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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근국은 영림서 직원이었고 어머니 최희저는 지주의 딸이었다. | 리영희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근국은 영림서 직원이었고 어머니 최희저는 지주의 딸이었다. |
2016년 12월 13일 (화) 22:31 판
리영희(李泳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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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9.12.2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
사망 |
2010.12.5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
목차
생애
출생과 소년시절 (1929~8.15광복 이전)
리영희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근국은 영림서 직원이었고 어머니 최희저는 지주의 딸이었다. 리영희가 태어난 1929년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20년에 이르는 암담한 때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평북 운산이나 삭주는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늘 소외되어 왔는데,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는 어느 지역 못지않게 혹심한 수탈을 당했다.
리영희가 5세부터 14세까지 10년 동안 살면서 유치원과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닌, 사실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삭주군 대관은 리영희의 '마음의 고향'이다. 리영희가 어릴 적 살았던 고향은 지리적으로는 첩첩산중이었지만 문명개화는 남쪽 지역보다 훨씬 앞섰다. 중국을 통해 선교사가 드나들면서 기독교가 일찍부터 터를 잡았고, 그로 인해 서양문물이 비교적 일찍 수입되었다. 그 때문에 평등의식이 강했다.
리영희가 자란 1930년대 조선의 상황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참담한 시대였다. 그런 속에서도 평안도 산골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자라고 식민지 교육이나마 교육은 이루어졌다. 안정된 가정에서 태어난 리영희는 당시로서는 드문 유치원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면장을 지낸 할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개명한 유지였고, 어머니는 벽동군의 거부로 알려진 천석꾼의 딸이었으며, 구한말 신식 교육제도에 따라 아버지는 의주에 설립된 농림학교를 나와 평북 영림서의 공무원으로 근무하여, 지역에서는 상류 계층이 되어 리영희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심성이 고운 편이었고, 반대로 어머니는 성격이 괄괄한 여장부였다.
리영희는 당시 일제의 창씨개명으로 인하여 평강호강(平江豪康)이 되었다.
리영희는 머리가 꽤 뛰어난 편이었는지, 소학생(초등학생) 시절에 늘 전교 1,2등을 다투었다. 그러나 대관면의 수재로 소문 난 그도 급장은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리영희는 이를 본인의 성격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교만해졌으며, '모'가 있었던 인간적 결점 때문이 아닌지 회상하고 있다. 리영희는 스스로 가족의 '민중사'라고 평가한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이 두 사건은 그의 성장기 의식에 큰 영향을 주고, 비판과 저항의 정신을 갖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머슴 문학빈 사건과 외삼촌 최인모 사건이다.
리영희는 어머니에게서 이 두 가지 한 맺힌 가족사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리영희의 어머니는 자기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은 물론 아버지의 목숨까지 머슴(독립군 문학빈)에게 빼앗긴 데 대한 증오와 친정오라버니의 정신 나간 행동에 대한 원망을 평생 안고 살았다. 리영희는 친척을 통틀어 존경할 만한 인물이 별로 없는데, 오직 이 외삼촌만을 평생 존경해 왔고, "나의 생애에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의식의 역사'가 됐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 자신의 내부에 외가의 불행에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정신적 '내면의 원시시대'에서 '무의식의 근거'가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회상한다.
1944년 봄, 소학교를 졸업한 리영희는 신의주 사범대학과 경성공립학교 두 군데 모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와 6학년 담임 일본인 교사의 뜻으로 경성공립학교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취업을 위해 경성공립학교 전기과를 택했을 터였고, 서울 대방동에 소재한 이 학교는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교과체계로, 졸업하면 3종 전기사 자격증을 주기 때문에 취업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리영희의 서울 유학생활은 고달팠다. 2학년 때까지 흑석동에서 하숙을 하며 십 리나 걸어 학교에 다녔다. 일제 말기여서 식량은 배급제로 하루 세 끼 밥을 먹기 어려웠다. 만주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콩깻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한때는 을지로 청계천가로 하숙을 옮겨 전차로 통학하기도 했다.
학업은 3학년을 끝으로 일절 중단되고 4학년부터는 전시동원체제에 따라 노동에 동원되었다. 리영희는 아무리 전쟁 막바지의 전시체제라고 하지만 아직 솜털도 다 벗지 못한 소년학생들의 공부를 아예 작파시키고 노동에만 동원하는 일본 군국주의에 하염없는 분노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리영희는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라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서, 집에 오면 하숙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일밖에 없었다. 리영희는 당시 본인이 대담함‧적극성‧모험심 같은 것이 없는 소년이었고, 흔히 말하는 '공부벌레'의 전형이었다고 회상한다.
리영희는 일본인 학생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일본어를 익혀 일본문학은 물론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의 명저들을 읽을 수 있었고, 한문 교육이 강했던 덕으로 당시(唐詩)를 비롯한 중국 고전을 제법 독파하게 되었다.
청년시절 (8.15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며)
리영희는 고향에서 광복을 맞았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근로동원과 배고픔으로 질식할 것 같은 상황을 탈피하고자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 8월 10일 몇 차례 기차를 바꿔 타고 10시간이 걸려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가족은 아버지의 직장관계로 창성군 청산면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리영희는 이 마을에서 8월 16일에야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리영희는 17세였다.
리영희는 날마다 소학교 교정에서 열리는 해방 축하모임에 참석하여 면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애국가를 불렀다. 하지만 민족해방이나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거대한 가치보다는 굶주리지 않고 실컷 먹을 수 있고, 근로동원이 아닌 공부하는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리영희는 학교들이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광복되던 해 11월경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6년제가 된 고등학교 5학년에 편입하고 이듬해 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미군정 체제가 수립되면서 학교가 미국식으로 편제되었다. 1946년에 들어 북쪽에서는 토지개혁이 시작되고 일제에 협력했던 지주‧기독교신자들이 속속 이남으로 도피하였다. 날마다 군중집회와 소련군의 환영행사가 열렸다.
리영희는 청산면의 중학교 학생모임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의 사명과 역할 등에 관한 토론과 집회를 열었다. 또 한글 야학을 시작하고 루소의 『에밀』, 스미스의『자유론』등을 읽었다. 그 무렵 중학교 재학 이상의 학력자는 청산면 전체를 통틀어 10여 명에 불과했고,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자는 리영희와 강영훈 둘뿐이었다.
어느 날 리영희는 학생 6명과 함께 군(郡) 트럭에 실려 경찰서에 끌려갔다. 닷새 만에 풀어주면서 앞으로 토론회 같은 것을 하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다. 리영희가 겪은 첫 유치장 신세였다.
리영희의 아버지는 영림서의 공무원이었는데도 쫓겨나지 않고 2년이나 더 현직에서 근무하였다. 리영희의 부모는 2년 뒤에야 막내아들 명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5학년에 편입된 리영희는 처음으로 우리나라 역사와 그동안 폐지되었던 한국어를 다시 배우게 되었지만 혼란 속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광복이 되었지만 이 시기 해방정국은 엉망진창이었다. 친일파뿐 아니라 기회주의자‧간상배‧폭력배들까지 날뛰면서 미군정이 접수한 해방정국은 무질서와 혼미상태 그대로였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고 그나마 생필품이 부족하였다. 해방을 맞아 해외동포들이 속속 귀환하고, 이북에서 수백만 명이 서울로 밀려오면서 서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리영희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형편없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좌절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학교를 다니고 먹고 살기 위해 모진 세파에 몸을 맡겼다.
