을 금지당했다. 그리고 부락민은 국가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 <br>이와 같은 북위제국의 안정, 요컨대 황제권의 확립은 도무제가 후연을 중원에서 몰아내고 제국을 창건한 398년 무렵 휘하의 여러 부락을 해산시킨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 때까지 부락을 통솔하고 있던 '대인(大人)'은 부락에서 분리되어 통솔권을 빼앗기고 여러 부락은 일정한 지구에 정주하여 유목민족적인 이동을 금지당했다. 그리고 부락민은 국가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 ||
− | <br>그러나 해산된 옛 부락민, 즉 북족(北族)이 곧 한인과 똑같이 동일한 입장에 놓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수도 평성의 기회에 설정된 | + | <br>그러나 해산된 옛 부락민, 즉 북족(北族)이 곧 한인과 똑같이 동일한 입장에 놓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수도 평성의 기회에 설정된 8국(八國) 또는 8부(八部)라 불리는 특별 행정구역에 정주하였는데, 그 곳에서는 농경이 장려됨과 동시에 일반 주군(州郡)의 민과는 다른 기준으로 군수품이 징발되었다. 또 거기에는 일반 주군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9품 중정법]]과 비슷한 임관제도가 행하여졌는데, 옛 대인 일족에 대해서는 부락해산의 타격을 경감해 주기 위한 특별 우대조치가 취해졌다. 이 같은 특별 행정구역은 그 후 점차 축소되어 이윽고 태무제의 치세 동안에 결국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부락해산이라는 단호한 조치가 종실간의 다툼으로 와해된 5호 여러 나라의 선례를 피하고, 북위제국의 지속을 가능케 한 최대의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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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북위의 균전제 시행 === |
북위 태화 9년(485) 10월, 북위는 균전제를 실시했다. [[균전제]]의 원칙은 성년 남자인 정(丁)의 수를 계산하여 경작지인 전(田)을 부여하는 것이다. 균전제는 이후 여러 규정을 거쳐 몇 가지 변형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북조에서 수, 당으로 계승되었다. 단지 북위의 균전법에서 특징적인 것은 전지가 노비와 일소(耕牛)에까지 지급되었다는 점인데, 그것이 노비와 일소의 소유자에게 돌아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 북위 태화 9년(485) 10월, 북위는 균전제를 실시했다. [[균전제]]의 원칙은 성년 남자인 정(丁)의 수를 계산하여 경작지인 전(田)을 부여하는 것이다. 균전제는 이후 여러 규정을 거쳐 몇 가지 변형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북조에서 수, 당으로 계승되었다. 단지 북위의 균전법에서 특징적인 것은 전지가 노비와 일소(耕牛)에까지 지급되었다는 점인데, 그것이 노비와 일소의 소유자에게 돌아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 ||
<br>이는 당시 큰 세력을 갖고 [[삼장제]] 시행에 저항한 '종주', 즉 대토지소유자와의 타협의 산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삼장제와 균전법의 시행은 그 같은 대토지소유의 진행과 그로써 생겨난 소농민의 무산화(無産化)를 시정하고, 개개 농가가 자립할 수 있을 만큼 농지를 각각 확보하게 하여 자작농을 육성함으로써 농업생산을 증진시켜, 이를 기초로 각가재정의 충실을 노렸던 것이다. | <br>이는 당시 큰 세력을 갖고 [[삼장제]] 시행에 저항한 '종주', 즉 대토지소유자와의 타협의 산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삼장제와 균전법의 시행은 그 같은 대토지소유의 진행과 그로써 생겨난 소농민의 무산화(無産化)를 시정하고, 개개 농가가 자립할 수 있을 만큼 농지를 각각 확보하게 하여 자작농을 육성함으로써 농업생산을 증진시켜, 이를 기초로 각가재정의 충실을 노렸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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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위 효문제의 개혁 === |
