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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이 시기는 크게 [[위·촉·오]](魏·蜀·吳)의 삼국시대(三國時代), 진(晋), 5호16국(5胡16國)시대와 남북조(南北朝)시대로 나뉜다. <br> | ||
+ |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2세기 말, 즉 위(魏)가 건립된 220년부터 오(吳)가 멸망한 280년까지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 후한 말기, 각종 자연재해와 경제상황 악화로 크게 [[위·촉·오]](魏·蜀·吳)의 세 나라로 나뉘게 된다. <br> | ||
+ | [[진]](晋)은 [[서진]](西晋, 265년 ~ 316년)과 [[동진]](東晋, 317년 ~ 419년)으로 나뉜다. <br> | ||
+ | [[5호 16국 시대]]는 304년부터 439년까지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5개의 비한족과 16개의 국가가 여러 나라를 세우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말한다. 5호(五胡)에서 호(胡)는 비한족을 낮춰 부르는 말로 다섯개의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 5는 오행설(五行說)에 결부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오호는 “비한족계 여러 민족”이란 말로 해석된다. 16국은 북위 말엽 사관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하였으며, 실제로 [[5호 16국 시대]]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다고 한다. 남북조(南北朝)시대는 [[남조]]와 [[북조]]가 대립하게 되는 420년부터 수나라가 통일하는 589년까지를 가리킨다. 특히 남조는 크게 강남지역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의 흥망한 시기를 가리킨다. | ||
+ | [http://clipbank.ebs.co.kr/clip/detl/selectClipDetail?subType=50002491&subMenu=50002492&subList=50002783&typeId=1&clipId=VOD_20120120_00456 위진남북조 시대] | ||
− | + | == 사회 == | |
− | + | 위진남북조 시대는 남조의 순수 중국 전통문화인 [[한문화]]와 북조의 [[호한문화]], 즉 호족의 문화와 한족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었다. 특히, [[남조]]의 문화는 강남지역의 한족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화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다. 또, 건업은 오와 동진, 남조의 송·제·양·진 여섯 왕조의 수도이었다. 이 여섯 왕조를 [[육조]] 시대라고 하며, 이 시대의 문화를 육조 문화라고 부르는데, 중국 전통 문화, 즉 한문화를 가리킨다. <br> | |
− | + | 육조문화의 특징은 이 시대의 지배 계급이 귀족들이며 문벌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귀족적인 특색을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귀족제]]를 실시하였다. 더욱이 현실도피의 [[청담]]사상이 유행하였으므로 현실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br> | |
− | + | 한편 [[북조]] 문화는 호족의 침입과 그들의 영향 아래 호족적인 문화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특히, 북조는 육로를 통하여 서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및 서북 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불교]]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또, 북조 문화에 중요한 계기를 가져다 준 것은 북위 효문제의 중국화, 즉 '[[한화정책]]'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한화정책으로 호한 문화가 융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 + | [http://clipbank.ebs.co.kr/clip/detl/selectClipDetail?subType=50002491&subMenu=50003097&subList=50003141&typeId=1&clipId=VOD_20120117_00278 위진남북조의 문화] | |
− | == | + | [http://clipbank.ebs.co.kr/clip/detl/selectClipDetail?subType=50002491&subMenu=50002492&subList=50002783&typeId=1&clipId=VOD_20120117_00273 위진남북조의 남조의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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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전 시대에 비해 남북과 서쪽으로 중국의 영토가 확장, 개발되던 시기였다. 이것은 수많은 국가가 생성 소멸을 반복하던 혼란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특히 강남 지역을 개발이 두드러졌다. 삼국 시대 | + |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전 시대에 비해 남북과 서쪽으로 중국의 영토가 확장, 개발되던 시기였다. 이것은 수많은 국가가 생성 소멸을 반복하던 혼란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특히 [[강남]] 지역을 개발이 두드러졌다.[[삼국 시대]] [[오]]나라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 지역은 [[동진]]시대에 들어서면 더 큰 발전을 하게 된다. <br> |
− | <br>계속된 전란으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었고 지방의 호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위의 [[둔전제]]에 이어 서진에서는 일반 농민의 소유지를 제한하는 [[점전제]]를 실시하는 한편, 이전의 둔전을 둔전민에게 주는 과전제를 실시하여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였다. 북위 [[효문제]]는 토지 국유를 전제조건으로 [[균전제]]를 실시하였다. 균전제는 경자유전으로 상전과 노전으로 구분된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려는 제도로, 국가 15세 이상의 정남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조세와 역을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사용된 세법이 조·용·조 제도 였고, 농민의 토지를 확보하고 호족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려는 제도였다. 군역제도는 [[부병제]]였는데 이 3가지 제도는 당대 후반까지 함께 유지 되었다. 그러나 남조의 경우에는 토지 소유에 규제를 가하지 않아 대토지 소유가 성행하고 장원이 나타났다. 아울러 화북인의 남방 이주로 강남 지방의 농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벼농사가 본격화되고 2모작도 시행되었다. | + | 북방 유목 민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배척하고 철저한 [[한화정책]]을 추진했다. 북위의 경우 선비족 고유의 복식제도, 언어, 이름의 사용을 금지까지 하며 중국식 교육 및 한족과의 결혼을 장려했다. 물론 한족 입장에서 보면 위협 세력이 스스로 사라지니 즐거운 일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문화는 다양한 북방 민족의 문화를 포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가게 되었다.<br> |