남대문시장에서 사제담배나 성냥을 팔아 그날그날 생계를 유지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로 화폐가치가 폭락한 탓에 집에서 올 때 가져온 돈은 금세 동이 나고, 고향에서의 송금도 끊겼다. 그래서 가장 손쉽게 택한 것이 사제담배와 성냥팔이였다. 사제담배를 장에서 팔다 경찰에 쫓기거나 붙잡혀 압수당하기도 했다.
리영희는 매우 궁핍한 삶으로 책을 살 여유가 없었다. 이 시기 충무로 3,4가에 자리잡기 시작한 책방에서 'THE USE OF LIFE'(당시 리영희 학교 영어 교과서)라는 책을 훔쳤는데, 이 사건은 두고두고 리영희의 마음을 괴롭혔다.
어린 나이에 너무도 살벌하고 궁핍한 서울생활을 하던 1946년 어느 날, 리영희는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국립해양대학 창설 신입생 모집공고를 보게 되고, 지원하여 입학하였다. 새로 창설된 국립해양대학은 제1기생으로 항해과 50명, 기관과 50명을 뽑았는데, 리영희는 항해과에 지원하였다. 어엿한 4년제 대학이었지만 변변한 교사 하나 없이 가건물에서 수업을 해야 했으며, 교수진 또한 지극히 빈약했다. 전공학과를 제외한 교양학과는 대부분 서울의 다른 대학 강사들에 의존하였다. 처음 일 년 동안의 인천생활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일 년 뒤에 내려간 군산의 실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호남지역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는 항구로 번창한 도시였지만, 해방 뒤에는 여느 항구도시처럼 황량한 모습이었다. 교과내용이나 교육환경도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생활고에 몰린 리영희가 해양대학에 몸담고 있는 동안 해방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어수선해졌다. 1947년 봄이 되면서 찬탁과 반탁은 전국적인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는데, 리영희는 반탁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훗날 리영희는 "'신탁통치 찬성 = 공산당' 이라는 당시 정치투쟁의 단순논리 의미를 내가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몰랐다."라며 신탁통치 반대에 관해 생각이 바뀌었다.
리영희는 해양대학 시절 학교 수업에 열중하여 천문항법과 기상‧선박의 운용실무, 출입항 사무 등을 익혔다. 그리고 전공과는 다른 취미에서 영문 소설작품에 심취했다.
리영희는 해양대학 재학시절 여수‧순천반란사건에 우연히 개입하게 되었는데, 그는 훗날 "뜻하지도 않게 인생에서 첫 실전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제주4.3사건 시기였는데, 제주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리영희는, 부산에서 석탄을 싣고 인천으로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고 시행 중에 부산으로 회항하여 중무장한 국군 1개 대대를 싣고 여수항으로 항해했다. 배가 신시가지 쪽으로 접근하자 육지에서 반란군이 총격을 가했다. 배에 탄 부대가 박격포탄을 퍼부으며 반격하자 반란군이 퇴각했다. 선내의 부대가 상륙하여 추격하자 그들은 기관차를 타고 퇴각했다. 리영희는 다른 선원들과 시내로 올라가 이런 전투 장면을 지켜봤다.
혼탁한 시대 중, 백범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평소 김구를 매우 존경하고 사랑했던 리영희는 충격을 받았으며, 국민장에 맞추어서 열린 군산시의 추모식에 참석하여 추모가를 부르며 통곡하였다.
리영희는 1950년 3월에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하였다. 적성이 맞지 않아서였는지 성적은 학급에서 중간쯤이었다. 당시 21세였다. 대학을 졸업한 리영희는 앞길을 궁리하던 중 친구 부친이 교장으로 있는 경북 안동 소재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하였다. 그동안 연마해온 영어 실력이 좋아 교사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친구 부친인 교장의 배려로 기와집 사택이 주어져 당분간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으나, 3개월 뒤 6.25전쟁이 터지고 리영희는 군에 지원 입대하였다.
당시 전황은 팔공산전투가 한창일만큼 인민군은 한반도를 거의 점령하고 대구지역에서 총공세를 펴는 상황이었다. 리영희는 전란을 맞아 학교가 문을 닫고, 가족과 함께 안동을 떠나 대구에 도착하여 교육구청에 들렀는데, 여기서 '유엔군 연락장교단 모집' 공고문을 보고 지원하였다. 특히 영어교사를 우대한다는 공고가 있었고, 미군 상대 통역장교가 된다는 것은 당시 입대를 앞둔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이었기에, 리영희는 모집에 지원하여 입대하였다.
국군의 반격으로 전선이 북상하는 중에 임관된 리영희는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에 배속되었다. 전투부대 배속과 함께 지리산‧속리산 일대의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리영희는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달고 일선부대에 배치되었지만, 당시 통역장교는 반은 민간인 반은 군인 꼴의 기묘한 신분이었다. 정식명칭은 '유엔군연락장교'였지만, 유엔군에도 미군에도 속하지 않았다. 계급장은 장교였지만, 당번병도 없었고 군에서 서자 취급을 받았다.
리영희는 전쟁을 겪으면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비인간적 행위, 휴머니즘을 말살하는 폭력, 사병에 대한 장교의 횡포, 민간인에 대한 군대 및 군인의 거드럭거림 등을 겪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늘 반대하고 항의했다. 그는 "휴머니즘에는 인종이나 민족, 국가의 차별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동족끼리 싸우고 죽이는 비참한 전쟁에 분노와 처연함을 느끼던 전쟁 무렵, 국민방위군사건이 벌어졌다. 리영희는 군고위층의 부패와 타락에 분노했다.
1951년 가을 강원도 건봉산 전투에 참전하고 있을 때, 동생 명희가 막노동을 하던 중에 맹장이 터진 채 일을 계속하다가 치료를 받지 못하여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동생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한 리영희에게 명희의 죽음은 군대에서 겪은 갖가지 부패상과 함께 그의 생애에 정신적으로 큰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1951년 2월에 벌어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리영희가 몸담고 있었던 보병 제9연대가 저질렀다. 그는 이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리영희는 "처절한 전쟁의 비인간성‧반인간성‧반생명성을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같은 집단적인 광기를 통해 목격하고 알게 된 나의 내면에는 전쟁과 군대, 그런 잔인무도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군대라는 이름의 인간집단들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증오심과 혐오가 나의 본성처럼 자리를 잡아갔어요."라고 회상한다.
리영희는 최전방에서 3년 반을 지내면서 제20연대에 배속되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리영희는 다른 장교들이 군수품을 빼내어 치부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에도 쉬는 시간이면 꾸준히 독서를 했다. 미국인 고문관들이 6개월마다 한 번씩 일본에 휴가를 다녀오는 편으로 목록을 주어 책을 사오도록 하여, 영어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이와나미 문고판 세계명작들을 읽을 수 있었으며, 착실하게 지식을 늘리고 세계관을 넓혀갔다.