위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한 후 적극적으로 한화를 주장하고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실시함에 따라 한화는 가속화됐다. 태화 18년(494), 효문제는 중서령 고려에게 고악을 정리하도록 했다. 19년 4월, 효문제는 노성(지금의 산동 곡부)으로 가 친히 공자에게 제를 올리고 얼마 후 [[관제개혁]]을 단행했다. 위나라 초기 선비족과 한의 관호(官號)가 함께 쓰이며 혼란된 양상을 보이자 효문제는 천도 후 왕소를 기용하여 관제를 개정하고 위진남조의 제도를 따랐다. 5월 효문제는 호복(胡服) 착용을 금지시켰고 조정에서는 북족 언어를 쓰지 말고 중국어를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 "30세 이상의 사람은 습관이 되어 갑자기 고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세 이하로 현재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는 지금까지처럼 호어(胡語)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만약 고의로 사용하면 관위를 강등시키겠다."고 하였다. 태호 20년(496), 정월 효문제는 또 성씨를 바꾸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낙양 천도 시 따라온 선비족 사람들은 일률적으로 하남 낙양을 원적으로 삼도록 하고 사후에 북쪽으로 이장할 수 없다고 규정했고 이박에 족(族)의 성(姓)을 정했다. 효문제는 개혁 시 이미 형성되어 있던 한족 지주의 문벌제도를 인정하고 아울러 이것을 선비족 귀족들에게 보급했다. 효문제의 한화 제도 개혁은 일부 보수적 선비족 귀족의 반대에 봉착했다. 태화 20년(496), 태자 탁발순은 평성으로 도주하여 반란을 획책하려 하였으나 효문제에게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같은 해 겨울, 선비족 귀족 목태와 육예는 진북대장군 탁발사예 등과 결탁하여 평성에서 군사정변을 일으켰으나 효문제가 보낸 군대에 진압되어 반란은 평정되었고 이때부터 순조로운 개혁 진행이 보장되었다. | 위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한 후 적극적으로 한화를 주장하고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실시함에 따라 한화는 가속화됐다. 태화 18년(494), 효문제는 중서령 고려에게 고악을 정리하도록 했다. 19년 4월, 효문제는 노성(지금의 산동 곡부)으로 가 친히 공자에게 제를 올리고 얼마 후 [[관제개혁]]을 단행했다. 위나라 초기 선비족과 한의 관호(官號)가 함께 쓰이며 혼란된 양상을 보이자 효문제는 천도 후 왕소를 기용하여 관제를 개정하고 위진남조의 제도를 따랐다. 5월 효문제는 호복(胡服) 착용을 금지시켰고 조정에서는 북족 언어를 쓰지 말고 중국어를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 "30세 이상의 사람은 습관이 되어 갑자기 고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세 이하로 현재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는 지금까지처럼 호어(胡語)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만약 고의로 사용하면 관위를 강등시키겠다."고 하였다. 태호 20년(496), 정월 효문제는 또 성씨를 바꾸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낙양 천도 시 따라온 선비족 사람들은 일률적으로 하남 낙양을 원적으로 삼도록 하고 사후에 북쪽으로 이장할 수 없다고 규정했고 이박에 족(族)의 성(姓)을 정했다. 효문제는 개혁 시 이미 형성되어 있던 한족 지주의 문벌제도를 인정하고 아울러 이것을 선비족 귀족들에게 보급했다. 효문제의 한화 제도 개혁은 일부 보수적 선비족 귀족의 반대에 봉착했다. 태화 20년(496), 태자 탁발순은 평성으로 도주하여 반란을 획책하려 하였으나 효문제에게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같은 해 겨울, 선비족 귀족 목태와 육예는 진북대장군 탁발사예 등과 결탁하여 평성에서 군사정변을 일으켰으나 효문제가 보낸 군대에 진압되어 반란은 평정되었고 이때부터 순조로운 개혁 진행이 보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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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사원 전투 === |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대통 원년 우문태와 고환의 양대 집단은 공개적으로 반목하며 각기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한동안 사방에 전화가 일고 도처에 봉화가 올랐다. 