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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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개관

위진남북조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위진남북조 연표.png


삼국시대

삼국시대(三國時代)는 2세기 말부터, 즉 위가 건립된 220년부터 오가 멸망한 280년까지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 후한 말기, 각종 자연재해와 경제상황 악화로 크게 위, 촉, 오로 나뉘게 된다.

위촉오

후한 말

삼국 분립

진의 통일

진(晋, 265년 ~ 419년)은 서진(西晋, 265년 ~ 316년)과 동진(東晋, 317년 ~ 419년)으로 나뉜다.

서진

동진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

남조

북조

사회와 경제

사회

위진남북조 시대는 문벌 귀족 사회의 기반을 형성한 시기였다.
화북지역은 선비족인 북위가 통일했기 때문에 선비족은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장악하여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의 특혜를 독점하며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유목민이었던 이들이 농경민족인 한족을 지배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한족의 일부를 정치적 협조자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북위에는 남쪽으로 도망가지 않은 한의 호족들이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북위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뒤 선비족들과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한편 강남지역은 서진이 흉노에게 몰락 한 뒤 남으로 피신하여 동진을 건국했다. 그런데 이때 왕족인 사마예가 함께 남하한 화북의 명문 가문의 군사력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건국 후 중앙의 요직은 명문 집안의 세력들에게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중앙의 요직을 차지한 명문 집안 세력들은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이용해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세금면제의 특혜를 받았다. 그런데 이것은 강남 지역의 토착 세력의 불만을 낳았고 그래서 이들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북에서 내려온 명문 가문 세력은 안전하게 강남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토착 세력의 협조가 필요했고 토착 세력 역시도 화북 명문 가문 세력이 보유한 군사력이 두려웠기 때문에 두 세력은 협조를 통해 동진, 즉 남조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남북조 시대의 이러한 지배 세력들은 몇 대에 걸쳐 관직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신분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게 토지를 지급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직을 얻는 것이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긴 것은 대토지 소유와 노예 또는 예속민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광대한 대토지 소유와 노예, 예속민을 지배함으써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막항 한 권력과 지위를 확보했고 왕조 교체후 에도 지배 계급으로 살아남아,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하는 세력들이 정치·사회·경제·문화적인 특권을 독점하게 되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문벌귀족이다. 문벌귀족들은 수·당대에도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존재는 국가 정부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귀족제의 실시

위진남북조, 특히 위진 · 남조 시대는 정치와 사회 체제로서 귀족제가 보편적이었다. 귀족은 당시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세력으로서 군주의 권력을 일정 정도 제약하여 서양 중세의 영주에 비견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서양의 영주처럼 장원 등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반드시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문인 귀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 귀족계층은 외척과 환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여 당쟁을 벌였던 후한 말 청류파에 그 사상적 원류를 두고 있다. 이들이 세습적인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의 시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사 씨로 대표되는 북방 교민 귀족들은 강남 토착 호족인 주·장·고·육 씨 등과 협력하여 동진에서 귀족제를 부활시켰다. 동진 건국과정에서 공훈을 세운 왕씨는 “와과 사마가 함께 천하를 다스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했다. 이 말은 귀족세력이 군주의 권력을 제약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국사에서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관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 이후 왕조에서는 낮은 가문 출신의 창업자가 계속 출현함에 따라 귀족과 군주는 별개로 움직였다. 귀족은 관직과 가문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쏟을 뿐 국사에는 무관심했다. 귀족의 실무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은 한문(寒門)·한인(寒人)들의 정치참여를 초래했고, 송·제·양·진은 한문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 가운데 양 무제는 한문·한인과 귀족층을 결합한 통일적 관료체제를 지향하는 소위 천감개혁을 실시하여 지배층의 분열을 봉합하려 했다. 그 결과 ‘50년간 강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태평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양 말에 일어난 후경의 난의 진압과정에서 남조 귀족의 무능함이 유감없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대량 살육됨으로써 귀족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9품중정제