리영희의 영어회화 능력은 꾸준한 노력으로 더욱 유창해졌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이 대구 이남과 부산지역을 시찰할 때에는 수많은 통역장교들 가운데 그가 선발되어 통역을 맡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로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갔다. 휴전 후 육군 장교는 대체로 3~4년이면 제대하였으나, 통역장교는 휴전 뒤에도 3년 반을 더 복무해야 했다.
리영희는 제11단장에게서 공로은성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 훈장은 전란의 부실한 병사관리 때문이었는지 군 경력부에서 삭제되었다.
리영희는 후방 근무처로 내려왔고, 이후 제2군사령부에 이어 제5관구사령부, 육군군의학교, 육군인쇄공창 등으로 옮겨 다녔다.
당시 일반적으로 장교가 제대하는 방법으로 국회의원 출마와 외국 유학 그리고 고등고시 합격의 길이 있었다. 리영희는 본인 처지에 가장 현실적인 고등고시를 준비하였다. 외무고시를 준비하였는데, 군 업무 중에 틈틈이 시험공부를 했지만, 얼마 뒤 예편이 되어서 시험을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1955년, 국립해양대학 재학 시절 묵었던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한 처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가 바로 평생을 함께 하게 된 아내 윤영자이다. 두 사람은 1956년 군산에서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윤영자는 전통적인 현모양처 상이었다.
리영희는 입대한 지 만 7년이 되는 날, 예편과 함께 소령으로 진급되어 제대하였다. 29세, 갓 결혼한 아내와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는 가장의 몸이었다. 그는 예편 1개월 전에 합동통신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리영희는 드디어 기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자생활과 4.19혁명 (이승만 정권 속에서)
군 제대 후 1957년 29세 리영희는 우연한 기회로 합동통신 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응시생 273명 가운데서 5명을 뽑았는데 리영희는 꼴찌로 합격하였다. 응시자 대부분이 서울의 명문대 출신이고 합격자 앞 순위 4명은 모두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출신이었다. 이들 중에는 6.25전쟁 중에 군대도 가지 않고 학업에만 종사했던 배경 좋은 사람도 있었다.
이 시기 남한은 이승만의 독재시절이었다. 언론은 이승만을 태양과 국부로 추앙하면서 갓 싹을 내민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기다리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한 영국 <타임>지의 논평이 국제사회에 퍼지면서 나라 망신을 당했다.
리영희가 입사한 합동통신은 당시 야성이 강한 언론사였다. 리영희의 합동통신 첫 발령 부서는 외신부였다. 영어는 물론 일어와 불어에도 능한 까닭이었다. 그는 군복무시절부터 틈틈이 불어 공부도 해온 터라 어느 정도 문장을 해독하는 수준은 되었다. 세계 각국의 통신사에서 무선으로 들어온 영문기사를 받아서 빠른 시간에 분류, 우리말로 기사화하여 신문‧방송을 비롯하여 정부기관‧기업체에 신속히 배달해야 했는데, 날마다 한밤중에 쏟아져 들어온 엄청난 분량의 기사를 취사선택하여 번역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영희의 주요 관심 분야는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과 중국공산당의 혁명전쟁, 미‧영의 착취에 반발한 이란(모사데크 수상)의 석유 국유화 단행, 아프리카 가나의 사회주의 지도자 앵크루마의 반백인 식민지투쟁,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투쟁,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급진 사회‧계급혁명이었다. 리영희는 "그런 주제의 큰 뉴스가 들어올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한마디로 제국‧식민주의 국가들이 지배하는 구질서에 대항하는 각 대륙인민의 '현상타파' 운동이 나의 주관심사였다. 전 인류를 투쟁으로 이끌어내는 '변혁의 시대정신'에 나는 열정적으로 공감하였다."라고 회상한다.
이승만 정권은 선거를 앞두고 진보적인 월간지 <중앙정치> 11월호를 발매금지하고,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검거한데 이어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하였다. 1956년 5월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의 약진에 위협을 느껴 그를 제거하려는 술책이었다. 이와 함께 언론인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 공작이 자행되면서 권력과 유착한 부패 언론인과 기백을 상실한 기자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리영희는 "이승만 정권에 매수당하지 않고 신문기자로서의 정도를 걸으려고 노력하는 기자들이 합동통신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어요."라고 회상한다.
합동통신에도 정도를 지키는 언론인, 어용 사이비 언론인 두 부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깨어 있는 언론인들이었다. 리영희는 이 같은 회사 분위기를 타고 기자의 정도를 걸었다.
리영희는 틈틈이 번역 일을 하였으나, 조그마한 초보 기자 월급에 생활이 늘 궁핍하였다. 이런 가난 속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돌이 지나고 병들어 끝내 살지 못했다. 이러한 궁핍 속에서 구한 부업이 국군연합참모부에서 '일일 국제정세 분석보고'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리영희는 새벽 4시에 출근하여 8시 반에 끝나는 합동통신 외신부 일을 끝내자마자 연합참모부로 달려가 부업을 시작했다. 리영희의 부업은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옮기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중학교 동창이 경영하는 오퍼상에서 나오는 영문을 번역해주는 등 기자생활 10여 년이 지나도록 그는 고단한 부업 인생을 면하지 못했다. 그는 부패언론인이 아니었으며, 궁핍을 팔아 기자정신을 지키고자 한 정직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글쓰기에 관한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으며, 7년간의 군 통역장교 생활을 하느라 더욱 모국어와 떨어져 있었다. 그는 나이 30세가 다 되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구입해 남몰래 독학하여 맞춤법과 글 쓰는 법을 익혔다.
이승만 정권은 언론인을 탄압하고, 야당 의원들이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운 틈에 보안법 개정안을 3분 만에 국회 법사위에서 날치기 처리하고, 농성하는 야당 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하는 등 비민주적 독재 행위로 새로운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고, 민심이 흔들리자 그 원인을 야당과 언론의 선동적 비판으로 돌리며, 야당 의원 조봉암을 사법 처형하는 등 독재를 이어갔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리영희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사건의 하나는 [[<경향신문> 폐간]]이었다.
리영희는 이승만 정권의 포악상을 지켜보면서 그저 통신사 외신부 일이나 열심히 하며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국내 언론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외신을 통해 감행하는 길을 찾았고, 그것이 <워싱턴포스트> 기고였다.
리영희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워싱턴포스트> 익명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이승만 정권을 고발하는 글을 계속 썼다. 리영희는 원고를 미국으로 보낼 때는 보안에 각별히 조심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 장교들이나, 믿을 만한 사람이 미국에 갈 때 이를 부탁하였다. 미국에 도착하면 우체통에 넣어달라며 미국 우표를 붙였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알리는 리영희의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을 통해, 비로소 미국 언론은 한국의 내부 정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언론사는 일본에만 특파원을 상주시킨 채 한국 문제는 주일특파원을 통해 입수하였기에, 한국 관련 기사는 그다지 충실하지 못했다. 그런데 리영희의 정확한 사실 전달과 예리한 분석은,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 특히 4.19혁명과 이승만의 거취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리영희는 1959년 풀브라이트 장학계획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았다. 리영희는 면접시험에서 대부분의 기자들과는 달리 당시 등한시되고 있던 이공‧과학기술 분야를 공부해 보겠다고 하여 그 희귀성 때문에 선발되었다.