대통 3년(537) 8월, 서위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서위의 우문태는 동위를 토벌하려 출병하여 동위의 곡식 저장 요지인 항농을 공격 및 함락하여 현지에서 군량을 충당했다. 고환은 자기의 양식 창고가 급습당한 것을 보고 대노하여 즉시 대장 고오조에 3만을 이끌고 항농을 겹겹이 포위하도록 했다. 또한 자신은 친히 20만 대군을 이끌고 포진에서 황하를 건너 위세당당하게 장안까지 쳐들어가 우문태와 생사를 건 마지막 승부를 벌이고자 했다. 우문태는 고환의 맹렬한 기세를 보고 그가 전열을 완전히 정비하기 전에 맹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우문태는 부족을 이끌고 고환 군대와 60리 정도 떨어진 사원(지금의 섬서 대려 남쪽 난과 위 사이)의 안영에 도착했다. 우문태와 여러 장군들은 의논을 거쳐 부대를 좌우로 나누어 각각 방진을 치고 장사들은 모두 갈대 숲 속으로 매복하여 위곡에서 적을 기다리다 북소리를 듣고 출격하기로 결정했다. 동위 군대는 병사도 많고 세력도 강하며 군력은 서위 군대의 20배에 달했기에 진격하는 내내 의기양양하여 군심이 교만하고 나태했다. 이에 우문태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고환은 대패하여 그날 밤 내내 황하를 건너 도주했다. 사원 전투로 동진이 입은 손실은 무장 병사 8만, 버린 갑옷과 병기가 18만으로 동진의 참패였다. 우문태는 1대 20의 절대적 열세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수도로 개선했다. |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대통 원년 우문태와 고환의 양대 집단은 공개적으로 반목하며 각기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한동안 사방에 전화가 일고 도처에 봉화가 올랐다. 대통 3년(537) 8월, 서위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서위의 우문태는 동위를 토벌하려 출병하여 동위의 곡식 저장 요지인 항농을 공격 및 함락하여 현지에서 군량을 충당했다. 고환은 자기의 양식 창고가 급습당한 것을 보고 대노하여 즉시 대장 고오조에 3만을 이끌고 항농을 겹겹이 포위하도록 했다. 또한 자신은 친히 20만 대군을 이끌고 포진에서 황하를 건너 위세당당하게 장안까지 쳐들어가 우문태와 생사를 건 마지막 승부를 벌이고자 했다. 우문태는 고환의 맹렬한 기세를 보고 그가 전열을 완전히 정비하기 전에 맹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우문태는 부족을 이끌고 고환 군대와 60리 정도 떨어진 사원(지금의 섬서 대려 남쪽 난과 위 사이)의 안영에 도착했다. 우문태와 여러 장군들은 의논을 거쳐 부대를 좌우로 나누어 각각 방진을 치고 장사들은 모두 갈대 숲 속으로 매복하여 위곡에서 적을 기다리다 북소리를 듣고 출격하기로 결정했다. 동위 군대는 병사도 많고 세력도 강하며 군력은 서위 군대의 20배에 달했기에 진격하는 내내 의기양양하여 군심이 교만하고 나태했다. 이에 우문태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고환은 대패하여 그날 밤 내내 황하를 건너 도주했다. 사원 전투로 동진이 입은 손실은 무장 병사 8만, 버린 갑옷과 병기가 18만으로 동진의 참패였다. 우문태는 1대 20의 절대적 열세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수도로 개선했다. | ||
− | === | + | ===우문태의 부병제 창설 === |
서위 대통 9년(543), 서위 우문태는 정식으로 부병제를 창설했다. 대통 8년(542), 우문태는 육군(六軍)을 처음 설치했는데 대대로 전해지는 주나라 제도에 따라 매 군은 1만 2500명이다. 당시 병사의 공급원은 관롱 호족들의 오족 내의 인척인 친당과 동향 사람이었고 군대의 통솔자는 대소 호족으로 충당했다. 사실상 이는 씨족 혈연관계로 조성된 지방군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부병]](府兵)'이다. 부병은 대통 16년(550)에 이미 대강의 규모를 갖추었다. 부병 자신의 조세와 노역, 징집은 일체 면제였다. 부병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훈련을 받았다. 부병의 말, 소, 양 등의 가축과 군량은 일률적으로 통군의 6개 주국대장군이 총괄하였고 별도로 각 부에 낭장 하나를 두어 징집, 복역, 퇴역 등을 관리하게 하였다. 병사는 호등의 고하, 장년 남자인 정구의 다소, 재력 정도에 따라 선발하고 호적은 군부에 속하며 군현에 속하지 않았다. '사병'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부병의 전투력은 매우 강했다. 이것이 바로 우문태가 창건한 부병제다. | 서위 대통 9년(543), 서위 우문태는 정식으로 부병제를 창설했다. 대통 8년(542), 우문태는 육군(六軍)을 처음 설치했는데 대대로 전해지는 주나라 제도에 따라 매 군은 1만 2500명이다. 