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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 | + | [[파일:전족그림.jpg|100픽셀|왼쪽]] |
− | + | 전족(缠足,纏足,chánzú)은 중국에서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만들기 위해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천 등으로 묶던 풍습을 뜻한다. [[오대]](五代)부터 [[민국]](民國)시기까지 거의 1000여년동안 지속되었다. | |
− | [ | + | [http://www.huffingtonpost.kr/2014/06/15/story_n_5497725.html 여기]에서 미국의 사진작가가 찍은 중국 여인들의 전족한 발을 더 상세히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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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전족은 [[위진남북조]], [[당]]과 오대시기를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송대에 전족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로 볼 때, 오대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의 자료에 따르면 오대십국시기 남당의 후주 이욱의 궁정에서 이습은 충에 능한 그의 빈의 발을 비단으로 묶고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금련 즉, 황금으로 만든 연꽃 위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궁중과 상류층의 여성들이 흉내 내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전족의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욱은 빈을 보며 "비단으로 발을 감싸 언뜻 곱게 구부리니 갓 나온 달 같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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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족은 오대(五代)에 출현하였지만, 궁정의 일부 무녀와 후궁만이 전족을 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전족이 궁정내 일부 특수계층의 고립된 행위에서 벗어나 민간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 말기인 12세기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개봉(開封)의 지배계층 부녀자들이 전족의 유행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풍조가 점차 지방의 도시로, 그리고 여타 사대부층으로 확산되어갔다.<br> | ||
+ | '''[[전족|자세히 읽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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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 | + | [[파일:실크로드 소그드상인들.jpeg|100픽셀|왼쪽]] |
− | + |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 즉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의 총칭이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에 의해 '실크로드'가 명명되었고, 이는 우리말로 '비단길'이라고 하기도 한다. | |
− | + | <br>제2차 세계대전 후 학계에서는 선행 연구성과를 토대로 [[오아시스로]]의 동·서단을 각각 중국 동쪽의 한국과 로마까지 연장했을 뿐 아니라, 실크로드의 포괄범위를 크게 확대하였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로와 지중해부터 중국남해에 이르는 남해로까지 포함시켜 동서를 관통하는 이른바 ‘[[3대 간선]]‘으로 그 개념을 확대하였다. 이는 각각 [[초원로]], 오아시스로와 [[해로]]이다. 여기에 유라시아 남북을 관통하는 [[마역로]](馬易路), [[라마로]](喇嘛路), [[불타로]](佛陀路), [[호박로]](琥珀路), [[메소포타미아로]]의 '[[5대 지선]]'까지 그 개념이 확대되어 나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서남북으로 거미줄처럼 뻗어간 교통망을 통해 동서문명은 종횡무진으로 교류하였고 여려 갈래의 간선과 지선으로 이루어진 망상적 교통망을 통틀어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br> '''[[실크로드|자세히 읽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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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역사--> | <!-- 중국의 역사--> | ||
<div id="mp_goodArticle" class="mp_contentsbox" style="border:1px solid #a7d7f9; margin: 0.5em 0.5em 0 0; vertical-align:top; padding: 1em; overflow: auto; -moz-border-radius: 0.8em; -webkit-border-radius: 0.8em; border-radius: 0.8em;"> | <div id="mp_goodArticle" class="mp_contentsbox" style="border:1px solid #a7d7f9; margin: 0.5em 0.5em 0 0; vertical-align:top; padding: 1em; overflow: auto; -moz-border-radius: 0.8em; -webkit-border-radius: 0.8em; border-radius: 0.8em;"> | ||
− | <div class="mp_contentsboxtitle" style="background-color: #bbddff; margin-bottom: 0.7em; padding: 0.2em 0.5em; font-size: 1.2em; line-height: 1.2em; overflow: visible; font-weight: bold; -moz-border-radius: 0.5em; -webkit-border-radius: 0.5em; border-radius: 0.5em;"><div style="float: left; margin: -8px 8px -8px 0px;"></div>[[역사|중국의 역사]] </div><div id="mp-itn"></div> [[파일: | + | <div class="mp_contentsboxtitle" style="background-color: #bbddff; margin-bottom: 0.7em; padding: 0.2em 0.5em; font-size: 1.2em; line-height: 1.2em; overflow: visible; font-weight: bold; -moz-border-radius: 0.5em; -webkit-border-radius: 0.5em; border-radius: 0.5em;"><div style="float: left; margin: -8px 8px -8px 0px;"></div>[[역사|중국의 역사]] </div><div id="mp-itn"></div> [[파일:200px-Zhen he.jpg|100픽셀|왼쪽]] |