그런데 출국을 앞둔 8월 말, 아버지가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리영희는 환갑상도 차려드리지 못하고, 궁핍 탓에 셋방을 전전하며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시게 만든 불효에 통곡했다.
리영희는 미국 체류기간 중에 마음먹고 하와이의 한국독립운동 단체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에서 진짜 독립운동가(단체)들은 해외에서도 핍박받거나 소외되고, 이승만 등의 부도덕한 협잡꾼들이 활개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통탄했다.
미국 연수를 끝마치고 리영희는 귀로에 일본 도쿄에 들러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노래를 샀는데,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리영희는 중국혁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적지 않은 한국의 언론인이 '풀브라이트 장학계획' 코스로 미국연수를 다녀오면서, 미국에 우호적인 친미언론인이 되었으며, 정‧관계에 진출하여 출세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리영희는 미국에 가장 비판적인 언론인이 되었다.
리영희는 귀국하여 합동통신에 복직하였다. 그러던 중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4.19혁명이 일어났다. 리영희는 4월혁명의 현장에서 펜을 놓고 서슴없이 시위대열에 몸을 던졌다. 4월 19일 학생시위대가 광화문에서 경무대(청와대)로 돌진할 때도 리영희는 그 속에 끼었다. 4월 18일 고대생들의 데모 이래 일주일 동안을 집에도 가지 않고 통신사에서 숙식하며 데모 속에서 살았다.
리영희는 <워싱턴포스트>에 4.19혁명의 실상을 고발하는 기사를 몇 차례 기고하였고, 한국의 학생시위에 대한 정확한 실상을 미국에 알렸다.
리영희는 외신기자를 하면서 세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피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에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다양한 책을 구해 읽었다. 또 중국과 소련의 분쟁을 목격하면서 맑스이론과 마오쩌둥이론에도 접근하게 되었다.
리영희가 주로 읽은 것은 『경제학‧철학 초고』나 『독일 이데올로기』등 초기 저작들이다. 그 저작들을 통해 리영희는 초기 맑스의 휴머니즘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20대 청년들의 혁명가적인 삶에 대해서 존경과 경탄의 눈으로 마오쩌둥의 저작을 읽는다. 독서를 통해 인식의 틀을 잡게 된 리영희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윤리도덕‧세계관들과 함께 사회주의적 그것들에 대한 인식도 갖게 된다.
리영희는 이 혁명시기 4.25교수단의 시위에 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시위에 참여한 교수들이 비겁했다는 주장이다. 교수들은 이승만이 이미 실권한 사실을 알고서야 뒤늦게 나섰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뒤늦게 슬쩍 숟가락만 얹어놓은 꼴이었으니, 리영희의 눈에 그들의 행태가 곱게 비치지 못했다.
이승만이 쫓겨난 4.19혁명 공간에서 리영희는 희망에 부풀었다. 리영희는 계속하여 <워싱턴포스트>에 한국 사정과 사태 진전을 분석한 글을 기고하였다. <워싱턴포스트>에서는 1회 고료로 15달러를 소액수표로 보내왔다. 당시 리영희의 월급이 1만 1000환이고 환율이 650이었으니까, 1회 고료는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결과적으로 리영희는 <워싱턴포스트> 기고로 인하여 생활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이 무렵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미국의 저명한 진보적 평론지 <뉴리퍼블릭>에서 원고 청탁을 해 왔으며, 리영희는 <중립주의 사상의 대두에 관한 한국의 논평 - 국토 분단의 비극>이란 논제로 2000단어의 평론을 써 기고하였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이 끝나갈 무렵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의 몸이 좋지 못해 아이는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기자‧교수생활과 군부독재 (박정희 정권 속에서)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세력이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5.16군사정변)을 일으켰다.
5.16군사정변은 양심적인 언론인으로 올곧게 살고자 하는 리영희에게 청천벽력이고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4월 혁명 과정에서 생의 환희를 느꼈던 것이 군사정권 치하에서 고난과 역경으로 바뀌게 되었다. 누구보다 의기 넘치는 언론인으로서 군부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군부독재와 치열한 싸움에서 리영희가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인‧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정권장악이 확고해지자 방미 길에 올랐다. 1961년 11월 11일부터 15일 일정의 미국 방문이었다. 리영희는 훗날 이를 두고 “정권을 세운 박정희가, 마치 옛날 왕조시대에 세자책봉이나 왕위계승의 윤허를 얻고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상전의 나라 중국을 찾아가는 꼴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기 위해서”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리영희는 박정희의 방미 취재 기자로 지명되었다. <동아일보>의 권오기, <조선일보>의 김인호 기자와 함께 가게 되었다. 군정 당국은 합동통신 편집국장에게 이승만 정권과 민주당 정권에서 부정‧부패‧타락에 연루되지 않은 기자를 몇 명 선정해 보내라고 하여 3명의 명단을 올렸는데, 그 중에서 리영희를 지명한 것이다. 박정희와 리영희의 인연(혹은 악연)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동아‧조선 특파원들은 박정희‧케네디 회담이 끝난 뒤에 나온 공식발표를 그대로 기사화하여 송고하고, 이들 신문은 군사‧경제원조와 함께 박정희를 한국의 권력자로 공식 승인한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리영희는 공식발표 뒤에 깔린 미국 정부의 속셈을 알고 싶었다. 그동안 기고를 통해 사귀게 된 <워싱턴포스트> 주필과 편집국장의 도움으로 미 국무부의 정상회담 실무 담당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서 케네디가 한 발언을 소상하게 듣게 되었다. 특종기사였다.
리영희는 이 같은 내용을 취재하여 <워싱턴포스트>에서 영문으로 기사를 작성하여 본사로 보냈고, 이 기사는 국내의 많은 신문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이 기사의 후폭풍은 거셌다. 서울의 관가, 언론계가 발칵 뒤집혔다. 동아‧조선의 성공적 정상회담 기사는 묻히고, 케네디의 박정희에 대한 인식과 주문, 평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본사에서는 “수행을 중단하고 즉시 귀국하라”는 긴급 전보가 대사관을 통해 전해왔다. 이로써 리영희는 박정희 수행취재를 5일 만에 중단하고 귀국해야 했다.
귀국 뒤 박정희는 경무대(청와대)에서 군 실력자들과 방미외교 성공 축하파티를 거창하게 열었다. 다른 수행기자들은 다 초청하면서 리영희만 제외했다. 이 수행취재에 나섰던 동아‧조선 기자들은 그 뒤 국회의원, 부총리, 국회의장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리영희가 박정희의 자존심과 군사정부의 존립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기사를 쓰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사 내용이 미국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에 명줄을 대고 있는 군사정권이 리영희를 구속했다가는 이것이 외려 불리한 파장을 몰고 올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강압통치 속에서 리영희는 29세 때인 1957년부터 1963년 봄까지 6년여 동안 외신 기자 생활을 했다. 뜨거운 열정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국제사회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통찰과 식견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외신부에서 국제문제를 다루는 업무는 본인의 취향에도 잘 맞았다.