− | <br>이러한 제도들에 의해서 국가는 토지 국유 개념을 세울 수 있었고 또 문벌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농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나날이 높아만 갔기 때문에, 토지 소유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으로는 막을 수 있었지만 영구히 막을 수 없었다. | + | 계속된 전란으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었고 지방의 호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위의 [[둔전제]]에 이어 서진에서는 일반 농민의 소유지를 제한하는 [[점전제]]를 실시하는 한편, 이전의 둔전을 둔전민에게 주는 과전제를 실시하여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였다. <br> |
− | + | 북위 [[효문제]]는 토지 국유를 전제조건으로 [[균전제]]를 실시하였다. 균전제는 경자유전으로 상전과 노전으로 구분된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려는 제도로, 국가 15세 이상의 정남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조세와 역을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사용된 세법이 조·용·조 제도 였고, 농민의 토지를 확보하고 호족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려는 제도였다. 군역제도는 [[부병제]]였는데 이 3가지 제도는 당대 후반까지 함께 유지 되었다. 그러나 남조의 경우에는 토지 소유에 규제를 가하지 않아 대토지 소유가 성행하고 장원이 나타났다. 아울러 화북인의 남방 이주로 강남 지방의 농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벼농사가 본격화되고 2모작도 시행되었다. <br> | |
− | + | 이러한 제도들에 의해서 국가는 토지 국유 개념을 세울 수 있었고 또 문벌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농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나날이 높아만 갔기 때문에, 토지 소유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으로는 막을 수 있었지만 영구히 막을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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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 == 종교 == | ||
+ | [[유가]]사상은 국교로서 한 대를 풍미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일한 권위가 될 수 없어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기 시작했다.<br> | ||
+ | [[노자]]·[[장자]] 계보를 이은 [[도가]] 사상과 개인 구제를 기구하는 신앙이 합쳐져 도교가 확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한 초기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방에서 유입한 불교 사상과 신앙이 비로소 중국인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유·불·도 삼교가 병립하여 인간 정신의 진폭을 크게 넓히자 이런 사상적 다양성 아래서 새롭고 더욱 확실한 가치가 모색되고 있었다. | ||
− | + | == 예술 == | |
− | + | 위진남북조 시기가 되면 한말 이래 지속되던 유학 예교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사상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리고 명사들의 출현, [[청담]]의 성행, [[현학]]의 흥기, 사회생활에 미친 불교의 영향 등등 각종 사상적, 문화적 배경 아래 예술은 다방면에서 모두 찬란한 성과를 거두었다. <br> | |
− | + | 문학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회화]] 역시 점차적으로 중국 고유의 화풍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다수의 회화 대가와 대량의 모사본이 유통되는 명화 및 그림을 의논하는 대량의 저작이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하여 중국 회화는 번영에 들어선다. <br> | |
− | + | 또한 이 남북조 시기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금동 불상]]의 전성기에 돌입하였고, [[불교 사찰 벽화]] 역시 최고봉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남북조라는 두 종류의 풍조가 서로 영항을 주고 융합되어 [[고습]](袴褶)복장이 유행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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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진남북조 시기가 되면 한말 이래 지속되던 유학 예교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사상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리고 명사들의 출현, [[청담]]의 성행, [[현학]]의 흥기, 사회생활에 미친 불교의 영향 등등 각종 사상적, 문화적 배경 아래 예술은 다방면에서 모두 찬란한 성과를 거두었다. 문학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회화]] 역시 점차적으로 중국 고유의 화풍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다수의 회화 대가와 대량의 모사본이 유통되는 명화 및 그림을 의논하는 대량의 저작이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하여 중국 회화는 번영에 들어선다. | ||
− | <br>또한 이 남북조 시기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금동 불상]]의 전성기에 돌입하였고, [[불교 사찰 벽화]] 역시 최고봉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남북조라는 두 종류의 풍조가 서로 영항을 주고 융합되어 [[고습]](袴褶)복장이 유행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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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조 === | ||
+ | 남조의 문화는 남조에 여섯 왕국(오, 동진, 남조, 송·제·양·진)이 속해있었으므로 [[육조]]문화라고 부른다. 중국의 순수 중국 전통 문화를 추구하였으며 주로 강남지역의 한족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화적 계통이 계승되었다.<br> | ||
+ | 육조문화의 특징은 지배계급이 귀족들이며 문벌을 자랑했기 때문에 귀족적인 특색을 지녔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청담]]사상과 같이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 유행하였다. 남조 예술의 대표작은 [[예학명]]과 소역의 [[직공도]]가 있다. | ||
− | + | === 북조 === | |
− | + | 북조의 문화예술은 남조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발달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목란시]]> 역시도 북조 민가의 대표작이다. <br> | |