− | + | 정화(鄭和)의 원정대는 “디아스보다 60년 먼저 희망봉을 회항했으며,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고, 쿡 선장보다 300년 먼저 호주를 탐사했고, 남극과 북극은 최초의 유럽인보다 400년 앞서, 아메리카는 콜럼버스보다 70여 년 먼저 탐사했다.” | |
− | + | 정화의 대원정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중국의 공예품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종교와 문화 등이 세계로 전파되었고, 특히 농작물의 이동은 인류 전체에 큰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정화의 대원정은 소위 퍼주기식 외교로, 실리를 얻지 못하여 경제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었다. 당시 대원정의 목적이 실리적 외교나 무력을 통한 대외 팽창에 있다기 보다는,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한 평화공존의 원칙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이 외국에 하사했단 비단, 자기, 차 등은 조공으로 들어오는 물건보다 훨씬 가치가 높았다. 또한 막대한 비용이 들었던 대원정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 |
+ | 다음으로 근대적인 관점에서 정화의 대원정은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대원정 이후 중국에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거나, 이를 발전시킨 무언가가 생겨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정화의 대원정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그 형태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띄고 있어 백성의 삶의 질 향상과는 무관하였다. 이는 그저 명 왕조를 위한 일이었으며 민간 무역을 통한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정화의 대원정은 그저 서양인들의 원만한 항해를 위한 길을 닦아주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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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정화|자세히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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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8일 (월) 14: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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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缠足,纏足,chánzú)은 중국에서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만들기 위해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천 등으로 묶던 풍습을 뜻한다. 오대(五代)부터 민국(民國)시기까지 거의 1000여년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의 사진작가가 찍은 중국 여인들의 전족한 발을 더 상세히 볼 수 있다.
전족은 위진남북조, 당과 오대시기를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송대에 전족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로 볼 때, 오대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의 자료에 따르면 오대십국시기 남당의 후주 이욱의 궁정에서 이습은 충에 능한 그의 빈의 발을 비단으로 묶고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금련 즉, 황금으로 만든 연꽃 위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궁중과 상류층의 여성들이 흉내 내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전족의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욱은 빈을 보며 "비단으로 발을 감싸 언뜻 곱게 구부리니 갓 나온 달 같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전족은 오대(五代)에 출현하였지만, 궁정의 일부 무녀와 후궁만이 전족을 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전족이 궁정내 일부 특수계층의 고립된 행위에서 벗어나 민간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 말기인 12세기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개봉(開封)의 지배계층 부녀자들이 전족의 유행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풍조가 점차 지방의 도시로, 그리고 여타 사대부층으로 확산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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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 즉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의 총칭이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에 의해 '실크로드'가 명명되었고, 이는 우리말로 '비단길'이라고 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학계에서는 선행 연구성과를 토대로 오아시스로의 동·서단을 각각 중국 동쪽의 한국과 로마까지 연장했을 뿐 아니라, 실크로드의 포괄범위를 크게 확대하였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로와 지중해부터 중국남해에 이르는 남해로까지 포함시켜 동서를 관통하는 이른바 ‘3대 간선‘으로 그 개념을 확대하였다. 이는 각각 초원로, 오아시스로와 해로이다. 여기에 유라시아 남북을 관통하는 마역로(馬易路), 라마로(喇嘛路), 불타로(佛陀路), 호박로(琥珀路), 메소포타미아로의 '5대 지선'까지 그 개념이 확대되어 나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서남북으로 거미줄처럼 뻗어간 교통망을 통해 동서문명은 종횡무진으로 교류하였고 여려 갈래의 간선과 지선으로 이루어진 망상적 교통망을 통틀어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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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鄭和)의 원정대는 “디아스보다 60년 먼저 희망봉을 회항했으며,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고, 쿡 선장보다 300년 먼저 호주를 탐사했고, 남극과 북극은 최초의 유럽인보다 400년 앞서, 아메리카는 콜럼버스보다 70여 년 먼저 탐사했다.”