리영희는 1963년 여름에 외신부에서 정치부로 옮겨 중앙청과 외무부를 출입했다. 정치부 기자로서 사상논쟁을 비롯하여 대통령 선거전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해갈 즈음 리영희는 또 하나의 특종 기사를 냈다. "박정희가 케네디와 약속한 민정이양을 지키지 않아서 미국 정부가 식량 원조 집행을 보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리영희는 외무부를 출입하면서 또 하나의 특 종 기사를 냈는데, 한‧일 정부 양간에 오고간 소위 말하는 자금에 관한 것이었다.
리영희는 1964년 10월에 <조선일보> 외신부로 직장을 옮겼다. 합동통신 시절의 유명세 덕분에 스카우트를 받게 된 것이다.
군사정권 아래서 진실만을 추구했던 리영희의 투철한 기자정신은 곧 필화사건으로 나타났다. 리영희는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조선일보> 1964년 11월 21일자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안건을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에서 검토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날 밤 리영희는 네 명의 괴한에게 붙잡혀서 중구 저동의 쌍용빌딩 맞은편에 있는 일본식 건물로 끌려갔다. 리영희는 그 비밀장소에서 며칠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고 '적성국가 및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죄'(반공법 제4조 2항)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리영희는 두 달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12월에 불구속으로 석방되었으나 재판은 계속되어 제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석방된 후 정치부에 근무할 때 또 한 차례 필화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1966년 가을 중앙정보부는 리영희에게 후한 조건으로 베트남 전쟁 특별취재를 제의했다. 그러나 리영희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 후로도 몇 번을 거절했다. 이에 정부의 압박과 회사 내 부패 상사들의 압력이 있었고, 리영희는 반강제적으로 1968년 7월 31일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한국군 파병 무렵 거의 모든 국내 언론이 반공성전 등으로 베트남전쟁을 미화할 때도, 리영희는 전쟁과 파병에 반대하는 세계의 양심적 여론을 소개했다. 리영희는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정책기관의 최고 극비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하여 미국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의도를 폭로했다. 그는 베트남전쟁을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로 인식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훨씬 이전부터 리영희는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인민들의 식민지 해방과 반제국주의 독립투쟁, 사회혁명 등을 연구했다. 외신부에 있으면서 베트남문제에 천착해온 리영희는 훗날 <베트남전쟁>을 펴낼 만큼 전문가가 되었다.
조선일보 퇴직 후, 리영희와 그의 집안은 너무도 궁핍하여 생존권이 위협받는다. 리영희는 고민 끝에 펜과 지식이 아니라 육체노동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했다.
리영희는 생계를 위해 양계장을 해볼까 하고 관련 서적을 구해 연구했지만 밑천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고, 군대에서 배운 운전 기술로 택시기사도 생각해보았으나 어머니의 호통(힘들게 가르쳐놓으니까 택시운전이 웬 말이냐)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럴 무렵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으로 4년 옥살이 후 출소한 작가 이병주를 만났다. 이병주는 '아폴로'라는 1인 출판사를 내고 소설을 썼는데, 리영희는 그와 의기투합하고 외판사원으로 취직했다. 매일 새끼줄로 책 20권을 묶어들고 서울시내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들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외판원의 일을 하던 무렵, 리영희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합동통신사 후배의 입을 통해 소문이 돌아, 합동통신 발행인에게도 들어갔다. 1969년 2월 7일, 리영희는 <조선일보>에서 쫓겨난 지 6개월여 만에 언론계의 친정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마침 통신사의 기구 확장으로 외신부장 자리가 비게 되어서 운 좋게 다시 리영희를 찾은 것이다.
리영희의 <조선일보> 퇴직 이후 6개월은 특별했다. 처음으로 백수가 되어 그로서는 새로운 고민과 언론계 바깥세상을 겪게 되었고, 관념적 인텔리의 모순과 육체노동 생활에 대해 깊이 통찰하는 시간이 되었다. 리영희는 "인텔리가 노동자가 되는 것은 혁명가적 신념과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다시 기자라는 인텔리의 자리로 돌아간 리영희는 합동통신에서 '모든 외적 제약과 구속에 최대한으로 저항하면서 개인으로서 가능한 노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기자의 본분과 지식인의 역할에 열과 성을 다 바쳤다.
이 무렵부터 리영희는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고 대사회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다리>, <정경연구>등에 국내 문제와 비중 있는 국제관계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서 다시 열정의 기자생활을 하던 1971년, 리영희는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언론계에서 추방되었다. 두 번째 강제 언론사 해고였다.
리영희는 1972년 1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교단에 섰다. 신문사에 있을 때 2년 동안 출강한 적이 있었는데, 리영희의 평론활동을 높이 샀던 장룡 교수가 정년퇴임하면서 리영희를 추천한 것이다.
리영희는 언론사의 갇힌 영역을 벗어남으로써 보다 넓고 자유로운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연구하고 집필할 시간도 많아졌다. 그러나 리영희는 대학에서 강의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지식인이 사회문제에 실천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꺼린 채 사회로부터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것은 올바른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믿었다. '이론적 실천'의 길로 들어선 그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함께 행동에 나섰다. 세계사적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박정희 체제에 온몸으로 맞서는 저항의 길을 택한 것이다.
리영희는 1972년 3월 18일 결성된 앰네스티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 결성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고 이사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1974년 11월 27일 반유신 저항운동의 대표기구인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가 발족되었는데 리영희는 이사로 참여했다.
미국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중국의 유엔 가입으로 중국의 존재가 국제사회의 큰 이슈로 부각되던 1974년 한양대학교는 '중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는데, 리영희는 책임을 맡아 연구소장으로 활약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은 '교수임용제도'를 만들어 정부에서 찍힌 교수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해직시켰는데, 리영희 또한 민주화운동과 저술활동의 보복으로 강제 해직 당했다. 4년 만에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학교에서 해직되고 한동안은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 <한양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의 한 사람으로 발령하여 월급을 조금 받으며 생활하였다.
대학 해임 후, 저술활동을 하던 리영희는 1977년 11월 23일 아침 일찍 마을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있었다. 이발을 마치고 일어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사관들이 그를 붙잡아 집으로 데려갔다. 수사관들은 집의 서재를 샅샅이 뒤져 한 가마니 분량의 책과 함께 리영희를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 분실로 연행하였다.
12월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 피의자로서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검사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12월 27일 기소되었다. 기소장에는 중공 예찬, 공산주의사상 고무‧선전, 유신체제 타도 시도, 유언비어 날조 등 온갖 불온한 죄상이 다 담겨있었다. 그리고 기소장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판결문이 되었다.