경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전 시대에 비해 남북과 서쪽으로 중국의 영토가 확장, 개발되던 시기였다. 이것은 수많은 국가가 생성 소멸을 반복하던 혼란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특히 강남 지역을 개발이 두드러졌다. 삼국 시대 오나라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 지역은 동신시대에 들어서면 더 큰 발전을 하게 된다. 북방 유목 민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배척하고 철저한 한화 정책을 추진했다. 북위의 경우 선비족 고유의 복식제도, 언어, 이름의 사용을 금지까지 하며 중국식 교육 및 한족과의 결혼을 장려했다. 물론 한족 입장에서 보면 위협 세력이 스스로 사라지니 즐거운 일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문화는 다양한 북방 민족의 문화를 포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가게 되었다.
계속된 전란으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었고 지방의 호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위의 둔전제에 이어 서진에서는 일반 농민의 소유지를 제한하는 점전제를 실시하는 한편, 이전의 둔전을 둔전민에게 주는 과전제를 실시하여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였다. 북위 효문제는 토지 국유를 전제조건으로 균전제를 실시하였다. 균전제는 경자유전으로 상전과 노전으로 구분된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려는 제도로, 국가 15세 이상의 정남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조세와 역을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사용된 세법이 조·용·조 제도 였고, 농민의 토지를 확보하고 호족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려는 제도였다. 군역제도는 부병제였는데 이 3가지 제도는 당대 후반까지 함께 유지 되었다. 그러나 남조의 경우에는 토지 소유에 규제를 가하지 않아 대토지 소유가 성행하고 장원이 나타났다. 아울러 화북인의 남방 이주로 강남 지방의 농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벼농사가 본격화되고 2모작도 시행되었다.
이러한 제도들에 의해서 국가는 토지 국유 개념을 세울 수 있었고 또 문벌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농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나날이 높아만 갔기 때문에, 토지 소유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으로는 막을 수 있었지만 영구히 막을 수 없었다.

강남지역

강남지방의 경제적 개발 촉진: 한족들의 강남이주, 벼농사 널리보급

화북지역

종교

유교 사상은 국교로서 한 대를 풍미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일한 권위가 될 수 없었다. 노자 · 장 계보를 이은 도가 사상과 개인 구제를 기구하는 신앙이 합쳐져 도교가 확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한 초기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방에서 유입한 불교 사상과 신앙이 비로소 중국인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유 · 불 · 도 삼교가 병립하여 인간 정신의 진폭을 크게 넓히자 이런 사상적 다양성 아래서 새롭고 더욱 확실한 가치가 모색되고 있었다.

도교와 불교

배경

위진남북조 시대의 민중들은 북방 유목민의 남침과 그치지 않는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정신적 위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황폐한 민중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안정시켜 줄 사상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현실의 배경으로 불교, 조로아스터교가 서역을 통해 도입되었고, 도교가 교단을 구축하며 종교로서 위상을 확립했다. 특히 불교와 도교는 민중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아 곳곳에 사원이 건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상과 신상들이 조각되었고 종교화가 그러져 예술 활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민중들에게만 위협을 준 것은 아니었으며 이민족과 소수 문벌 귀족 들이 관직을 독점하면서 지식인 계층은 관직을 얻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지식인 계층에서 종래 입신양면의 인생관을 버리고 ‘더러운 속세’를 초탈하여 은둔 생활을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들은 술과 시, 노래를 벗 삼았고 기이하고 충동적 행동을 일삼으며 현실 세계를 조롱하였다. 그들의 허무·염세주의적인 경향은 현실에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려 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노장 사상과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은둔 생활을 주장하는 불교의 선종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들은 허무와 무위자연의 노장 사상을 기본으로 삼아 일체의 현실적 욕망을 털어 버리고 도덕을 경시하며 현실에 초월하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청담 사상이다. 이런 청담 사상은 당시 사회에서 선진적 사고로 인식되어 관리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는데 그 결과 관리들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청담 사상을 일면 사회· 정치의 기강을 흐려 놓기도 한 셈이다.