− | + | 뿐만 아니라 남북조 시기에는 도자기 역시도 발달이 되었는데 북조의 [[도자기]]는 남조의 도자기를 능가하였다. 또한 소수민족 문화와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아 북조에서는 [[금은기 공예]]가 발전되었고 현재까지 출토된 공예품 역시 다양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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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 == 참고문헌 == | ||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2015 |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2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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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 사마광 | * <<자치통감>>, 사마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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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 삼국지>>, 김원중 | * <<정사 삼국지>>, 김원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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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쉽게 읽기>>, 도키 아키코 | * <<삼국지 쉽게 읽기>>, 도키 아키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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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진남북조사>>, 카와카쓰 요시오 | * <<위진남북조사>>, 카와카쓰 요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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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사2>>, 중국사학회, 범우, 2008 | *<<중국통사2>>, 중국사학회, 범우, 2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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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안정애, 가람기획, 1993 | * <<한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안정애, 가람기획, 199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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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동양편)》, 우경운, 도서출판 두리미디어, 2004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동양편)》, 우경운, 도서출판 두리미디어, 2004 | ||
− | [[분류: | + | [[분류:역사]] |
2016년 6월 27일 (월) 16:02 기준 최신판
시대개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이 시기는 크게 위·촉·오(魏·蜀·吳)의 삼국시대(三國時代), 진(晋), 5호16국(5胡16國)시대와 남북조(南北朝)시대로 나뉜다.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2세기 말, 즉 위(魏)가 건립된 220년부터 오(吳)가 멸망한 280년까지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 후한 말기, 각종 자연재해와 경제상황 악화로 크게 위·촉·오(魏·蜀·吳)의 세 나라로 나뉘게 된다.
진(晋)은 서진(西晋, 265년 ~ 316년)과 동진(東晋, 317년 ~ 419년)으로 나뉜다.
5호 16국 시대는 304년부터 439년까지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5개의 비한족과 16개의 국가가 여러 나라를 세우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말한다. 5호(五胡)에서 호(胡)는 비한족을 낮춰 부르는 말로 다섯개의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 5는 오행설(五行說)에 결부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오호는 “비한족계 여러 민족”이란 말로 해석된다. 16국은 북위 말엽 사관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하였으며, 실제로 5호 16국 시대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다고 한다. 남북조(南北朝)시대는 남조와 북조가 대립하게 되는 420년부터 수나라가 통일하는 589년까지를 가리킨다. 특히 남조는 크게 강남지역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의 흥망한 시기를 가리킨다.
위진남북조 시대
사회
위진남북조 시대는 남조의 순수 중국 전통문화인 한문화와 북조의 호한문화, 즉 호족의 문화와 한족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었다. 특히, 남조의 문화는 강남지역의 한족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화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다. 또, 건업은 오와 동진, 남조의 송·제·양·진 여섯 왕조의 수도이었다. 이 여섯 왕조를 육조 시대라고 하며, 이 시대의 문화를 육조 문화라고 부르는데, 중국 전통 문화, 즉 한문화를 가리킨다.
육조문화의 특징은 이 시대의 지배 계급이 귀족들이며 문벌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귀족적인 특색을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귀족제를 실시하였다. 더욱이 현실도피의 청담사상이 유행하였으므로 현실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한편 북조 문화는 호족의 침입과 그들의 영향 아래 호족적인 문화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특히, 북조는 육로를 통하여 서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및 서북 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불교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또, 북조 문화에 중요한 계기를 가져다 준 것은 북위 효문제의 중국화, 즉 '한화정책'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한화정책으로 호한 문화가 융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진남북조의 문화
위진남북조의 남조의 문화
경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전 시대에 비해 남북과 서쪽으로 중국의 영토가 확장, 개발되던 시기였다. 이것은 수많은 국가가 생성 소멸을 반복하던 혼란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특히 강남 지역을 개발이 두드러졌다.삼국 시대 오나라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 지역은 동진시대에 들어서면 더 큰 발전을 하게 된다.