리영희는 1심에서 징역 3년,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상고했지만 1979년 1월 16일 대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됐다. 많은 양심 있는 변호사들이 동분서주했으나 권력에 종속된 사법부의 전횡을 막을 수 없었다.
리영희가 구속‧기소되어 재판을 받을 때 국내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침묵한 반면 일본의 지식인들은 리영희 투옥에 대한 항의문을 한국 정부에 보내는 등 리영희의 무죄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리영희는 기소가 확정된 1977년 12월 27일,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었지만 모친상 장례식 참석은 허용되지 않았고, 당일 저녁 감방으로 돌아와서 감옥 식사로 어머니 제사를 지냈다.
리영희는 1977년 연말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내고,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광주형무소는 정치범과 북한의 남파간첩이 다수 수용되어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리영희는 '특별사동'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리영희가 광주형무소에서 힘든 수형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가정은 아내의 막노동과 지인‧학생들이 가끔 보내주는 푼돈으로 힘든 생계를 꾸리고 있었는데, 아내 윤영자 역시 양심범가족협의회에 참여하면서 점점 투사가 되어갔다. 그녀는 미국 정부가 한국의 유신통치와 긴급조치를 방조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카터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는 항의시위를 나갔다가 20일간의 구류를 살기도 했다.
리영희는 수감생활 중, 다방면의 많은 독서를 하였다. 그에게 광주형무소 1.1평의 감방은 지적 갈증을 가셔주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1979년 10월 하순 어느 날, 리영희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소식을 듣는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소식을 듣고 기쁨에 넘쳐 자신의 영치금에서 수용인 모두에게 김치를 돌리도록 하고, 의아해하는 앞방의 수감자에게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곧 풀려날지도 모른다"고 한 말이 화근이 되어, 리영희는 22일간 이중감옥이라 불리는 '벌방' 형을 받았다.
리영희는 1980년 1월 19일 만기일에 광주형무소에서 출소하였다.
교수생활과 군부독재 (전두환 정권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1979년 전두환 신군부의 12.12사태로 정치권력의 내부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리영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4년 만에 다시 대학 교단에 섰다. 복직과 함께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리영희가 다시 강의하는 장면을 촬영하여 보도하고, 국내 언론에서도 복직과 강의하는 모습을 실으며 비중 있게 다뤘다.
리영희는 '서울의 봄'기간에 외부활동에 별로 나서지 않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글을 쓰면서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 15일 교수 134명이 서명한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리영희는 이 지식인 성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서명을 했을 뿐이다.
1980년 5월 17일 밤, 리영희는 평소 거의 교제가 없었던 정치인 김대중과 엮이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리영희는 영문도 모른 채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다.
신군부는 앰네스티인터내셔널 한국지부 이사직뿐 아니라 회원신분까지 사퇴한다는 각서를 비롯하여 한양대 총장 앞으로 교수 사직서를 쓰게 했다. 이들은 집에 가서 도장까지 받아다 학교에 제출했다.
그런데 수사관들은 김대중과 엮으려다가 아무런 단서가 없으니까 이번에는 다시 엉뚱한 각본을 만들어, 리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광주폭동(5.18광주민주화운동) 배후조종 주모자'가 되어 있었다.
리영희는 그때까지 광주에 가 본 적이 없었으며, 남산 지하실에 갇혀 심문을 받는 동안 광주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리영희가 광주형무소에서 갓 출감한 까닭에 엮을 빌미가 없자, 2달여 만에 석방시켰는데, 리영희는 7월 17일 아내가 보여준 60일 전의 신문 호외를 보고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본인이 '광주폭동 배후조종 주모자'가 됐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앙정보부에서 풀려난 후 52세 리영희는 한양대 교수직에서 두 번째 해직되었다. 퇴직금도 없었다.
제5공화국 치하에서 리영희는 대외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집 주변에는 늘 감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자신과 가족의 호구지책을 위해서, 4년 여 동안 번역 일로 수입을 벌었다. 그리고 주로 책을 쓰는 것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
1982년 여름, 리영희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기사연)의 요청으로 3시간여에 걸쳐 <분단의 국제정세>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 되어, 1983년 1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일명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각급 학교 교사 북한 찬양 모임 사건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아무리 검토를 해봐도 기소할 빌미가 없어, 2개월 정도 수사 끝에 리영희를 기소보류로 석방했다.
리영희는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불려가기도 했다.
1984년 7월 17일 리영희는 다시 4년 만에 복직되어 대학으로 돌아왔다.
1985년 리영희에게 도쿄의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일 년 동안 공동연구를 하고 강의를 해달라며 초청을 받았다. 1977년에 썼던 <광복 32주년의 반성>이라는 글이 일본의 <사카이>에 번역‧소개되면서 일본 지식인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까닭이다. 리영희는 23년 만에 해외로 나가, 일본 대학의 교환교수 생활을 하였다.
리영희는 일 년 예정이던 도쿄 체류를 6개월로 줄이고 귀국했다가 독일(서독)로 건너갔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와 독일연방교회 사회과학연구소(FEST)에서 분단 독일과 분단 코리아의 비교 연구, 남북한 문제와 동서독 문제에 관한 토론 등을 위해 리영희를 초청한 것이다. 리영희는 이 시기 독일 측의 배려로 아내와 함께 건너가 부부유럽여행을 할 수 있었다.
1980년대, <민중교육>지 사건,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 구로 동맹파업, 삼민투위 사건, 주한 미 상공회의소 점거농성,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KBS시청료 거부운동, 개헌서명운동, 서울대 졸업식장 집단퇴장 사건, 구국학생연맹 사건, 박영진‧이재호‧김세진 분신 사건, 인천 5.3항쟁, 교육민주화선언,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제헌의회그룹 사건, <말>지 기자 구속 사건, 서울대 대자보 사건,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 사건, 건국대 점거농성, 안산 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노동자해방연구회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서울 택시기사 연대파업, 남노련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등 수 많은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1987년 6월 100만의 애국시민들이 거리로 달려 나와 장엄한 '6월 항쟁'의 불길을 올렸다.
리영희는 각성된 민중의 힘으로 군부독재자가 백기를 든 사태를 지켜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리영희는 6월 항쟁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별로 내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글을 읽어왔던) 청년학생들에게 그 몫을 돌렸다.
리영희는 1987년 8월, 버클리대학 아시아학과에서 그를 정식 부교수로 초빙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3학점의 '한민족 외세투쟁 100년사'라는 주제를 강의했다. 리영희의 강의는 큰 호응을 얻었다. 다양한 인종의 80명에 이르는 유학생들의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한 학기가 끝날 무렵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강의를 취재해서 기사화하였다.
1988년 5월 15일, <한겨레> 창간을 함께 했으며, 논설고문 및 이사직을 맡았다.
중‧노년생활 (노태우 정권 ~ 2010)
6월 항쟁 이후 전두환의 몰락, 민주세력의 부상, 제13대 국회의 여소야대 등 국내정세는 변화하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 7일 대북정책 특별선언을 통해 경직된 대북정책에 변화를 취했다. 이전 뿌리의 군부정권이지만 직선제를 통한 권력은 전두환 정권과는 다소 달랐다.