도교


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쟁과 왕권 찬탈이 이루어지는 혼란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지식인들은 세속적인 현실을 떠나 자연속에 은거해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도가 사상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죽림7현의 청담사상이 있는데, 이들은 유가들이 격식있게 옷을 차려입거나 깨끗하게 머리와 수염을 깎는 것을 비웃으며, 남루한 옷을 입거나 수염을 깎지 않고 손님을 맞이할 때는 알몸으로 나서는 등의 자기해탈을 추구했다. 또한 깊은 산 속에 은거하며 당시 권력자들과 한 통속이 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과 절개를 지키고자 했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정치에서 벗어난 자연속의 자유로움을추구한 자들을 은사라고 한다. 도가사상이 도교라는 종교로 일체감을 갖게 된 것은, 후한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와 삼장(三張)의 오두미도에서 나름의 교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이 조직된 후 동진 말과 남북조 초가 되어서이다. 이렇게 도가사상은 남북조 시대에 들어 도교라는 하나의 종교로서 통합되어 간다. 도교는 충실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여 달성하고자 한다. 초기 도교 신도의 핵심 구성원은 유망 농민이거나 파산 또는 궁핍한 농민이었다. 도교는 한중 지역에서 종교왕국을 건설한 사천의 성한(成漢)정권에서 세력을 확대한 바 있고, 북위 시대 구겸지의 활약으로 불교 대신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으며, 남조 도교에서 보듯이 어용 · 관방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왕조적 · 민중적 성격의 종교였다.

불교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역과 관련이 깊은 유목민들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시대부터였다. 불교는 호조군주들에게 화이론적 차별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초자연적인 힘으로 재난을 물리치고 전쟁에서도 예견 능력을 발휘하는 신이승(神異僧)은 그 시대 상황과 부합하여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불도징이 후조 왕조에 영입되었고, 그의 제자 동안은 전진 왕조에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부견구마라습을 데려오고자 여광에게 7만의 병사를 주어 쿠차를 정복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돈황에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구마라습은 후진 왕조에게 국사가 되어 3000명의 제자를 모아 불경 번역에 힘썼고, 그 결과 8년 동안 74부 384권을 번역하여 불교 교리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운강 및 용문 등지의 대석굴 조영이 모두 이민족 왕조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불교와 호족정권의 밀접성을 말해준다.
오호 · 북조 시대의 불교는 민중의 종교라기보다 황제의 종교였다. 운강석굴 가운데 '담요오굴(曇曜五窟)'로 알려진 대불들이 황제의 모습을 띤 것이라든지 북위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시기 양차에 걸쳐 폐불이 단행된 것도 불교가 국가에 종속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황제는 당금의 여래”라고 인정한 북조 불교는 “사문은 왕자(王者)에게 경례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남조 불교와는 달랐다. 특히 네 번에 걸쳐 삼보의 종이라 칭하며 사원에 자신의 몸을 위탁하였고 그때마다 신하들이 수억 전을 사원에 지불하고 황제를 다시 찾아와야 했던 양무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불교가 이 시대에 이르러서 성행하게 된 것은 난세의 지속과 민중의 아픔이라는 시대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도교와 비교할 때 역시 불교는 국가 또는 황제의 종교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아육왕상

아육왕상.PNG

아육왕상은 일반적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인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왕인(재위 약 기원전 268-232년) 아쇼카왕, 즉 아육왕이 만든 석가모니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인도에서 불상은 1세기가 되어서야 출현했으므로, 아육왕상의 존재는 후대 불교도들이 만들어낸 전승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아육왕상은 많은 고사를 생산하며 서상(瑞像)으로서 널리 숭배되었다.
아육왕상은 아육왕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4세기부터 아육왕상에 대한 전승이 성립되어 6세기까지 아육왕상 숭배가 매우 유행했다. 아육왕상의 최고조기는 위진남북조시대이다. 최근에는 사천성 성도에서 아육왕상 명문을 가진 남북조시대의 상들이 발견됨으로써 기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문화