당시 병사의 공급원은 관롱 호족들의 오족 내의 인척인 친당과 동향 사람이었고 군대의 통솔자는 대소 호족으로 충당했다. 사실상 이는 씨족 혈연관계로 조성된 지방군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부병]](府兵)'이다. 부병은 대통 16년(550)에 이미 대강의 규모를 갖추었다. 부병 자신의 조세와 노역, 징집은 일체 면제였다. 부병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훈련을 받았다. 부병의 말, 소, 양 등의 가축과 군량은 일률적으로 통군의 6개 주국대장군이 총괄하였고 별도로 각 부에 낭장 하나를 두어 징집, 복역, 퇴역 등을 관리하게 하였다. 병사는 호등의 고하, 장년 남자인 정구의 다소, 재력 정도에 따라 선발하고 호적은 군부에 속하며 군현에 속하지 않았다. '사병'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부병의 전투력은 매우 강했다. 이것이 바로 우문태가 창건한 부병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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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주의 건국 == | == 북주의 건국 == | ||
− | + | 서위(西魏)의 실권가인 우문태(宇文泰)가 죽고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뒤를 이었을 때, 그를 보좌한 우문각의 사촌 우문호가 서위의 공제(恭帝)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이 왕조를 세웠다. 서위(西魏)시대부터 고대의 '주(周)'를 본받았기 때문에 명칭을 북주라 하였는데,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래로 한화(漢化)주의·문벌(文閥)주의를 배척하고 북족존중(北族尊重)주의를 취하였으며, 소박(素朴)주의 정치를 지향하였다. | |
+ | <br>제3대 무제(武帝) 때 북제(北齊)를 평정하여 화북(華北) 통일을 실현하고, 불교를 폐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아들 선제(宣帝)가 폭군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얻지 못하였다. 그 틈을 탄 외척 양견(楊堅)이 정권을 빼앗아 수(隋)를 세웠다. 그러나 관중(關中)에 본거를 둔 수·당의 직접적인 모체(母體)가 서위(西魏) 및 북주였다는 점에서 이들 왕조의 의의는 크다. | ||
== 주나라의 북방 통일 == | == 주나라의 북방 통일 == |
2016년 7월 5일 (화) 17:24 기준 최신판
목차
북위제국의 형성
선비 탁발부의 건국
선비족 가운데 모용부가 일찍부터 중국문명을 받아들여 동방의 요하 유역에 연국을 형성하고 나아가 화북 중원으로까지 진출한 데 비해, 탁발부(拓跋部)의 국가형성 및 중국문명과의 접촉은 그보다 훨씬 늦다. 그들은 고지인 대흥안령 동쪽 기슭의 시라무렌 유역에서 다년간에 걸친 민족이동 후 장성지대로 나왔다. 그리고 3세기 중엽 역미(力微)라고 하는 추장(酋長) 아래 탁발부를 중핵으로 하는 부족엽합국가가 형성되어 성락(내몽고 자치구의 부근)에 본거지를 정했다. 그는 북위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었으나 이 국가는 아직 취약한 상태여서 그의 사후, 부족연합은 붕괴되었다.
그 후 4세기 초 역미의 손자인 의로(猗盧)가 또 다시 여러 부족을 통합하였다. 그는 중원의 대혼란 속에서 산서성 중부에 고립된 진(晉)의 지방장관 유곤을 원조하여 그 공으로 대왕(代王)의 작위를 받고, 산서성의 구주산 이북지역에 대한 관할을 인정받았다. 이것은 탁발국가가 화북으로 진출한 일보로, 이 대국(代國)에는 이미 일부 한인 지식인들도 참여하여 왕권강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부족장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국가는 와해되었다.
와해된 탁발부의 여러 부족은 대부분 화북을 제패한 후조에 복속되었다. 그런데 수도 업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십익건이 338년 형이 죽은 후 귀국을 허락받아 대왕(代王)의 지위를 이으면서 탁발국가의 새로운 형성이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업에 머물면서 중국문명의 영향을 받은 십익건은 한인을 이용하여 중국식으로 관료제도와 법률을 정비하고, 한편으로는 부족장들의 자제를 시종직에 임명하여 여러 부족세력을 왕권과 연결시키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이처럼 애써 만들어 놓은 국가도 화북을 통일한 전진 황제 부견의 공격으로 376년에 무참하게 무너졌다. 십익건이 혼란 속에 죽음을 맞은 후, 부견은 그 나라를 하동과 하서 두 부분으로 분할하였다.