1989년 <한겨레>는 창간 1주년 특별사업으로 북한취재기자단을 구성하여 방북취재를 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진보적 신문으로서의 시대적 사명이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현장을 취재‧보도하는 것이라 여겼다.
리영희는 이 방북취재단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구속‧기소되었다. 재판부에서 징역 1년 6개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1989년 10월 구속 6개월여 만에 석방되었다.(추후 사면되었다.)
리영희는 생애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아홉 번 연행되고, 다섯 번 구치소에 갔으며, 세 번 재판을 받아 총 1012일의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석방 후, 리영희는 1989년 12월호 <사회와사상>에 <국가보안법 없는 90년대를 위하여>라는 장문의 논설을 썼다.
중국 천안문 민주화운동, 베를린 장벽 붕괴, 소비에트 연방 해체 등 사회주의권의 변혁과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해 갔다. 이 시기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은 리영희를 맹렬히 비난했다. 보수언론과 논객들이 앞장서서 공격했는데, 이에 대한 리영희의 생각은 차분하고 논리적이었다.
리영희는 1991년 1월 26일 연세대 장기원기념관에서 한국정치연구회 초청으로 사회주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 사회주의는 이기적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가?라는 주제로 간담회의 발언을 했다. 지식‧언론사회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리영희는 동유럽과 소련의 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리영희는 1991년 3월 미국 버클리대학 종교협의회와 4개 학교‧학생단체가 공동 주최한 한반도 통일전망에 대한 남북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고 참석했다.
리영희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 문민정부에 기대를 걸었다. 리영희는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청산, 이인모 북송,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실시 등 김영삼 정부의 과감한 국정개혁에 신뢰를 보내면서 남북관계가 화해협력의 방안으로 크게 발전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김영상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경직되고, 한반도 주변 외교도 미숙한 대처로 헝클어졌다. 측근의 부정부패도 심화되었다. 정권 초기에 숨을 죽였던 수구인사들이 대북강경론을 들고 나오고 김영삼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리영희는 <민족적 문민정부만이 통일 과업의 담당자가 될 수 있다>,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 등의 글을 써 이러한 정부를 비판하였다.
리영희는 김영상 정부 시대에도 보수언론으로부터 기피 대상이 되었다. <중앙일보>는 인터뷰를 하여 일부 인쇄까지 한 상태에서 리영희의 글을 삭제하고 재인쇄하는 행위를 하였다.
리영희는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1995년 한길사에서 제정한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는 '단재학술상'을 받았다.
1996년 결혼 40주년을 맞아, 아내와 함께 지중해 여행을 떠났다.
1998년 11월 10일 북한 당국의 개별초청으로 53년 전 헤어진 형님과 둘째 누님의 생사확인을 위해 방북하였다. 그러나 모두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혈육은 조카만 만날 수 있었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3.1절 90돌 축하로 대규모의 사면조처를 실시할 것으로 보도되었다. 리영희는 이와 관련 정부가 지난해와 같이 이른바 '준법서약서'라는 것을 사면의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자 그 부당성을 논박한 공개서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부탁>을 김대중에게 보냈다. 김대중 정부는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양심수들의 석방에 '준법서약'의 굴레를 씌우지 않았다.
2000년 5월, 리영희는 미국 뉴저지 주 버클리오션 비치 호텔에서 열린 제1회 '세계한민족포럼'에 참석했다. 같은 해 6월,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제4회 만해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6월, 6.15남북공동선언을 앞두고 청와대의 초청을 받아 김대중 대통령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2000년 11월 16일, 리영희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어 팔과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건강이 차츰 호전되어, 2003년 3월 19일 미국의 이라크전쟁을 규탄하는 <미국범죄米國犯罪>라는 한시를 지어 언론에 공개했다. 3월 28일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이라크전 파병 반대시위에 참여하고, 각종 언론 회견 등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노무현 정부 파병에 반대하고 비판하였다.
2002년 겨울, 태국의 논카이라는 시골마을에서 요양하였다.
2003년 여름,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요양하였다.
2006년 6월, 리영희는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한반도의 새로운 전진 : 코리아-러시아 협력과 미래>를 주제로 한 제7회 세계한민족포럼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2006년 한국기자협회가 제정한 '기자의 혼 상'에 리영희가 첫 수상자가 되었다.
2006년 9월 5일 리영희는 '지적활동'의 마감을 선언했다.
2007년에 <한겨레>가 제정한 '한겨레 통일문학상'을 받았다.
2008년 5월, 전남대학에서 제정한 '김대중 학술상'을 받았다.
2009년 7월, 이명박 정부와 관련하여 "지난 1년 반 동안 이명박 통치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적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고 비난했던 리영희는 그해 말 언론사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 행태를 비판했다.
2010년 12월 5일, 리영희는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면목동 소재의 녹색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동안 성장한 두 아들은 컴퓨터 엔지니어와 의사로 각각 일하고, 딸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느라 12년 만에 대학을 졸업, 결혼하여 주부가 되었다. 리영희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따뜻한 남편과 자상한 아버지 노릇을 해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미안하게 생각했다.)
리영희와 중국
리영희는 중국의 작가 루쉰을 존경하고 또 닮고자 했다. 루쉰은 중국인들에게 영국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로마 롤랑, 러시아의 톨스토이에 필적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반면 비판자들도 적지 않았다. 리영희는 루쉰을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다.
루쉰은 "나는 한 마리 상처 입은 하이에나다. 홀로 황야를 달리며 자신의 혀로 몸에 난 상처자국을 핥아내고는 다시 전투에 뛰어들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한국사회에서 독재의 수족이 된 공권력과 수구언론이 민주‧통일인사들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부정적 의미의 '하이에나'와는 전혀 다른 뜻에서) 그대로 리영희에게 투영될 수 있다. 리영희는 삶을 대하는 기본자세에서 루쉰에게 빚을 졌다고 여겼고, 루쉰의 젊은 날의 행적을 더듬으며 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담금질했다.
루쉰에 대한 이러한 리영희의 삶의 태도는 魯迅과 나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리영희는 중국에 대해서 심도 있는 연구를 하였다.
<권력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는 장제스 시대(1926~1949)를 부제로 달았을 만큼 장제스의 등장과 몰락을 조명한 내용이다. 한때 중국 민중의 영웅 장제스가 농민과 민중을 배반하면서 몰락하게 된 과정을 추적, 지도자의 교훈을 찾는다.
<사상적 변천으로 본 중국 근대화 100년사 - 서구 문명 극복의 100년> 역시 리영희의 중국탐구가 돋보인다.
리영희는 중국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까닭을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다." "둘째,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회형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셋째, 중국혁명 1세대들의 도덕주의와 순수한 인간주의적 면모에 매혹되어서이다."
리영희는 1974년 한양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다. 리영희에게 중국문제연구소는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각종 자료를 입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미국식 또는 전통적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와 문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련의 관료중심적‧비밀주의적 공산주의도 아닌, 그 양 체제의 장점을 취사해서 동양적 가치관으로 수정된 '제3의 사회제도'랄까, 그런 것을 중국혁명에서 찾아보려 했고, 또 그렇게 기대했다." 이런 연유에서 리영희는 특히 1970년대에 중국 문제에 천착하게 되었다.