배경

귀족문화

-귀족문화의 개화

귀족의 문화가 활짝 꽃핀 곳은 강남이었지만 꽃망울을 터뜨린 것은 서진 시대였다. 이 시대 귀족 문화는 가치관의 다양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후한 시대의 국교였던 유교 도덕을 계승하기도 하였지만 그 가치에 얽매이지 않았고, 유교의 형식적인 예교주의에 속박되었던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 본연의 진정성을 찾으려 했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떠나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논하는 청담(淸談)이 유행했다. 이 것이 후에 현학(玄學)으로 확립된다. 이런 사조는 죽림칠현(竹林七賢)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폭음과 마약 복용 등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또 서진 귀족들은 사치와 물욕에 몸을 맡겼다. 사치 풍조 속에 “돈은 신이다”라고 풍자한 『전신론(錢神論)』이 나온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강남 문화의 주역은 서진의 종실 사마예가 건강을 중심으로 동진을 세우면서 북에서 이주해온 명문 귀족들이었다. 청담의 풍조는 동진 · 남조에서 여전히 유행하였다. 귀족들은 유교를 명분만을 중시하는 ‘명교(名敎)’라 비판하였다. 속세를 등지고 자연과 합일하려는 탈속적인 사상은 문확과 예술 등과 결합하여 화려한 문화로 꽃피었다.
이 시대 문화는 시(時) · 서(書) · 화(畵)로 대표된다.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던 난세와 산수가 수려한 강남이라는 자연환경은 「등지상루(登地上樓)」와 「초거군(草去郡)」을 지은 산수 시인 사령운, 「도화원기(桃花源記)」와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전원시인 도연명 등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당시에 확립된 문장(산문)의 스타일인 4·6병려체는 대구를 구사하여 4구6구가 말이 함께 달리는 듯 균정과 화려함의 결정체였다. 이것은 고전에 대한 깊은 교양과 중국어 음조에 대한 예리한 감각이 합쳐져야만 나올 수 있는 문학사 상 가장 세련된 문체였다.
해서 · 행서 그리고 초서를 완벽한 예술로 완성시키고 「난정서(蘭亭序)」를 쓴 것으로 유명한 서성(書聖) 왕희지는 이 시대가 배출한 걸출한 예술가였다 .또 “형태의 신을 그려냈다‘고 일컬어지는 뛰어난 인물화 <여사잠도(女史箴圖)>를 그린 화성(畵聖) 고개지도 이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다.
이 시대는 문학과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서 자각되고 확립된 시기였다. 글씨와 그림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이것이 예술로서 자각되고, 또 비평하기 위해 문론과 서론 · 화론이 행해져 하나의 장르로 독립된 것은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장의 작법과 비평의 기준을 제시한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한·위 시대 이래 시인의 작품을 상중하 3품으로 품평한 종영의 시품, 아름다운 문장을 가려 수록한 소통의 『문선(文選)』 등이 바로 이 시대에 나온 책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론인 사혁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 보이듯이 예술 비평의 일환으로서 회화론과 회화사가 처음 본격적으로 저술되었던 시대였다. 회화는 이제 고대적인 세계관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서 독립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조충지는 당시 수학의 수준으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원주율을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이처럼 문학과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의 자유라는 풍토 위에 여러 개성을 가진 교양인이 활동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현(玄) · 유(儒) · 문(文) · 사(史)를 겸수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넷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결코 치우치지 않았다.


주요 예술

위진남북조 시기가 되면 한말 이래 지속되던 유학 예교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사상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리고 명사들의 출현, 청담의 성행, 현학의 흥기, 사회생활에 미친 불교의 영향 등등 각종 사상적, 문화적 배경 아래 예술은 다방면에서 모두 찬란한 성과를 거두었다. 문학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회화 역시 점차적으로 중국 고유의 화풍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다수의 회화 대가와 대량의 모사본이 유통되는 명화 및 그림을 의논하는 대량의 저작이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하여 중국 회화는 번영에 들어선다.
또한 이 남북조 시기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금동 불상의 전성기에 돌입하였고, 불교 사찰 벽화 역시 최고봉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남북조라는 두 종류의 풍조가 서로 영항을 주고 융합되어 고습(袴褶)복장이 유행했다.


(1) 남조



(2) 북조
북조의 문화예술은 남조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발달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목란시> 역시도 북조 민가의 대표작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조 시기에는 도자기 역시도 발달이 되었는데 북조의 도자기는 남조의 도자기를 능가하였다. 또한 소수민족 문화와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아 북조에서는 금은기 공예가 발전되었고 현재까지 출토된 공예품 역시 다양하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2015
  • <<자치통감>>, 사마광
  • <<정사 삼국지>>, 김원중
  • <<삼국지 쉽게 읽기>>, 도키 아키코
  • <<위진남북조사>>, 카와카쓰 요시오
  • <<중국통사2>>, 중국사학회, 범우, 2008
  • <<한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안정애, 가람기획, 1993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동양편)》, 우경운, 도서출판 두리미디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