십익건의 손자인 탁발규는 이 어려운 시기에 하동부를 주재한 인척 유고인 및 그 부족인 흉노족 독고부의 두터운 보호를 받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윽고 383년 비수의 패전으로 시작된 전진국의 해체라는 큰 물결이 독고부와 하란부 등 탁발규를 둘러싼 여러 부족간에 다소의 혼란을 야기하였으나, 386년 그는 여러 부족의 추대를 받아 대왕(代王)에 올랐다. 그 해에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고 대왕(代王)을 위왕(魏王)이라고 개칭하여 위(魏)왕국을 성립시켰다. 이를 3세기 초 한제국이 붕괴된 후 조조가 세운 삼국시대의 위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위(後魏) 또는 북위(北魏)라고 부른다.
이후 탁발규는 여러 종족과 흉노계 부족을 평정하여 국력을 충실히 다지고 중원진출의 기회를 노렸다. 396년 후연의 모용수가 죽고 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북위의 40만 대군이 일제히 중원으로 밀어닥쳐 다음 해인 397년 북위가 황하 이북의 화북평원을 대부분 정복하였다.
탁발규는 수도를 평성(平城: 산서성 대동시)으로 옮기고 황궁을 조영하여 황제에 올랐다. 이 탁발규가 도무제(道武帝)라고 불리는 북위의 초대 황제이고, 이렇게 하여 북위제국은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북위의 화북통일
다음 5세기 백 년 간은 4세기가 끝날 무렵 성립한 북위제국이 잔존한 군소 제국을 평정하여 화북 전역을 통일하고, 강남의 송.제 왕조와 대치하면서 서쪽으로는 멀리 서역지방에까지 진출하는 시대였다. 또한 호족과 한족을 통합한 보편적인 국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전진의 황제 부견처럼 성급한 방법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보다 착실하게 나아간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북위제국의 화북통일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409년 도무제가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하자 국내는 일시 동요했으나 북위제국의 창업 공신들은 후사로 지정되어 있던 여덟 살 난 탁발사(拓跋嗣)를 옹립하고 그를 보좌하여 위기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이 어린 황제가 명원제(明元帝:재위 409~423)이다. 그는 성장한 후 유능한 한인 관료 최호(崔浩)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시 장성 밖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연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수도 주변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충실히 하는 데 노력했다.
명원제는 수십 년에 걸쳐 주변 제국의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선제 시대에 급속히 확장시킨 국토를 계속 지켜 나갔다. 말년에는 남조 송의 무제, 즉 유유(劉裕)가 죽었을 때 황하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낙양을 포함하는 하남성 일대를 탈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축적된 북위의 국력은 다움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拔燾)의 시대(재위 424~452)에 사방으로 분출하였다. 최호의 지략과 선비 병사의 용맹으로 뒷받침으로 439년 북량국을 무너뜨려 화북통일의 대사업을 완성하여 5호16국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런데 도무제 이래 3대에 걸쳐 이렇듯 착실하고 순조롭게, 게다가 급속히 발전을 이룬 북위제국의 모습은 앞서 살펴보았던 5호 제국과 비교해 볼 때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의 여러 나라에서는 대부분 제국을 창건한 군주가 사망하고 나면 군대를 소유한 종실간에 다툼이 일어나 그 나라가 와해되거나, 아니면 방계의 유능한 종실이 실력으로 군주가 되든가 둘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도무제 사후, 겨우 여덟 살 난 유약한 후계자가 옹립되어 북위제국의 와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경우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북위제국의 안정, 요컨대 황제권의 확립은 도무제가 후연을 중원에서 몰아내고 제국을 창건한 398년 무렵 휘하의 여러 부락을 해산시킨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 때까지 부락을 통솔하고 있던 '대인(大人)'은 부락에서 분리되어 통솔권을 빼앗기고 여러 부락은 일정한 지구에 정주하여 유목민족적인 이동을 금지당했다. 