리영희는 혁명적 변환 과정에 있는 중국의 각종 자료를 입수하고, 이것을 토대로 중국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되었다.
리영희는 중국어를 해독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1960년대 들어서서, 중국혁명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전되면서 "루쉰과 마오쩌둥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글을 배운 것"이다. 리영희는 합동통신 기자 시절 새벽 5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면서도 틈을 내어 공부해 결국 중국어 해독 가능 수준에 도달했다.
대학교수 재임 중에 리영희의 연구 초점은 특히 중국에 집중되었다. 중‧일관계의 오늘과 내일, 중국 평화 5원칙 외교의 안팎, 중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저우언라이 외교의 철학과 전개, 제3세계는 왜 중국을 바라보는가, 중국의 국력-자력갱생의 철학, 마오쩌둥의 교육사상, 현대중국의 이해,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한민족 등을 주제로 방대한 글을 집필하였다.
리영희는 중국혁명을 연구하면서 저우언라이(주은래)를 각별히 존경하였다. 그의 인품과 외교력 그리고 무엇보다 외교가로서의 세련됨을 존경의 이유로 들었다.
리영희에 대한 평가
고은(시인)
"내가 단언하건대, 리영희 선생의 역사에 대한 감각은 거의 본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맹수나 작은 벌레들이 그들이 사는 환경의 어떤 일도 너무나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처럼 역사 변전이나 그 향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인식의 역량뿐 아니라 그가 받아온 오랜 수난의 역정 가운데서 터득한 통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리영희 선생을 시대의 선구자로 알고 있다. 옳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선구자와는 달리 시대의 후열에서 그 자신을 낮춰서 사랑하는 사람임을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그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다른 것은 다 두고라도 리영희 선생의 눈물을 배우고 싶다.
아, 며칠만 보지 않아도 그리운 형이여."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리영희 선생은 군사독재시대 이래 양심적인 지식인과 깨어 있는 시민‧청년학도들에게는 '사상의 은사'로 추앙받는 반면, 분단체제와 병영질서를 기반으로 영화를 누리는 이들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매도되었다.
하지만 그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추지도 않고, 어떤 유혹과 탄압에도 흔들리거나 짓밟히지 않겠다는 의지와 자기 삶의 원칙대로 살아왔다.
리영희 선생의 결곡한 삶의 궤적과 늠연한 선비적 자세는 광기의 맹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에 참 지식인이 취해야 할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직성과 엄격성, 불의에 맞서는 장렬함과 자신에 대한 준열함은 선비‧지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휴머니스트"라고 하겠다."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유신의 서슬 푸른 억압이 긴급조치 9호라는 말기적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던 1970년대 중반 암울한 시기에 나는 대학 초년생이었다. 유신교육 아래서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전환시대의 논리>(저자 리영희)에서 맛보았다. 유신 말기 젊은 지성들의 비판의식의 세례 현장에 언제나 이 책이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을 부모의 뜻과는 반대로 정치의 현장으로, 민주주의의 바다로 인도하는 길목에도 바로 이 책이 있었다."
김세균(서울대 교수)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저자 리영희)를 밤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을 먼저 발견한 동료가 내게 권했던 것처럼 나 역시 만나는 동료‧후배들마다 그 책을 권했다. 그러나 그 책은 우리가 지닌 상식에 어떤 것을 보태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허위의식, 그러한 미신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 따라서 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려면, 나는 먼저 내가 진실로 믿고 있었던 것, 내가 나의 '건강한 상식'에 비추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을 먼저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진실을 안 데 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진실한 것을 받아들이려면 그러한 괴로움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한 괴로움 속에서 이전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혁신시킬 용기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작가)
"나는 리영희 선생처럼 살고 싶었다. 소신껏 글을 썼다는 이유로 공안기관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넘겨져 징역형을 선고받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사는 것을 꿈꾸었다. 언론의 자유가 신문사 사주의 독점특권이 되고, 언론사가 사회의 목탁이 아니라 세습권력이 되고, 기자가 언론인이 아니라 기업의 직원처럼 행동하는 시대가 되고 보니 (선생의) 글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성찰을 게을리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아 진실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았느냐? 너는 언제나 너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인식을 실천과 결부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느냐?" (이 질문 앞에) 부끄럽다. 당당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사상의 은사' 앞에 서는 것이 정녕 이토록 두려운 일인가."
김만수(대학교수)
리영희는 1960년대부터 한국현대사에서 냉전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쳤으며, 어둠을 통해 동시대 인물들의 역사인식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 역사인식의 씨앗은 극우반공체제에 대항하고 이를 무너뜨리려는 데 귀중하게 뿌려졌다.
이러한 인물은 그 역할과 위상을 제대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스승과 은사는 없고, '어용'이 난무했던 1970~80년대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리영희를 평가하려는 작업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우선 무엇보다도 아직 그가 '역사적 인물'이기보다는 우리의 '동시대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이 '시대의 양심'과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내리기 때문이다.
강준만(언론학자)
"우리는 이 책(강준만 저서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에서 리영희라는 창을 통해 한국현대사의 큰 줄거리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창은 어떤 창인가? 투명한 창이다. 100퍼센트 투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리영희만큼 투명한 '인간 창'은 없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리영희는 순수 그 자체다. 이게 찬양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뒤집어 말해보겠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에 관한 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물이다.
'아사리판'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선 같이 따라서 미치거나 타락해야만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을 기할 수 있다. 선량한 보통사람들도 방어적인 수준에서 어느 정도는 그런 판에 물이 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리영희는 한사코 그런 최소한의 '방어'마저 거부했다. 미욱할 정도로 스스로 고난을 자초했다."
고병권
"그는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었다. 각성이란 누군가를 배울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리영희를 통해 보건대, 스승이란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배우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뜨렸고,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한마디로 그는 일깨우는 사람이었다."
이찬수
"리영희는 종파간 갈등과 대립을 넘어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가치를 통합시켜, 결국 이 땅을 하늘과 같은 이상적인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의 삶에서 종교의 정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리영희는 문장으로 강연으로 포악한 독재정치를 타파하는 험난한 길을 걸으면서 예수나 붓다의 마음도 동시에 살아내기 위한 소박한 듯 원시적인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늘 붙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무신론자 리영희를 진정한 '종교정신'의 구현자로 보는 것은 정당하다."
이대근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억압자에 저항함으로써 자유를 느꼈던 그에게는 저항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안수찬
"그는 출입처의 경력에 기갈 들지 않았다. 주요 출입처를 섭렵하는 길을 마다했다. 권력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악성 바이러스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는 더 큰 프레임으로 현실을 보았다. 국내 정치를 세계 정치의 구조 위에, 반공이데올로기를 역사의 도도한 흐름 위에 올려놓고 헤집어 봤다. 보는 눈이 넓으니 남이 보지 못한 사실의 연쇄 고리를 끄집어냈고 그것이 진정한 특종의 바탕이 됐다."