북방 유목 민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배척하고 철저한 한화정책을 추진했다. 북위의 경우 선비족 고유의 복식제도, 언어, 이름의 사용을 금지까지 하며 중국식 교육 및 한족과의 결혼을 장려했다. 물론 한족 입장에서 보면 위협 세력이 스스로 사라지니 즐거운 일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문화는 다양한 북방 민족의 문화를 포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가게 되었다.
계속된 전란으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었고 지방의 호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위의 둔전제에 이어 서진에서는 일반 농민의 소유지를 제한하는 점전제를 실시하는 한편, 이전의 둔전을 둔전민에게 주는 과전제를 실시하여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였다.
북위 효문제는 토지 국유를 전제조건으로 균전제를 실시하였다. 균전제는 경자유전으로 상전과 노전으로 구분된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려는 제도로, 국가 15세 이상의 정남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조세와 역을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사용된 세법이 조·용·조 제도 였고, 농민의 토지를 확보하고 호족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려는 제도였다. 군역제도는 부병제였는데 이 3가지 제도는 당대 후반까지 함께 유지 되었다. 그러나 남조의 경우에는 토지 소유에 규제를 가하지 않아 대토지 소유가 성행하고 장원이 나타났다. 아울러 화북인의 남방 이주로 강남 지방의 농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벼농사가 본격화되고 2모작도 시행되었다.
이러한 제도들에 의해서 국가는 토지 국유 개념을 세울 수 있었고 또 문벌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농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나날이 높아만 갔기 때문에, 토지 소유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으로는 막을 수 있었지만 영구히 막을 수 없었다.
종교
유가사상은 국교로서 한 대를 풍미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일한 권위가 될 수 없어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노자·장자 계보를 이은 도가 사상과 개인 구제를 기구하는 신앙이 합쳐져 도교가 확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한 초기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방에서 유입한 불교 사상과 신앙이 비로소 중국인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유·불·도 삼교가 병립하여 인간 정신의 진폭을 크게 넓히자 이런 사상적 다양성 아래서 새롭고 더욱 확실한 가치가 모색되고 있었다.
예술
위진남북조 시기가 되면 한말 이래 지속되던 유학 예교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사상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리고 명사들의 출현, 청담의 성행, 현학의 흥기, 사회생활에 미친 불교의 영향 등등 각종 사상적, 문화적 배경 아래 예술은 다방면에서 모두 찬란한 성과를 거두었다.
문학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회화 역시 점차적으로 중국 고유의 화풍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다수의 회화 대가와 대량의 모사본이 유통되는 명화 및 그림을 의논하는 대량의 저작이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하여 중국 회화는 번영에 들어선다.
또한 이 남북조 시기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금동 불상의 전성기에 돌입하였고, 불교 사찰 벽화 역시 최고봉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남북조라는 두 종류의 풍조가 서로 영항을 주고 융합되어 고습(袴褶)복장이 유행했다.
남조
남조의 문화는 남조에 여섯 왕국(오, 동진, 남조, 송·제·양·진)이 속해있었으므로 육조문화라고 부른다. 중국의 순수 중국 전통 문화를 추구하였으며 주로 강남지역의 한족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화적 계통이 계승되었다.
육조문화의 특징은 지배계급이 귀족들이며 문벌을 자랑했기 때문에 귀족적인 특색을 지녔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청담사상과 같이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 유행하였다. 남조 예술의 대표작은 예학명과 소역의 직공도가 있다.
북조
북조의 문화예술은 남조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발달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목란시> 역시도 북조 민가의 대표작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조 시기에는 도자기 역시도 발달이 되었는데 북조의 도자기는 남조의 도자기를 능가하였다. 또한 소수민족 문화와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아 북조에서는 금은기 공예가 발전되었고 현재까지 출토된 공예품 역시 다양하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2015
- <<자치통감>>, 사마광
- <<정사 삼국지>>, 김원중
- <<삼국지 쉽게 읽기>>, 도키 아키코
- <<위진남북조사>>, 카와카쓰 요시오
- <<중국통사2>>, 중국사학회, 범우, 2008
- <<한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안정애, 가람기획, 1993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동양편)》, 우경운, 도서출판 두리미디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