그리고 부락민은 국가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해산된 옛 부락민, 즉 북족(北族)이 곧 한인과 똑같이 동일한 입장에 놓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수도 평성의 기회에 설정된 8국(八國) 또는 8부(八部)라 불리는 특별 행정구역에 정주하였는데, 그 곳에서는 농경이 장려됨과 동시에 일반 주군(州郡)의 민과는 다른 기준으로 군수품이 징발되었다. 또 거기에는 일반 주군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9품 중정법과 비슷한 임관제도가 행하여졌는데, 옛 대인 일족에 대해서는 부락해산의 타격을 경감해 주기 위한 특별 우대조치가 취해졌다. 이 같은 특별 행정구역은 그 후 점차 축소되어 이윽고 태무제의 치세 동안에 결국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부락해산이라는 단호한 조치가 종실간의 다툼으로 와해된 5호 여러 나라의 선례를 피하고, 북위제국의 지속을 가능케 한 최대의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위의 균전제 시행
북위 태화 9년(485) 10월, 북위는 균전제를 실시했다. 균전제의 원칙은 성년 남자인 정(丁)의 수를 계산하여 경작지인 전(田)을 부여하는 것이다. 균전제는 이후 여러 규정을 거쳐 몇 가지 변형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북조에서 수, 당으로 계승되었다. 단지 북위의 균전법에서 특징적인 것은 전지가 노비와 일소(耕牛)에까지 지급되었다는 점인데, 그것이 노비와 일소의 소유자에게 돌아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당시 큰 세력을 갖고 삼장제 시행에 저항한 '종주', 즉 대토지소유자와의 타협의 산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삼장제와 균전법의 시행은 그 같은 대토지소유의 진행과 그로써 생겨난 소농민의 무산화(無産化)를 시정하고, 개개 농가가 자립할 수 있을 만큼 농지를 각각 확보하게 하여 자작농을 육성함으로써 농업생산을 증진시켜, 이를 기초로 각가재정의 충실을 노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책을 건의하여 추진한 한족 지식인들은 5호16국시대 이래의 혼란과 이민족 지배하의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 있으면서 화북 농촌사회의 질서를 열심히 유지해 온 명망가였다. 그들은 함부로 자신의 토지소유를 확대하고 주변 농민을 무산화시켜 자기의 예속하에 두게 되면 그로 인해 오히려 농업생산이 저하되고 농민의 원한을 사 명망을 잃게 된다는 것, 즉 농촌공동체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한다는 점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삼장제와 균전법을 추진한 것은 그 같은 입장에서 북위의 지배력을 빌리면서 화북의 농촌사회에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위 효문제의 개혁
위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한 후 적극적으로 한화를 주장하고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실시함에 따라 한화는 가속화됐다. 태화 18년(494), 효문제는 중서령 고려에게 고악을 정리하도록 했다. 19년 4월, 효문제는 노성(지금의 산동 곡부)으로 가 친히 공자에게 제를 올리고 얼마 후 관제개혁을 단행했다. 위나라 초기 선비족과 한의 관호(官號)가 함께 쓰이며 혼란된 양상을 보이자 효문제는 천도 후 왕소를 기용하여 관제를 개정하고 위진남조의 제도를 따랐다. 5월 효문제는 호복(胡服) 착용을 금지시켰고 조정에서는 북족 언어를 쓰지 말고 중국어를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 "30세 이상의 사람은 습관이 되어 갑자기 고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세 이하로 현재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는 지금까지처럼 호어(胡語)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만약 고의로 사용하면 관위를 강등시키겠다."고 하였다. 태호 20년(496), 정월 효문제는 또 성씨를 바꾸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낙양 천도 시 따라온 선비족 사람들은 일률적으로 하남 낙양을 원적으로 삼도록 하고 사후에 북쪽으로 이장할 수 없다고 규정했고 이박에 족(族)의 성(姓)을 정했다. 효문제는 개혁 시 이미 형성되어 있던 한족 지주의 문벌제도를 인정하고 아울러 이것을 선비족 귀족들에게 보급했다. 효문제의 한화 제도 개혁은 일부 보수적 선비족 귀족의 반대에 봉착했다. 태화 20년(496), 태자 탁발순은 평성으로 도주하여 반란을 획책하려 하였으나 효문제에게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같은 해 겨울, 선비족 귀족 목태와 육예는 진북대장군 탁발사예 등과 결탁하여 평성에서 군사정변을 일으켰으나 효문제가 보낸 군대에 진압되어 반란은 평정되었고 이때부터 순조로운 개혁 진행이 보장되었다.