정화의 대원정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중국의 공예품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종교와 문화 등이 세계로 전파되었고, 특히 농작물의 이동은 인류 전체에 큰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정화의 대원정은 소위 퍼주기식 외교로, 실리를 얻지 못하여 경제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었다. 당시 대원정의 목적이 실리적 외교나 무력을 통한 대외 팽창에 있다기 보다는,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한 평화공존의 원칙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이 외국에 하사했단 비단, 자기, 차 등은 조공으로 들어오는 물건보다 훨씬 가치가 높았다. 또한 막대한 비용이 들었던 대원정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으로 근대적인 관점에서 정화의 대원정은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대원정 이후 중국에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거나, 이를 발전시킨 무언가가 생겨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정화의 대원정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그 형태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띄고 있어 백성의 삶의 질 향상과는 무관하였다. 이는 그저 명 왕조를 위한 일이었으며 민간 무역을 통한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정화의 대원정은 그저 서양인들의 원만한 항해를 위한 길을 닦아주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추이젠(崔健)은 중국 록(摇滚)의 아버지로 불린다. 중국의 브루스 스프링스틴, 중국의 밥 딜런으로 소개된다. 우리나라의 신중현과 김민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조선족 출신으로 1961년 연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으며 원래는 트럼펫 연주자였다. 1981년 북경관현악단의 트럼펫 주자로 입단한다. 당시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유행하기 시작한 서구 문물과 대중음악에 영향을 받아 그곳에서 ‘칠합판’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1986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해’기념 공연에서 일무소유(一无所有를 연주하며 중국 대중의 환호를 받게 된다. 「일무소유(一无所有)」는 그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음악으로써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는다. 그 무렵 혁명 가곡인 「난니완(南泥湾)」을 편곡해서 중국 혁명의 실패를 비판하고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한해 동안 연주 활동을 금지당하는 제재를 받게 된다.
1987년 결국 북경관현악단에서 제명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1988년 처음 발표한 음반인 <일무소유(一无所有)>에서 기존의 서구식 대중음악의 형식에 중국 전통 악기를 끌어들여 중국적 록 음악을 만들어 냈다.
1989년 1989천안문사건 당시 밴드와 함께 「일무소유(一无所有)」를 시위 현장에서 연주했고 이것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시위가로 불렸다. 이 공연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반체제 가수’의 이미지로 알려진다. 그 후 당국에 의해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방세계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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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생성된 지식 항목: 최근 생성된 지식항목에서는 서울시립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 모든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참여하여 집단지성을 통해 생성한 지식 항목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생성된 지식 항목들은 대부분 관련 수업시간에 학습하고 토론한 것들을 위키문법에 맞추어 편집 정리한 것이다.
- 중국문화 사전: 중국문화 사전은 서울시립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의 학과 수업을 통해 생산되고 종합된 중국어와 중국문화 관련 지식을 관련 주제별로 분류하여 종합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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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학기 수업자료실 운영 과목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는가
“지성은 개인의 속성이 아니다 지성은 집단적으로 발동한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 지성적인지 아닌지는 그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한 지식의 양이나 지능 지수나 연산능력에 따라 판별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또는 그 사람의 발언이나 행동에 의해 그가 속한 집단 전체의 지적능력이 그가 없을 때보다 훨씬 높아질 경우, 사후적으로 그 사람은 지성적인 인물이었다고 판정할 수 있다.
반면, 개인적인 지적 능력은 어지간히 높은 듯하지만, 그 사람이 있음으로써 주위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이며, 노동의욕이 저하하고, 아무도 창의적인 제안을 하지 않게 되는 일이 현실에서는 종종 일어난다. 아니, 지극히 빈번히 일어난다. 그 사람이 활발하게 자신의 지력을 발휘하는 탓에 그가 소속한 집단 전체의 지적 능력이 내려갈 때, 나는 그런 사람을 반지성적이라고 간주한다.”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우치다 다쓰루 內田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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