동위와 서위로 분할된 위나라
북위 영희 3년(534), 효무제 원수가 고환의 압박에 불만을 품고 서쪽 장안으로 달아나 우문태에게 의탁하자 고환은 대노했다. 10월 17일 11세이던 청하왕 세자 원선을 다시 황제로 세우니 이 이가 바로 동위 효정제이며 영희 3년을 천평 원년으로 개원하고 업으로 천도했다. 이렇게 되기 전부터 북위는 대 동란을 겪으며 점차 양대 군사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나는 진양을 근거지로 하는 고환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장안을 근거지로 하는 우문태 집단이다. 영희 3년(534) 5월, 원수는 계엄을 선포하고 하남 등의 주의 군대를 이동시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양나라를 정벌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사실 진양(晉陽)을 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노회한 고환은 이미 사정을 훤히 알고 선수를 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역시 양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 하에 20만 대군을 나누어 남하시켜 낙양까지 육박했다. 원수는 다급해지자 우문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환은 동관까지 쳐들어가 화음까지 진주했다. 원수는 우문태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낙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같은 해 윤 12월, 우문태는 효문제 원수를 독살하였다. 다음해(535) 정월, 우문태는 남양왕 보거를 황제로 세우니 이가 바로 서위 문제며 대통으로 개원했다. 이로부터 북위는 점차 분열되어 동위 정권은 고환 집단의 독점 아래 있고, 서위 정권은 우문태가 통제했다.
사원 전투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대통 원년 우문태와 고환의 양대 집단은 공개적으로 반목하며 각기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한동안 사방에 전화가 일고 도처에 봉화가 올랐다. 대통 3년(537) 8월, 서위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서위의 우문태는 동위를 토벌하려 출병하여 동위의 곡식 저장 요지인 항농을 공격 및 함락하여 현지에서 군량을 충당했다. 고환은 자기의 양식 창고가 급습당한 것을 보고 대노하여 즉시 대장 고오조에 3만을 이끌고 항농을 겹겹이 포위하도록 했다. 또한 자신은 친히 20만 대군을 이끌고 포진에서 황하를 건너 위세당당하게 장안까지 쳐들어가 우문태와 생사를 건 마지막 승부를 벌이고자 했다. 우문태는 고환의 맹렬한 기세를 보고 그가 전열을 완전히 정비하기 전에 맹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우문태는 부족을 이끌고 고환 군대와 60리 정도 떨어진 사원(지금의 섬서 대려 남쪽 난과 위 사이)의 안영에 도착했다. 우문태와 여러 장군들은 의논을 거쳐 부대를 좌우로 나누어 각각 방진을 치고 장사들은 모두 갈대 숲 속으로 매복하여 위곡에서 적을 기다리다 북소리를 듣고 출격하기로 결정했다. 동위 군대는 병사도 많고 세력도 강하며 군력은 서위 군대의 20배에 달했기에 진격하는 내내 의기양양하여 군심이 교만하고 나태했다. 이에 우문태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고환은 대패하여 그날 밤 내내 황하를 건너 도주했다. 사원 전투로 동진이 입은 손실은 무장 병사 8만, 버린 갑옷과 병기가 18만으로 동진의 참패였다. 우문태는 1대 20의 절대적 열세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수도로 개선했다.
우문태의 부병제 창설
서위 대통 9년(543), 서위 우문태는 정식으로 부병제를 창설했다. 대통 8년(542), 우문태는 육군(六軍)을 처음 설치했는데 대대로 전해지는 주나라 제도에 따라 매 군은 1만 2500명이다. 당시 병사의 공급원은 관롱 호족들의 오족 내의 인척인 친당과 동향 사람이었고 군대의 통솔자는 대소 호족으로 충당했다. 사실상 이는 씨족 혈연관계로 조성된 지방군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부병(府兵)'이다. 부병은 대통 16년(550)에 이미 대강의 규모를 갖추었다. 부병 자신의 조세와 노역, 징집은 일체 면제였다. 부병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훈련을 받았다. 부병의 말, 소, 양 등의 가축과 군량은 일률적으로 통군의 6개 주국대장군이 총괄하였고 별도로 각 부에 낭장 하나를 두어 징집, 복역, 퇴역 등을 관리하게 하였다. 병사는 호등의 고하, 장년 남자인 정구의 다소, 재력 정도에 따라 선발하고 호적은 군부에 속하며 군현에 속하지 않았다. '사병'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부병의 전투력은 매우 강했다. 이것이 바로 우문태가 창건한 부병제다.
고양의 동위 찬탈과 북제 건국
동위 무정 8년(550) 5월 10일, 제왕 고양은 황제의 보좌에 등극하여 천보(天保)로 개원하고 국호를 제(齊)라 하였다. 동위 고환의 집정 시기 장자 고징을 계승자로 정하고 또 차남 고양을 실력자로 양성하여 고씨 집안의 권세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형제간의 시기와 질투를 피하기 위하여 고양은 평상시 재능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고환 사후 고징이 집권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암살 당하고 고양이 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동위 무정 8년(550) 정월 18일, 태원공 고양은 승상으로 승격되어 중외제군사를 감독하였고 3월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 고덕정이 여러 차례 고양에게 황위에 오르도록 권했고 서지재와 송경업 등 역시 고양에게 점성술과 귀갑 등의 점괘 결과를 설명하며 반드시 5월에 황위를 선양받아 황제에 올라야 한다고 공언하였다. 고양은 크게 기뻐하여 진양에서 업으로 되돌아 왔다. 문무백관은 대세의 향방을 읽고 감히 반대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5월 초 사공 심락, 시중 장량, 황문시랑 조언심 등이 입조하여 주청을 올리자 동위 효정제가 소양전에서 이들을 친견했다. 장량은 "제왕은 비범하고 어질고 덕이 많다 백성들이 모두 그를 옹호하고 우러러 모시니 폐하께서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황제의 자리를 선양한 일을 본받아 제왕에게 황위를 양위하기를 원하옵니다"고 아뢰었다. 효정제는 어ㅓ찌할 수 없어 "기왕 이렇다면 당연히 조서를 먼저 써야 한다"고 했다. 이에 중서랑 최할과 배양지는 "이미 다 써놓았다"고 아뢰었다. 이어 시중 양음이 조서를 올렸다. 효정은 하는 수 없이 서명했고 이로써 고양이 계획한 정권과 황위 찬탈의 추악한 근본은 결국 성공했다.
북주의 건국
서위(西魏)의 실권가인 우문태(宇文泰)가 죽고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뒤를 이었을 때, 그를 보좌한 우문각의 사촌 우문호가 서위의 공제(恭帝)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이 왕조를 세웠다. 서위(西魏)시대부터 고대의 '주(周)'를 본받았기 때문에 명칭을 북주라 하였는데,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래로 한화(漢化)주의·문벌(文閥)주의를 배척하고 북족존중(北族尊重)주의를 취하였으며, 소박(素朴)주의 정치를 지향하였다.
제3대 무제(武帝) 때 북제(北齊)를 평정하여 화북(華北) 통일을 실현하고, 불교를 폐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아들 선제(宣帝)가 폭군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얻지 못하였다. 그 틈을 탄 외척 양견(楊堅)이 정권을 빼앗아 수(隋)를 세웠다. 그러나 관중(關中)에 본거를 둔 수·당의 직접적인 모체(母體)가 서위(西魏) 및 북주였다는 점에서 이들 왕조의 의의는 크다.
주나라의 북방 통일
건덕 6년(577) 2월, 북주가 북제를 멸하고 북방의 영토를 통일했다. 북주 무제는 건덕 4년(575) 7월과 건덕 5년(576) 10월 두 차례 제나라를 정벌했고 북제의 중요 도시인 진양(晉陽)을 점령했다. 북제 무평 7년(576) 12월, 주 무제가 병사를 이끌고 업성을 공격하자 북제의 후주 고위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북제 승광 원년(577) 정월 1일, 8세 된 아들 고항에게 선위하니 고항은 유주가 되어 승광으로 개원하고 고위는 스스로 태상황제에 올랐다. 3일 북제 태왕태후와 태상황후 등은 수도 업에서 제주로 도주했다. 9일 북제의 고항 역시 측근을 이끌고 동쪽으로 피했다. 19일 북제 태상황제 고위 역시 기병 백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도피했다. 21일 고위는 제주로 도피하여 가족과 잠시 합류한 후 고항에게 영주에 주둔하고 있는 임성왕 고개에게 선위하라는 자신의 의중을 잘 알아듣게 전한 후 고위 자신 천상황이 되고 고항을 수국 천왕으로 칭했다. 이어서 고위는 전 가족을 남쪽의 청주로 도피시켜 진(陳)나라에 의탁하려 했으나 북주의 대장 울지강에 추격당해 포로가 되었다. 2월 고개는 신도에 4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잃었던 땅을 되찾고자 했으나 북주 제왕 우문헌에게 격파되어 포로가 되었고 이로부터 북주가 북방을 통일하게 되었다. 주나라가 제나라를 멸하고 북방을 통일한 일은 객관적으로 북방 각 민족의 융합이라는 역사 과정이 완성되도록 했고 활력이 충만한 새로운 한족을 형성하여 진일보한 남북방 통일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박한제 외 4명, 2015
『중국통사2』, 범우, 중국사학회, 2008
『중국의 역사-위진남북조』, 혜안, 가와카쓰 요시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